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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주 Nov 12. 2023

나의 유학방랑기 4

누구나 꿈을 꾸고, 꿈을 좇고, 꿈을 이룬다면...

미네소타는 미국에서 가장 춥기로 소문이 난 곳이다. 그래서 거기는 1년에 반이 겨울이라는 둥 영하 20도 밑으로 내려가는 험한 곳이라는 둥 오지라는 소문만 있었고 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가장 춥다는 1월에 미네소타에 도착을 했다. 경고의 말과는 다르게 눈에 덮인 북유럽풍의 아기자기한 집들과 눈 덮인 도로를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다양한 차들도 너무도 아름다웠다. 배정받은 기숙사는 더욱 입이 쩌억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미시시피 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방이었다. 시작이 좋았다. 미네소타의 특수교육학과에는 교수도 많았다. 각 전공별로도 있었고 지체장애뿐만 아니라 학습장애, 청각장애, 시각장애, 지적장애등 거의 모든 프로그램이 있었다. 학교도 무척 넓어서 학교 안으로 대중교통인 버스가 다니고 있었고 캠퍼스 내에 유명한 호텔도 있었다. 본 캠퍼스가 있는 미네아폴리스와 옆 도시인 세인트 폴을 합쳐 트윈시티라고 부르는 곳이었는데 학교 캠퍼스가 두 도시에 각각 있었고 세인트 폴에는 농과대학과 수의과 대학등이 있어 오래전부터 서울대학 농과대학과 자매결연이 되어있어 많은 한국 유학생이 있었고 그들이 남아 형성한 꽤 큰 한인사회가 있었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프로그램도 다양했고 교수님들의 연구활동도 활발했다. 그래서 거의 모든 박사과정 학생들에게는 조교로 일하며 연구경험도 늘리고 수업료와 생활비까지 주는 대학이었다. 무엇보다도 미네소타 대학에는 내가 좋아하는 컴퓨터며 다양한 수업이 널려있었다. 나는 박사과정의 과목 외에도 생물, 물리, 화학등 늘 동경하던 과목들도 듣고 통계와 컴퓨터 과목도 마구마구 들었다. 조교로 일을 하면서도 한 학기에 7-8과목씩 듣기도 했다. 대학 내에 도서관도 서너 개가 있어서 매일 여기저기 다니기도 했고 9시에 문을 닫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새벽 1시까지 여는 곳으로 옮겨 컴퓨터를 만지작 거렸다. 애플 컴퓨터인 맥킨토시를 처음 접한 곳도 그곳이었다. 공부할 수 있는 자원이 너무도 풍부했다. 


수업료도 저렴했고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총장이 박사과정 학생들을 지원하겠다는 정책을 세워 조교들에게는 월급 이외에 수업료도 할인해 주었다. 보통 박사과정의 학생들에게 교수들이 50% 정도의 일을 주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나의 지도교수는 미네소타로 옮긴 첫 학기가 지난 후부터 75% (주당 30시간)씩 일을 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조교 중에는 74%까지 일을 하는 친구들도 몇몇 있기는 했는데 그 이유가 75%의 일을 주면 법적으로 의료보험까지 학교에서 들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거의 주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75%로 조교를 하며 의료보험도 있고 많은 월급으로는 호화(?)로운 생활이 가능했다. 거기에다 로터리 클럽에서 일시불로 받은 장학금으로 자동차까지 구비한 나는 유학생 사이에 부르주아지급 유지가 되어 있었다. 밤에 유학생들과 어울리다가 헤어질 때면 같이 놀던 유학생들을 차에 태우고 각자 사는 곳까지 한 명씩 다 데려다주고 마지막에 집으로 오는 것이 유지로서의 책임(?)이었다.   


미네소타에는 두 부류의 유학생이 있다고 들었다. 한 그룹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라도 공부도 잘하고 용기와 꿈으로 유학을 오는 친구들이었고 다른 그룹은 유학자체에 관심이 있기보다도 돈 많은 부모에게 등 떠밀려 오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돈이 있어야만 유학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부에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돈이 없어도 유학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나의 유학방랑기 3"에서 소개한 토플과 GRE, 그 외의 조건을 잘 갖춘다면 누구나 유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준비를 잘하면 자신이 원하는 학교를 갈 수도 있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낸 수업료는 한 학기에 $4:50 정도였다. 지금으로 치면 한 5-6,000원 정도로 보통 그것은 누구나 위생비로 내는 기본만 내고 6년을 다닌 것이다. 그때가 좋았던 시절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아직도 연방정부 교육부의 연구비와 민간기업의 연구비등이 아직도 각 대학교수들에게 제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아이를 낳으며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며 제주도로 보낸다는 말이 있듯이 미국에도 동부에 있는 대학을 선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의 대학은 한국처럼 수직적인 서열로 정해지기보다는 훨씬 더 평준화되어 있다. 각 주마다 주립대학이 있고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인 서부도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미국의 좋은 대학 순위등을 다투어 소개한다. 물론 순위를 지정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변인을 고려한다. 예를 들어 학교의 자원, 교수/학생 비율, 수업료, 생활비, 졸업생 비율등 다양한 변인들을 지표로 측정해 학교들의 순위를 정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순위가 높은 학교가 "좋은 학교 (특히, 우리나라의 개념에서)"인 것이 사실이고 그런 정보로 학교를 정하는 사람을 막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여기서 오래 살며 대학교수로 느낀 생각은 내가 가고자 하는 대학에 내가 관심 있는 분야를 전공한 교수가 있는가와 얼마나 많은 연구비를 가지고 활발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가, 또 외국 유학생에게도 장학금을 공평하게 주는 학교가 좋은 대학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남부 쪽에는 학비가 동부나 서부에 비해 저렴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정부에서도 많은 지원을 하기 때문에 남부 쪽의 대학들이 유학하기에 좋다고 본다. 당연히 좋은 대학들도 많이 있다. 서부로 유학을 하면 한인인구가 많아서 불법이기는 하지만 파트타임으로 취업을 해서 생활비 정도를 조달하는 학생들도 많이 본다. 다만 돈의 유혹에 빠지면 유학은 끝이 나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초심을 잃지 않고 공부를 해서 교수가 된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공부를 하다가 다른 길을 찾아 새로운 삶을 설계하는 것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에 중국음식을 파는 정말 유명한 패스트푸드가게인 "Panda's Inn"은 중국유학생이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은 본인이 얼마나 무엇을 원하는가에 달려있다. 지난번 글에서도 다루었지만 유학을 오면 우선 캠퍼스 내에서 일을 잡아 우리나라의 주민등록번호와 비슷한 사회보장 번호 (Social Security Number)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지문채취등 신원조회를 할 수 있게 되어 신원조회를 요구하는 국가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위만 해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하기보다는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형성되는 현시대에 발맞추어 어느 곳에서든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이 좋지 않은가? 아! 한국의 인구감소 문제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 애국을 하는 것도 중요하긴 하다. 이렇든 저렇든 자신의 꿈을 꾸고 꿈을 좇아 결국 그 꿈을 이루어 내는 삶을 살아보는 것도 멋있지 않을까? 2002년을 기억하는가? 가슴 뭉클하게 전 국민이 외쳤던 "꿈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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