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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주 Nov 05. 2023

성서적 특수교육 1

이름으로 부르시다

나름 성실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60과 70대 초에 학교에서 배운 대로 음주가무를 죄악시하다시피 해서 음악시간에 불러야 하는 노래 외에는 라디오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노래를 들어도 별로 감흥이 없는 편이었다. 유학시절에 함께 살던 지리학 전공의 유학생 룸메이트는 트롯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는 "이 뽕짝은 구구절절이 우리의 인생을 담아 부르다"며 음악을 듣지 않는 나에게 "아직 인생 경험을 못했구먼"하고 혀를 찼다. 그러던 내가 바뀐 것이다. 인터넷으로 한국방송과 새로운 K-팝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음악경연 프로그램이 되었다. 저마다 색다른 매력으로 경합을 펼치는 노래는 녹음실에서 부른 노래와는 다르게 살아있는 느낌이라 좋다. "싱어게인"이라는 프로는 특별한 장치가 있다. 참가자가 이름을 가린 채 번호로만 불리는 것이다. 출연자들은 자신의 이름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마지막 결승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긴장감과 불렸을 때의 환희의 감정을 나는 함께 그 전율을 느끼며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신다면 그 기쁨과 행복의 크기는 얼만할까?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 게 친구처럼 가깝고 다정하게 느껴진다.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이름이 뭐세요?"하고 묻자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의 여호와라고 해"라고 서슴지 않고 알려주셨다 (출 3:13). 우리나라의 통성명과 비슷한듯하다. 내 이름은 효도 "효"자에 착할 "선"으로 효도하고 착하다는 뜻의 "효선"이야. 역시 우리나라 신앙이 큰 이유가 하나님의 문화와 비슷해서 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고유함과 개성의 함축한 표현인 이름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과 닮은 DNA도 가지고 있다(창 2:8). 사람들을 사랑하는 심장, 일비충천 하기 위해 호흡을 크게 드려마시는 폐, 세상의 어떤 더러움도 걸러내는 신장, 호랑이를 만나도 대적할 수 있는 용기의 간, 침투해 들어오는 적을 물리치는 비장외에도 육부까지 손수 빚어주셨으니(시편 139: 13-14) 우리 한 명 한 명이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소중한 사람이다. 그러니 이름을 가진 모든 사람이 귀한 사람인 것을 늘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명 한 명을 고유의 이름으로 부르시듯이 각자에게 맞는 다른 재능을 주셨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8-11). 누구는 사범대학교로 진로를 정하도록 가르치는 재능을, 어떤 이는 의대를 가서 사람들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은사를, 또 다른 사람은 신학대학으로 부르시어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등등 9가지를 드셨지만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가수 윤수현은 3분 33초의 짧은 시간에 67의 직업명으로 노래를 하지 않는가? 아마 이 세상에는 아직도 우리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재능들이 많을 것이다. TV프로의 "극한직업"으로 소개되는 땀 흘리는 재능꾼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등장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최대한 갈고닦아 각 직종에 고수가 된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가? 성경에서는 또 다른 예로 우리는 한 몸이지만 여러 지체로 각각 다른 기능을 한다고 설명해 주신다 (로마서 12:4-5). 이런 성경구절을 읽으며 나는 그런데 왜 학교나 주일학교에서는 똑같은 기능을 하도록 일방적이고 일제수업의 교육방법을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엄지발가락을 아무리 잘 가르치고 높게 목표를 정한 들 눈처럼 볼 수 있는 기능을 습득할 수 없지 않은가? 세상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을 잘 해낼 때 나라가 조화롭고 부강한다는 것을 다 아는데 왜 부모들은 자식을 한 직종으로 몰아가고 학교는 지루하리만치 누구나에게 똑같은 교과내용을 가르친다.


탓 로스(Todd Ross)라는 사람이 10년 전에 "평균의 신화"라는 주제로 한 강연이 미국 교육에 큰 파장을 일으켰었다. 미공군은 1952년에 훌륭한 조종사와 좋은 성능의 전투기로 무장을 했는데도 훈련의 결과가 나쁘게 나오는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조종사들의 조종실력을 탓해보기도 하고, 전투기 제작의 문제점을 꼽아 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조종사를 훈련시키는 교관들의 무능함일까 의심도 해 봤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이유를 알아냈다. 음속보다 빨리 나르는 전투기의 조정사들은 일순간에 결정을 해야 하고 그 결정으로 삶과 죽음이 갈릴 수도 있기 때문에 조종석이 그들의 몸에 잘 맞아야 하는데 바로 조종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찾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투기를 제작할 때 몸집과 체형이 모두 다른 조종사들이 누구나 거의 다 탈 수 있도록 조종석을 만들기 위해 평균 사이즈로 디자인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렇게 전투기를 제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평균사이즈로 디자인을 하는 것이 맞는 말인 것 같다는 생각할 수 있다. 


미 공군 소속 연구관이었던 길버트 대니얼스(Gilbert Daniels)는 "평균 디자인" 방법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를 연구로 밝혀냈다. 그는 4000명의 조종사를 대상으로 키, 어깨, 팔길이등 전체 몸통사이즈를 재고 그중에 평균 점수와 일치하는 사람의 수를 알아봤다. 결과는 "제로!" 아무도 평균사이즈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평균사이즈로 제작한 전투기의 조종석은 오히려 아무에게도 맞지 않았던 것이었다. 미 공군에서는 과감하게 그 결과를 받아들여 "평균 디자인" 방법을 금지하였다. 미 공군에서는 평균사이즈 디자인 대신 "가장자리 디자인 (Design to Edge)" 방법을 채택했다. 그 방법은 가장 키가 작은 쪽의 조종사부터 가장 키가 큰 쪽의 조종사까지 모든 조종사의 몸에 맞출 수 있게 조종석의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드는 디자인이었다. 그 디자인으로 전투기를 만드는 것은 시간과 경비가 너무 많이 들어 불가능하다는 반발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실제로 제작을 해보니 우려와는 달리 예산이 더 들어가지 않았다. 연구결과와 "가장자리 디자인"의 개념으로 제작된 기구등은 현재 우리들도 쉽게 접하고 있다. 버튼으로 의자가 앞뒤로 상하로 움직여 각각의 체형에 맞출 수 있게 제작되는 자동차 의자나 사무용 의자등에서 광범위하게 찾아볼 수 있다. 


탓 로스는 현재 공교육에 점점 많은 재정을 쏟아붓고 있지만 교육성과는 오히려 떨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퇴율은 매년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매년 중퇴자 중 천재에 속하는 4퍼센트에 달하는 인재를 잃고 있는 것이다. 공교육 문제점의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교사와 학생과 부모의 잘못이라고 지적을 한다. 하지만 공군 전투기의 예를 대입시켜 본다면 쉽게 교육현장의 문제점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교과서는 평균적인 학생을 대상으로 만들고 있는데 학생들은 각자 잘하는 부분과 못하는 부분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평균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은 결국 아무에게도 좋은 교육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공군의 예를 볼 때 자명하다. 평균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은 학생들의 재능을 파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읽기 능력은 부족하나 과학에 천재성을 가진 학생은 평균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에서 실패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공교육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가장자리 디자인"의 교육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고등학교를 중퇴해야 했지만 현재는 하버드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자신이라며 우리가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 새로운 방향으로 바라보면 학생 개개인의 잠재력을 충분히 이끌어내는 교육이 될 수 있다고 강연을 마무리했다. 


하나님께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끼리는 왜 대충 비슷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모아 아무에게도 맞지 않을 평균으로 대하고 또 내가 그렇게 평균으로 취급받는 것을 의심 한번 안 하고 당연하게 받아 들일까? 적어도 가정에서는 각자의 이름으로 존재감을 가지고 주어진 역할이 다른 것처럼 학교에서 특히 하나님을 배워가고 닮아가는 교회학교에서는 반듯이 한 명 한 명을 귀하게 여기는 기본적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


특수교육을 전공하면서 장애학생을 포용해야 하는 사람들의 제1번은 크리스천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성도들과 나눌 수 있는 지식을 얻기 위해 캘리포니아에 있는 풀러신학대학 (Fuller Seminary)에서 목회학을 수료했으나 특수교육이나 교육방법이라는 틀에서 성서를 바라보는 글이라 성경말씀을 현대적 표현으로 쓰기도 하고 또 해석을 잘못했을 수도 있음으로 먼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이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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