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열쇠는 바로 “동기유발”
뒤돌아 보면 중학교 내내 영어라면 진저리를 치던 내가 어떻게 한국말로 영어를 가르치던 교사를 넘어서 미국대학에서 영어로 강의를 하는지 스스로 놀랄 때가 많다. 초등학생 때 영어에 대한 첫인상은 꼬불거리는 새로운 문자를 줄줄 읽어 내려가는 오빠들을 보면서 나는 경의로움과 존경심 가지면서 그 알 수 없는 암호 같은 글씨에 대한 이질감과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때부터 나는 영어를 절대로 못 배울 것이라고 결심(?)을 했던 것 같다. 꼬부랑글씨는 나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고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었다. 시험 때마다 대충 답을 골라 잡는 것이 최선이었기에 그 결과를 받아볼 때는 참담하기보다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왜 나는 영어에 그렇게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을까? 딴 과목은 잘하면서 왜 영어를 못하는지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중3이 되었을 때 학교에서 처음으로 전교생이 영화관람을 하게 되었다. 꼬마 때 언니 오빠를 따라 극장에 가서 "지옥문"이란 영화를 본 후 밤새 식은땀을 흘리며 무서워했던 이후로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도 요조숙녀를 키워내는 요람이라 너무 엄격해서 영화 단체관람이 그때가 처음이라고 들었다. 대한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던 미국 영화였다. 그 유명한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수녀였던 말괄량이 마리아가 트랩가 아이들의 가정교사가 되어 일어나는 에피소드로 지금까지 유명한 영화 속의 노래만큼이나 영화에서 그려지는 모든 장면이 아름다웠지만 영어로 나누며 전해지는 감동적인 스토리는 충격이상으로 다가왔다. 너무도 큰 감동과 충격으로 그 후 나는 혼자 그 영화를 13번을 보고 또 봤다. 레코드판을 사서 소리 나는 대로 한글로 받아 적어가며 에델바이스며 도레미송을 따라 불렀다. 한국어로 개사한 노래가 유행하는 바람에 도레미를 첫 자로 시작하는 단어들의 사용했다고 이해가 되었지만 외국사람도 우리나라 단어를 쓰는지 궁금해졌다.
왜냐하면 아무리 듣고 또 들어봐도 한국말 가사의 단어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내용이 궁금했다. 사전을 찾게 되었고 "도"가 암사슴의 도란다. 우리나라 "시"는 "티"로 발음하기 때문에 노래에서는 "독일빵과 마시는 차"라고 했다. 그런데 쉽게 귀에 들리는 노래보다 더 아름다웠던 마리아와 트랩대령의 사랑이야기며 엄마를 일찍 여위고 가정교사 손에 양육되면서 엄한 아버지의 관심을 받으려고 말썽을 피우던 일곱아이들이 예쁘게 성숙해 가는 과정들이 영어로 소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했다. 나도 영어로 그렇게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안현필”이 집필한 영어책을 샀는데 서문에서 가장 소중한 공부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처음에 잘 이해가 안 되더라도 앞뒤로 왔다 갔다 하지 말고 무조건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독파를 먼저 하고 그러고 나서도 이해가 안 되면 같은 방법으로 첫 페이지부터 끝페이지까지 열 번이고 스무 번을 읽으라는 것이었다. 그 조언은 박사과정과 학자로서 현재까지 살아오며 지키는 평생의 가르침이 되었다. 나는 안현필 영어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13번을 읽고 또 읽었다.
내친김에 고등학교에서는 영어책의 각 장에 나오는 톰과 메리의 대화를 딸딸 외었다. 드디어 외국인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비록 첫 대화가 “How are you? Fine, thank you.”였지만 파란 눈의 그 사람이 내가 말하는 영어를 알아듣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너무도 신기하고 스스로 감격스러웠다. 그 후 나는 영어책 본문은 막히지 않고 읽게 될 때까지 수십 번 수백 번을 읽었고 짧은 대화형 문장은 모두 외워버렸다. 한 편의 영화에서 동기유발이 된 나는 영어에 관심이 있고 너무도 원하다 보니 한국에서 외국인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70년대에도 미국인들을 찾아 만났고 대화를 했다. 영어에 대한 몰입도는 주변의 친구들과의 대화도 잊게 했다. 그때도 왕따는 있었다. 마치 뭔가에 홀린 듯 학교도 친구들도 관심이 없어 혼자 빈 공간을 걸어 다니듯했기에 한 번은 고등학교 때 일진 친구들에게 떡볶이 집으로 끌려가 왜 무시하느냐고 훈계를 받은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그렇게 해서 나는 영어를 잘하게 되었다. 필요한 말을 하는 이상으로 나를 표현하고 감성을 나눌 수 있었고 통역을 할 수도 있었다. 대학기간에도 영어에 몰입해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던 바람에 “선교사에 의해 키워진 고아”로 소문이 났었던 것도 모르고 다니다 졸업 후 수십 년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듣고 웃었었다. 그래도 대학 때는 영어 때문에 과외로 필요한 용돈을 충당할 수 있었고 늘 다른 친구들보다 돈이 풍족해 대학생 사이에서는 그 당시 재벌이었달까.. 하하! 그 후 삼육원이라는 특수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그 당시 삼육원은 지체장애학생들이 기숙사에 기거하며 학교와 병원, 직업훈련을 한곳에서 받을 수 있는 한국 제1의 재활센터였다. 거기에서 영어로 대화를 하는 것이 가능했던 나는 1981년 세계장애자의 해를 맞이하여 노르웨이 적십자에서 주체하는 국제대회에 한국 적십사 대표 2명 중 한 명으로 당당히 발탁되어 드디어 세계를 향해 나가는 여정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