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엄마
어렴풋이 의식이 들며 눈을 떠보니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에 덩그러니 누워있는 자신이 보인다. 하반신 전체가 아직도 내 몸의 일부인지를 느낄 수 없는 상태에서 악몽에서 깨어난 양 머리가 깨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전날밤이었다. 거실에서 넘어진 생각이 난다. 몸속에서 “퍽”하며 둔한 소리가 들렸고 거실에 쓰러진 나는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다리가 부러진 것이었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당도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달려가는 동안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던 모든 동작이 움직일 수도 없었고 움직여 보려는 생각이 통증으로 뇌에 전해져 왔다.
아침이 오자 담당의사가 들어와 깁스를 하는 대신 부러진 대퇴골 안쪽으로 쇠파이프를 삽입해 고정시키는 수술이 모두 잘 되었고 곧 회복이 될 거라는 말을 전했다. 의사가 병실을 떠나자마자 아직 몸을 일으키기에도 힘이 없고 통증도 잦아들지 않았는데 물리치료사가 들어와 이리저리 움직이며 운동을 지시했다. 병원에서의 처음 며칠은 통증과 수시로 드나드는 간호사와 치료사들의 분주함으로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지나갔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병실을 드나드는 발길도 줄어들고 혼자 병실에서 지내야 하는 24시간이 너무도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아침이 찾아오고 하루가 시작되면 그 긴긴 하루를 채워야 하는 것이 너무도 지루하고 심심했다. 평상시 잠시를 쉬지 않고 돌아다니던 나는 화장실 가는 일조차도 간호사를 기다려야 하는 감옥살이 같은 생활에 적응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힘들었다. 유학생 친구들은 다들 공부하기에 바빠서 병문안을 하겠다는 생각초자 못할 것이고 나도 그들이 올 거라는 기대조차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한국에서부터 알던 친구로부터 다음날 오후에 병원에 오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날은 아침부터 친구를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동안 지루하기만 했던 24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희망의 즐거움이 그렇게 큰 것인지는 평소에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난 재미있는 이야기도 준비했고 내가 병원에 누워있는 동안 학교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들을 생각으로 병실로 들어서는 그를 환한 얼굴로 반갑게 맞았다. 그러나 같은 유학생 처지였던 그는 숙제가 많다며 가져온 책을 전해주곤 5분도 채 되지 않아 바삐 등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실망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실질적인 만남을 5분이었을 망정 잠에서 깨어 그가 온 오후 4시까지 나는 하루종일 즐겁지 않았는가?
흰 벽만 바라봐야 했던 병원에서의 긴 시간은 오랫동안 떨어져 살던 엄마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서울을 가면 엄마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여행가방만 집어던지고 하루종일 친구들을 만나느라 엄마에게 코빼기도 보여드릴 여유가 없었다. 가끔 일찍 집에 들어간 저녁이면 엄마는 나와 도란도란 사는 이야기를 나누시고 싶어 하셨는데 난 엄마가 쓸데없이 올케들의 험담을 하려는 것이라며 냉정하게 말을 막곤 했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냉정함에 놀라 난 왜 그렇게 엄마와 살갑게 못하는지 후회를 하며 그런 생각을 들게 하는 엄마를 멀리하고만 싶었다. 나는 엄마에게 한 번도 곁을 내드린 적이 없는 나쁜 딸이란 죄책감이 맘속에 도사리게 되었고 그런 나는 사회에서 남들에게 잘하면 잘할수록 착한 척하는 이중적인 나쁜 사람이란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 우울증에 시달렸었다. 그러나 작은 기다림이 하루의 지루함도 잊게 했고, 머릿속으로 많은 이야깃거리를 준비하게 했고, 좋았던 추억을 떠올리며 행복함으로 하루를 지낼 수 있었던 병원 생활에서 큰 깨달음이 있었다.
결코 엄마에게 따뜻하게 대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에게 섭섭함보다는 그 한없이 지루한 기다림 속에서 당신을 보러 올 딸이 있다는 작은 희망이 되어 엄마에게 기대감과 자부심의 행복함을 주는 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나는 나쁜 딸이 아니었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사는 내 모습을 오히려 아파하실 거란 작은 깨달음에 스스로를 용서하게 되었다. 깨달음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박사를 끝내고 졸업식에 엄마를 초대해 미국구경을 시켜드리겠다던 계획인 듯 계획 아닌 막연한 생각이 나의 일방적이고도 엄마를 배려하지 못한 생각임을 깨달았다. 엄마는 자꾸 연로해 가시고 언제 어떻게 건강을 잃으실지 또 우리는 언제 서로의 곁을 떠날지 모르는데 젊은 내 스케줄에 연세든 엄마를 꿰맞추는 어리석은 계획이었던 것이다. 부모님과의 계획은 바로바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병원을 나오자마자 바로 엄마를 미국으로 초대했고 그해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와 둘만의 긴 여행을 했다. 프로리다의 디즈니 월드도 가고 나이아가라 폭포에도 갔다. 엄마는 비디오를 찍고 헬리콥터를 타고 하루종일 힘들게 걷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어린애처럼 즐거워하셨다. 엄마와 둘이서 따뜻한 밥도 해 먹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미네소타의 산과 들로 나아가 올케와 오빠들의 흉도 실컷 보며 즐거운 시간을 지냈었다. 엄마는 1년 뒤에 있을 나의 졸업식에 오시기로 하고 보름정도의 일정을 마치신 후 서울로 돌아가셨다. 엄마가 무사히 도착하셨다는 전화를 받고 안도를 한지 몇 달이 안되어 엄마는 췌장암으로 2개월밖에 더 사실수 없다는 진단을 받으셨다. 지금은 프로리다의 한 선인장 밭에서 앉아 환하게 웃으시며 찍은 사진 속에서만 엄마를 만나고 있다. 남들 다 아는 작은 진리를 너무 늦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기에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스스로 나 자신을 한없이 자책하던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러 내가 엄마의 나이 쪽으로 부쩍 가까이 다가서니 친구들의 부고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같은 또래들이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세상을 떠날 날을 기다리면서 어느 때는 준비할 틈도 주지 않고 갑자기 찾아오는 이별들이 있다. 걸어서 쉽게 발 닿을 곳에 사시는 집사님이 생각지도 못한 어느 날 돌아가셨다. 그의 죽음은 엄마를 잃었을 때와 비슷하게 조용하지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엄마 이후로 나의 강한면과 여린면을 다 알던 사람이었고 무엇보다도 나는 무엇이든지 다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맹신까지 있었다. 자주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몇 달 만에 혹은 몇 년 만에 이야기를 해도 마치 어제저녁 아쉽게 헤어진 어릴 때 동무처럼 두어 시간 동안 수다 보따리를 풀어도 지루한 줄 모르던 사람이었다. 죽음을 준비하듯이 집안을 정리하는 나와는 달리 절대로 죽음이 다가오지 않을 사람처럼 내일만을 바라보며 살던 그분이 심장마비로 집안 가득히 쌓여있는 모든 것을 순간정지를 시키고 홀연히 떠나고 말았다.
이번도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누구나 그렇게 한순간 갑자기 사라지는 죽음을 동경하고 있다. 나도 거기에 동참을 해 고개를 끄덕여왔다. 그런데 이번 친구의 죽음을 통해 생각하기도 입에 올리기 조차 싫어하고 장례식장에 가야 하는 그 모든 것을 다 인지밖으로 쫓아내면서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물론 떠나가는 입장에서는 아직도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데 동의한다. 하지만 보내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심리적으로 준비를 하고 정신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 떠나는 사람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로 예기치 못한 한 순간에 사라질 생각 말고 두서너 달 아프면서 서로의 시간을 갖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도리며 예의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죽음이 계획대로 다가올 것이며 얼마큼 시간을 갖는다고 인간의 정이 정리가 될 수 있겠는가? 피식하며 열띤 생각에 김을 빼본다.
또 한 번 소중하게 다가온 죽음을 통해 엄마와 간발의 차이로 정서적 심리적 치유를 할 수 있었던 경험을 되뇔 수 있었고 이번에는 막내오빠 부부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막내오빠와 나는 두 살 차이로 어릴 때 매일 오빠는 나를 업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두 눈만 빤짝거릴 정도로 온몸이 시커멓게 땀과 먼지로 뒤범벅되어 된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오빠와 나는 동네에서 소문난 “새로 난 거지” 깐부였다. 딱지치기며 구슬치기에서 오빠는 깡통 하나가 가득히 차도록 따왔고 나는 그것을 세고 정리하는 일을 했었다. 소심한 듯 내성적인 오빠는 어느 날 처녀처럼 훌쩍 커버린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서로 철이 들고 중학교를 준비하던 초등학교 어느 때인가부터 우리는 심리적으로 헤어지게 되었다. 한국에 갈 때마다 한 번씩 보기는 했고 “미국에 한번 놀러 갈게” “응 꼭 오셔”라는 인사말만 주고받은 지 벌써 30년이 되었다. 친구가 떠나고 한없이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들자 오빠에게 전화를 했다, “11월에 미국에서 보자”라고…
이 글은 2002년 5월 17일 어버이달에 즈음해 미주 중앙일보에 게재되었던 글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