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주 Sep 16. 2023

아버지

나를 낳아주신 소중한 사람

우리 집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빛은 좀 배랬지만 균형감 있게 양옆으로 정리된  멋있는 콧수염에 중절모자를 쓴 독립투사 같은 모습의 아버지가 또렷하게 나를 바라보고 계신 사진이다. 어려서 몸이 약했던 나는 엄마와 오빠들을 떠나 돌봐주시던 분과 병원 옆에 방을 얻어 둘이 살다가 그분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여섯 살 때쯤 처음 집으로 돌아왔다. 극성스러운 오빠들이 놀려대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쓰던 1년 사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것이 내가 기억할 수 있던 아버지와 나의 첫 번째 만남이었고 그 만남은 그렇게 서먹한 사이에 싱겁게 끝이 났다.


대학 때 강의실에서 교수님을 기다리며 친구와의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던 때 누군가 나누는 대화 중에 “아버지”라는 단어가 갑자기 귀를 때리자 마치 컴퓨터가 저장된 자료를 찾는 것처럼 머릿속이 윙윙댔다. 매치되는 자료가 없었다. “아버지? 누굴까? 뭐 하는 사람일까?” 질문조차가 어리석어 보이는 누구나 쉽게 알고 있을 그 “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에게는 답답함을 일으키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그 아버지라는 사람이 나에게도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루종일 답답함으로 지냈다. 그것이 나와 아버지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서른 고개를 넘기며 나에게는 아버지와의 세 번째 만남이 있었다. 사는 것이 힘들고 외로울 때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마음속에서 슬며시 고개를 들곤 했다. 아버지는 예쁘다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나에게 세상 사는 법도 가르쳐주며 힘들 때 위로도 해주셔야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린 나를 버리고 혼자 훌쩍 떠나버렸던 것이다. 난 가슴속에서 큰 분노가 올라왔다. 그렇게 책임감 없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슴속에 분노라는 단어로 자리 잡고 있던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나도 모르게 늘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했다.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와 돌이킬 수 없이 먼 관계이지만 늘 불편했던 마음을 다독이고 안정을 찾기 위해 나를 버리고 떠나버린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을 했다. 집에서 화초를 가꾸면서도 생각을 했고 산책을 나가서도 끝없이 길을 바라보면서도 생각에 빠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서 돌아가신 분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모신다는 진오기 굿을 할 때가 생각났다. 그때 나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 형용색색의 치마를 둘러 입고 부채와 방울을 들고 신명 나게 춤을 추던 무당이 굿판을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 중에 갑자기 나를 찾아 두 손을 꼭 붙잡고는 뭐라고 뭐라고 하며 넋두리를 했고 굵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이었다. 나는 무섭고 당황해서 무당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굿판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아버지가 어린 자식을 두고 떠나가기 너무 힘들어 그런 거라며 나를 안타까워하며 모두 눈물이 흘렸던 것이 너무도 놀라워 기억 속에 남았던 것이었다. 그날 나는 무당을 통해 아버지가 주는 용돈이라며 손에 쥐어졌던 돈을 내려다보던 기억도 있었다. 


내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던 무당과 그 모습을 보던 가족과 친지들의 눈물을 훔치던 그 장면들이 떠오르자 젊은 나이에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어린 나를 두고 가려니 눈인들 제대로 감으실 수가 있었을까 하는 아버지 쪽의 마음이 전해지며 오히려 우리와 함께 더 좋고 행복한 생활을 못하고 가신 아버지가 불쌍해 가슴 아파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아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나니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사진 속에서나마 그동안 딸에게 가르치지 못했던 많은 세상이야기를 하시고 계신다. 


요즘은 아버지를 잊고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이 너무도 많다. 이혼이 늘며 양쪽을 오가며 불안정하게 사는 아이도 있고 한쪽 부모를 따라 다른 부모를 보지 못하고 사는 아이들이 많다. 부부는 갈라서면 남이라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애틋한 관계를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한쪽 부모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통제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에게 같이 살고 있지 않는 부모의 나쁜 점을 이야기하거나 그 사람이 얼마나 실망을 주는 사람인지를 아이들에게 비양대며 결론을 지어주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정체감을 찾기 위해 언젠가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자녀 스스로가 정립해야 한다. 다른 편 부모의 장단점도 바로 아이를 구성하고 있는 반이나 되지 않는가? 다른 편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결국 아이의 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희망을 주자. 같이 살지 않아도, 자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자. 떨어져 사는 부모와 같이 살며 재미있었던 이야기도 해주고 아이가 가지고 있는 다른 부모를 닮은 좋은 점도 지적해 주자. 아이에게 부모 자식 간의 역할을 올바로 알려주고 서로 연락하고 대화하도록 적극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주자. 자기의 부모를 인정하고 부모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곧 나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미래의 안정된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이 글은 2001년 10월 26일 미주중앙일보 전문인 칼럼에 기재되었던 내용을 새롭게 구성한 글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장애아 부모를 위한 10가지 제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