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최종 목표는 무엇이어야 할까?
성경을 읽다 보면 현재 우리가 어린 학생들을 교육하는 목표가 무엇일까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교회학교는 찬양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암송하는 등 신앙교육에 집중하는데 비해 학교교육은 문제해결능력과 의사소통 능력을 가진 시민교육으로 이어지도록 다양한 과목을 가르치는 정도로 교육내용은 조금 차이가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성경이 추구하는 최종목표와 교육이 추구하는 목표가 비슷하다. 또한 교육방법과 교육활동에서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교육목표를 성취하도록 돕기 위해 친구들과 어울려 즐겁게 움직이고 노래하고 새로운 내용을 학습하는 교육활동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학교교육은 각 학년마다 지정된 교과과정으로 일 년 단위의 단기 교육목표에 집중을 하느라고 궁극적으로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 성인이 되었을 때의 삶을 준비해야 하는 기본목적을 잊어버리고 있다. 오늘 가르치는 학습내용이 궁극적인 교육의 목적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모든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내용인지, 또는 각 아동이 가지고 있는 특성에 따라 개별화 교육은 실시가 되고 있는지, 교사들은 아동들의 미래모습을 생각하며 자신의 교육내용과 방법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마치 틀에 찍어낸 듯 그 해에 가르쳐야 하는 내용에 집중해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교육결과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서 일반교육이 보다 효과적이고 거시적인 목표를 잃지 않기 위해 성서적 측면에서 강조하는 교육을 짚어보기로 한다.
첫째, 교육의 목표는 누구나 행복하고 감사하며 사는 삶이 목표이다. 방황의 끝판왕이던 내가 헤매고 헤매다 고등학교 때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뭔가를 찾고자 했던 나는 예수를 믿기 시작하며 엄청 변화를 했다. 말도 많이 하기 시작했고 교회도 열심히 서너 군데를 다니기도 했다. 토요일에는 목사, 선교사, 신부, 수녀님들이 모이는 특별 기도회도 빠지지 않고 다녔다. 그때 믿음이 한참 깊던 친구가 나에게 "너는 크리스천으로서 삶의 목표가 뭐냐"라고 질문을 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성경공부하고 찬양하고... 뭐 그렇게 사는 것 아닐까 하고 처음 머릿속에 떠오르던 그 생각은 답으로 좀 부족한 것 같아서 나는 몇 날 며칠을 깊이 고민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두어 달 지나서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 답은 좀 너무 추상적인 것 같았다.
나는 성경을 읽고 성경공부에 참여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이길 원할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그러다 내가 만난 성경구절이 있었다. 바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6-18)"였다. 복음성가 찬양을 하던 중에 이 가사를 읊조리면서 바로 늘 이것을 실천하는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성서적 특수교육에서 모든 학생들이 늘 행복하고 감사하고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교육의 긍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장애가 있던 없던, 나이가 적던 많던, 어떤 지위와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도 감사하고 행복함을 느끼고 필요한 것은 알릴 수 있는 사람으로 교육된다면 가장 좋은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가 어려서부터 늙어갈 때까지 필요한 것을 늘 준비하는 교육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 22:6)"에서 보듯이 교육을 어려서부터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에서는 한 가정에 아기가 태어나면 어린 자녀를 하나님과 모든 성도들 앞에 데려와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 알리고 부모와 가족은 물론 성도 모두가 그 아기의 성장과 교육에 함께 하겠다는 약속의 세례예식을 갖는다. 성당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영적인 성장에 동참할 대부 대모를 정해 크리스천의 삶으로 이끌도록 한다. 부모, 대부모, 교회 공동체는 바로 "아이가 행해야 할 길을 가르치라"는 성경말씀에 따라 아이의 교육에 참여하는데 그 이유는 "조기교육을 통해 배운 것은 늙어서까지 떠나지 않고" 평생 동안의 길라잡이가 되기 때문이다. 즉 나이 들어 필요한 것들을 미리 준비해 가르치는 것이다.
일반교육에서도 조기교육이 있고 유아특수교육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교육이 평생 동안 삶에 필요한 지식과 지표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목표가 분명하다. 하지만 일반교육은 "늙어도 떠나지 않을" 것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왕성하게 일할 나이에 좋은 직업을 갖는 것에 집중을 하다 보니 좋은 시민으로 성장하고 살아가는 것과 같은 거시적인 교육목표를 간과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적 특수교육에서는 유아부터 노년까지의 미래를 바라보고 준비하는 "전환교육"이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유년기에 학령기를 준비하고 학령기동안 정체성을 정립하는 청소년기를 잘 준비하고 이끌어야 한다. 청소년기부터는 사회로 나아가 생활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들을 익혀야 하고 성인이 돼서는 자기주장을 하고 책임과 의무를 수행하는 행복한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갈고닦아야 한다.
셋째, 독립된 삶을 목적으로 한다. 성인이 되면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독립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에베소 5:31)"라고 부모의 품을 완전히 떠나 독립된 성인으로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일반교육은 졸업한 후에 일어나는 일을 학교교육의 일부로 보지 않는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보다도 "완전한 독립"이 가능한 성인의 삶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마마보이" "파파보이"등은 몸이 성장해도 정신적 성장과 완전한 독립이 되지 않았고 또한 성장한 자녀를 성인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늘 그의 삶에 관여를 하려는 일부 그릇된 부모들의 개입을 끝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자녀들도 부모의 영향을 떠나서 자신이 독립된 주체자로서의 삶을 구축해야 하고 부모도 자녀가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중 고등학생의 때부터 그들을 독립된 사람으로 인정하고 떠내 보내는 과정을 스스로 배워야 한다.
특히 장애가 있는 자녀들은 장애로 인해 생각하는 것이 늘 어린아이 같아서 ("정신연령") 부모의 도움이 끊임없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독립적인 성인으로 떠내 보내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러나 장애자녀도 품 안에만 두려고 하기보다는 성인나이가 되면 ("생활연령") 독립적 생활을 인정해야 한다. 유아세례를 통해 부모뿐만 아니라 대부 대모 또 모든 교회 공동체가 함께 교육하고 한 아기의 삶에 일원이 되는 돕는 것을 교육에서도 일반사회의 공동체 일원이 모두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협조하고 참여해야 한다. 장애를 가진 아동들의 경우에 부모와 함께 사회와 국가가 책임을 나누어 그들이 성인이 되면 부모를 떠나 일반 사회에서 독립된 삶을 이룰 수 있도록 사회복지 체계가 갖추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성서적 특수교육은 부모와 장애자녀 모두가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도록 지식과 기술 이외에 정신적 성장과 성숙한 국가와 사회의 유지를 목표로 해야 한다.
넷째, "질 높은 삶"을 성취하는 것이 최고의 교육목표이다. 가끔 뉴스에 나오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 순위에 늘 의아함과 감동이 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며 이 세상의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게 부유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우리나라는 그 순위를 위쪽부근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사회복지가 잘 되어있어 모든 국민들이 안전하고 부유하게 살고 있는 북유럽의 나라들도 그 순위의 가장 꼭대기를 차지하지 못한다. 이상하게도 먹는 것도 부실해 보이고 빼빼하게 마르고 편리한 문화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환경에서 맨발로 다니거나 등에 짐을 지고 가축과 가까이 사는 나라들이 심심치 않게 1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네팔이라는 나라가 순위의 맨 위를 점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에베레스트라는 심령한 산을 가지고 있어 모든 국민의 자존감도 높고 행복지수가 높은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결국 돈이나 명예 그리고 편리한 문화생활이 행복지수나 삶의 질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인데 우리의 교육은 "삶의 질"을 간과하고 있다.
성서적 특수교육은 매일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6-18)"를 실천하는 "질 높은 삶"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무엇을 하는 사람이던 늘 감사하고 즐거운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장애인 부모들까지도 자녀의 "삶의 질"보다는 사회가 추구하는 "정상"을 바라보고 그와 비교해 뒤 쳐지는 장애자녀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아파한다. 우리는 돈을 많이 벌고 문화생활을 하고 지위가 높아져 존경을 받고 권력을 갖게 되면 행복해지고 "삶의 질"이 자연적으로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기쁨이 있는 삶이 아니면 의미가 없고 무엇을 얻어도 감사함이 없으면 행복한 삶이 아닌 것을 우리는 안다. 먹을 만큼 있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평범한 삶이 좋은 건 아는데 좀 심심한가? 돈이 많고 적고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의 중요성은 이미 모든 사람들이 강조하고 그렇게 살기 때문에 내가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성서적 특수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한 삶"을 성취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