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주 Jan 28. 2024

나의 유학방랑기 10

목표를 향한 힘겨운 적응기간

미국대학의 교수에 적응하는 첫 학기는 너무 힘들었다. 미국 공립교육 시스템을 모르니 학교에서 언제 뭘 가르치는지 학급배치나 한 반에 학생수는 몇 명인지 또 어떻게 생활지도를 하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교사자격증 과정에 있는 학생들을 가르치려니 수업준비만큼이나 밖의 교육체계와 문화를 먼저 배우는 것이 중요했다. 매일같이 일선학교를 찾아다니며 출퇴근을 했고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세크리멘토에 있는 주정부 교육부를 옆집 드나들듯이 미국 공교육 시스템을 배우러 다녔다. 현재는 일반교사 자격증 없이 바로 특수교사 자격증 취득이 가능해졌으나 내가 처음 온 그 당시에는 캘리포니아에서 교사가 되려면 일반 4년제 대학을 마치고 나서 교육대학원의 2년 일반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에 2-3년의 일반 교사경력을 갖추어야만 특수교사 자격증 과정에 입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이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학생들이 반이상이었다. 더욱이 교사부족 현상으로 거의 모든 학생들이 임시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현직교사로 일을 했기 때문에 교육현장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교육 실천방법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미국 공교육 현장을 배워야만 했다.


박사를 끝내지 1년밖에 되지 않은 내가 6년의 세월을 뛰어넘고 부교수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임용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두 눈을 부릅뜨고 쫒으니 불편했다. 그래도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있는 일이기에 당연하다고 무시하고 그저 내 발등에 떨어진 일에 정신이 없었다. 한참을 밖으로 나돌아 다니다 보니 학과장이 학교를 지키라고 했다. 개인적 연구도 중요하지만 학교회의 참석과 학생을 잘 가르치는 게 우선이라며 학생평가가 나쁘면 쫓겨난다고 닦달을 했다. 일반적으로 교수들은 종신계약 준비를 6년 동안 널널하게 하면 되는데 나는 협상을 너무 잘한 헛똑똑이 짓 때문에 부교수로의 임용에다가 2년의 경력 크레디트까지 받은 것이었다. 그것은 결국 내가 4년 만에 모든 것을 인정받을 정도로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라서 남보다 스트레스가 엄청 높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학생평가를 높이라고 다그치는 학과장의 조언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교수 평가기준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학생교육, 연구, 학교와 지역사회의 공헌도 등 세분야의 기준이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우선순위를 정하기로 했다. 내가 잘하는 연구분야를 제일 먼저 안정시키고 그다음 학생들의 교수평가를 높이고 마지막으로 공헌도를 생각하기로 했다.


첫 학기에 공립학교와 교육부 방문으로 공교육을 어느 정도 알고 난 후 두 번째 학기부터는 연구비를 가져 위해 그랜트를 쓰기 시작했다. 연방정부 교육국에서 주는 연구비 지원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순수연구를 위한 그랜트, 연구에 기반을 둔 시범사업 프로젝트, 그리고 교사양성 프로그램 지원이 있다. 당연히 새로운 교육방법을 개발해 내는 연구그랜트가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중에 박사를 이수한 지 5년 이내의 새내기 교수에만 주는 특별한 연구그랜트가 있다. 새내기 5년 내에 써야 하기 때문에 그 기회를 잡는 것은 그랜트를 쓰는 특별한 훈련을 받지 못한 채 교수가 된 사람들에게는 다급하거나 그림에 떡이었다. 우리 대학에서도 그 그랜트에 3년째 도전 중인 유능한 새내기 교수가 있었고 나도 첫 번째로 경합에 뛰어들게 되었다. 나는 교수로 온 지 1년 만에 첫 도전만에 바로 그 그랜트를 받게 되었다. 늘 나보고 우리 과에서 제일 약한 사람이라며 볶아대던 학과장이 그 결과를 들고 학장에게 뛰어가 얼마나 권위 있는 그랜트인지 호들갑을 떨며 설명을 하는 바람에 나는 내가 학장에게 인터뷰때 한 말을 증명하는 계기가 됐다.


당연히 몇 명의 교수들이 내가 실력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소수민족의 이름이기 때문에 소수자 우대정책으로 하나 받게 된 거라고 폄하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는 교수도 있었다. 사실 난 그런 평가나 소문에 그리 흔들리거나 화를 내거나 대꾸할 시간조차 없이 혼자 늘 바빴다. 그 후에도 나는 첫 번째 그랜트를 운영하는 동안에도 매년 그랜트를 써서 10여 년 동안 매해 연구비를 학교로 가져왔다. 또한 한국의 특수교육원과 협력사업으로 한국 특수교사들이 매년 여름마다 우리 대학으로 연수를 와서 오전에는 미국 공립학교에서 실습도 하고 미국의 서비스 기관들을 견학하며 오후에는 강의를 듣는 한 달 동안의 연수과정을 5회 정도 실시하기도 했다. 나의 연수목적은 단 하나였다. 미국의 특수교육을 일방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특수교육을 미국 공립학교 교사들과 나누는 것이었다. 영어가 좀 부족하다고 망설이는 선생님들에게 한 달을 마무리하면서 미국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시범수업을 하도록 계획했고 미국 신문에 까지 기사화되기도 했다. 우리 한국 선생님들이 교사로서의 자존감과 긍지심이 높아지는 것을 느껴며 나는 마냥 행복했다. 지금까지도 참가자 선생님들 몇 분 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한다. 


나는 다음 목표로 가르치는데 최선을 다했다. 대학교 내에 교수들을 대상으로 효과적인 교수법을 가르쳐주는 센터를 찾아가 여러 가지 강의도 듣고 인터넷에 교육자료와 과제를 올리는 법들을 배웠다. 하지만 미국 교수들처럼 유창한 영어로 설명을 하거나 미국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교육현장에서 일어나는 실제 예를 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국 특수교육에서의 경험, 아시아 교육과 심리학에 입각한 교육법을 미국의 학문과 비교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지만 학생들의 평가는 늘 야박했다. 그러다 어느 학기에 학생들의 평가가 우리 과 교수들의 평균 평가점수보다 다 높게 나오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것이 기적인 이유는 그 기적적인 평가점수는 그 이후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그와 비슷한 수준의 평가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학생들의 낮은 교수평가가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일이라 생각하고 늘 수업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다. 그렇게 학교에 수백만 불이 넘는 그랜트를 가져와 학교에 공헌했고 한인사회와 한국의 특수교육계에 많은 강의를 하며 지역사회 공헌도도 높이게 되었다. 학생평가가 최고치를 찍던 그 기적의 해에 나의 4년째 평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4년 재임기간 동안에 학교에서 요구하는 평가기준의 세분야를 대충 맞춘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처음 미국대학에 머물겠다며 스스로 세웠던 세 가지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본토박이 박사들과의 개인적 도전, 한국과 미국 특수교육의 징검다리 역할, 그리고 한인 교민사회에 특수교육 서비스를 알리는 일의 목표를 달성하면서 드디어 첫 교수평가를 기다리게 되었다. 학과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내 방을 드나들며 종신계약 평가서류는 제출하더라도 정교수 승진은 포기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다른 교수에 비해 아직도 실력도 경력도 뒤떨어지니 서류를 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종신계약 평가를 기대리는 6년 동안에 대학 캠퍼스에 교수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2년 크레디트를 받았지 실질적으로 대학에 있던 기간은 4년밖에 안되기 때문에 신청자격이 안된다며 학과장은 자진 사퇴를 권유했다. 매일같이 내 연구실로 찾아와서는 설득을 했다. 나는 나를 다른 교수와 비교하며 늘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그에게 내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내가 그렇게 정교수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학과장 평가를 쓰라고 했다. 얼마 후 대학 변호사 측에서 2년 크레디트가 법적으로 캠퍼스에 있었다고 인정이 된다는 공고를  올렸다. 나의 신청이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종신계약 평가 전부터 많은 교수들이 스트레스를 못 이겨 우울증 약을 먹는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나는 늘 무슨 일엔가 너무 바빠서 우울증을 겪을 시간도 없었다. 또한 나는 살면서 이보다 어렵던 일들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종신계약 평가가 그리 큰 사건은 아니었다. 나는 꼭 되어야 한다는 집착도 없었고 떨어지면 나중에 또다시 될 때까지 하면 된다고 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서류를 정리해 냈고 심사가 시작되었다. 학과 심의 위원회, 학과장 평가, 대학 심의 위원회, 학장 평가, 총장의 마지막 평가 결과로 이어지는 첩첩산중의 긴 평가기간이다. 각 단계마다 평가보고서를 내고 다음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심사대상 교수에서 평가보고서를 통보하여 이의가 있으면 이의서를 제출하라는 단계도 있다. 지금은 다른 단계의 평가들은 생각도 나지 않지만 하도 학과장의 독촉에 시달리기도 했고 연구실에 오지 말라고 내쫓은 일도 있었고 해서 놀라왔던 학과장의 보고서는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렇게 부정적이던 태도와는 너무도 대조되는 "정교수로의 승진을 강하게 추천한다"라는 너무도 좋은 평가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몇 달 뒤 총장으로부터 정교수로의 승진 축하편지를 받았고 얼마 후 나는 미네소타 대학 총장님으로부터 장한 졸업생이라는 감사편지를 받았다. 박사과정을 끝낸 지 만 5년 만의 일이었다.


저의 유학방랑기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돈키호테 같은 방랑기를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가난한 젊은이들도 그리고 장애가 있는 젊은이들도 꿈을 크게 가지고 그들도 유학에 도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힘이 "자기 결정능력 Self-determination"이고 자기 결정능력이 세상의 어려움을 마주할 수 있는 우리들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신도"님과의 만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