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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주 Jan 14. 2024

나의 유학 방랑기 9

폭소의 대면 인터뷰

캘리포니아에 도착을 했다. 대학 측에서 마련한 호텔로 들어가 보름동안 열심히 외었던 예상 질문에 대답할 내용을 꼼꼼히 되 내어 보았다. 다음날 상쾌한 컨디션으로 인터뷰에 임하기 위해 잠을 청했지만 너무 긴장을 해서인지 밤이 새도록 뒤척이며 잠을 못 이루었다. 아마 욕심이 마음속에 움튼 모양이다. 날밤을 샌 아침을 맞아 일찍 떨리는 마음으로 학교로 향했다. 어? 뭔가 이상하다. 처음 유학을 왔을 때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UCLA)과 가는 방향이 달랐다. 캠퍼스를 옆에 두고도 뭔가 기억 속에 있는 UCLA 주립대학 건물들이 안 보여 대학 주변을 돌고 또 돌아도 그 대학이 내가 찾는 주소에 맞는 대학이었다. 좀 실망이랄까? 똑똑한 척은 혼자 다하고 그렇게 준비에 철저했던 내가 실질적으로 지원을 한 학교가 어딘지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 들어가 인터뷰를 하는 교수팀을 만나 내가 처음 한 말이 ”UCLA인 줄 알고 왔는데 아니네요." 하자 교수들이 빵 터졌다. 많이들 그렇게 착각을 한다고 말하며 같은 주립대학으로 자매 캠퍼스라고 알려주었다. 난 그날 인터뷰가 있던 건물에 들어서며 처음 느꼈던 그 실망감을 지금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대면 인터뷰에서도 전화인터뷰 때 물었던 것과 같은 질문을 중심으로 묻다가 한 교수가 교사양성 중심대학인 만큼 인터뷰의 핵심인 공교육 기관에서 교사경험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특수학교에서 5년간 가르친 경력은 이력서에 있지만 미국 공립학교의 경험은 없느냐는 것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으로 전학을 하기 전에 우연히 한 학기 동안 남가주 대학 (USC)을 다닐 때 일반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미국친구가 자기 반에 와서 한국음식 만드는 시범교육을 해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호박전을 준비해서 아이들을 호박 자르는 팀, 밀가루 묻히는 팀, 계란을 입히는 팀, 프라이팬에 굽는 팀으로 나누어 호박전을 만들어 시식을 했었다. 아이들에게 "호박전"이라는 한국말을 가르치기 위해 그 학교이름이 "호바트 초등"이었기에 "여러분이 다니는 학교 이름이 뭐예요?"하고 묻자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호바트 요"하며 합창을 했다. 그래서 호바~까지 하고 거기서 "ㄱ“음과 ”전"을 붙이면 "호바~ㄱ전"이라고 가르쳤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 한두 시간의 경험을 신나게 들은 교수들은 갑자기 미국 공립학교의 경험이 있는 것으로 인정을 했고 질문을 했던 교수는 “그 학교는 다문화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야”라며 아주 잘 가르쳤다고 거들며 칭찬을 했다.


그 당시 경제사정이 나빴던 터라 교수임용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타주보다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지원자만 인터뷰를 하기로 했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나의 지원서에 큰 관심을 보였던 한 교수가 특수교육과인데도 장애를 가진 교수가 없다는 점이 말도 안 된다며 나에게도 인터뷰 기회를 주자고 학장에게 목소리를 높이며 스스로 임용위원을 거부했다고 한다. 임용위원들과의 인터뷰가 끝나자 그 교수는 나를 따로 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미네소타 대학에 잘 아는 친구교수에게 연락을 해서 나에 대해 알아보았다고 했다. 내가 수잔교수와 어려움이 있었을 때 도와주었던 제니퍼란 교수는 그 교수에게 "잠재력이 많은 친구라서 너희 학교에 좋은 교수가 될 거야"라고 했다며 "꼭 우리 학교 교수로 왔으면 좋겠어"라고 하더니 열려있던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현재 일반교직 과목을 가르칠 사람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지체장애 전공이라고 하면 임용이 안될 테니까 학장 인터뷰에서 일반교직과목을 담당하겠다고 말을 하라"며 커닝을 시켜주는 것이었다. 당황이 됐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 문까지 닫아가며 몰래 커닝까지 시켜주는 상황이 너무 우스워서 깔깔대고 웃었다. 그렇게 커닝의 큰 도움까지 받아가며 첫 인터뷰에 임하고 있었다.


대면 인터뷰의 마지막은 학장과의 인터뷰였다. 학장은 나에게 학교를 소개했고 학과 인터뷰와 비슷한 질문들을 했다. 좀 다르다면 학과교수들은 교육능력을 중심으로 질문을 한 것에 비해 학장은 연구자로서의 역량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는 들고 있던 나의 이력서를 뒤적이며 그동안 발표했던 논문들을 보고 현재 포닥을 하고 있다는 점에 관심을 보였다. 이런저런 질문이 대충 마무리를 짓자 학장은 갑자기 “여태까지 자신의 장점을 잘 설명했는데 본인의 단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질문을 했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나는 잠시 당황을 했다. 보통 인터뷰에서 장점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단점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잠시 생각을 한 후에 나는 내가 완벽주의자이며 일중심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에 일중독 이기도 하고 남에게도 나와 같은 업무태도를 기대하기 때문에 주변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단점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며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협력하는 경험을 통해 나에게 주어진 일에 있어서는 아직도 책임 있고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가진 서로 스타일과 태도를 인정하고 함께 일해 나가는 가치와 기술을 배웠다고 대답을 했다. 바로 단점이면서도 큰 장점으로 연결되는 면을 짚은 것이었다. 


인터뷰가 끝으로 다다를 때 나에게 커닝을 시켜준 교수의 말대로 학장은 나의 전공을 물었다. 나는 지체장애와 지적장애를 공부했지만 특수교육의 일반 교직과목도 가르칠 수 있다고 답했다. 그 교수말대로 나의 대답에 만족했던 학장은 내가 좋은 교수가 될 거라며 "조교수"로 오면 적당할 것 같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인터뷰 끝에 온 협상의 시간이었다! 좋게 평가해 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나는 내가 "부교수"의 자격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력서를 뒤적이더니 박사과정을 마친 지 2년밖에 되지 않아 곤란하다며 적어도 3년은 돼야 부교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진짜 3년이 필요하냐고 되물어 확인을 하고 나서 나의 경력은 4년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놀라는 학장에게 다른 사람은 1년에 1년씩의 경험을 쌓아가지만 나는 대학교에서 풀타임 강사로 일하는 동시에 풀타임 포닥을 하는 중이니 1년에 2년에 해당하는 경험을 쌓았다고 말했다. 믿을 수 없었던 학장은 사실이냐고 물었다. 나는 거기 추천인들의 전화번호가 있으니 전화해 물어보면 된다고 했다. 


첫 인터뷰를 무사히 미네소타로 돌아가자 연구팀의 친구들과 팀장인 학장까지 궁금해했다. 인터뷰는 잘한 것 같지만 내가 부교수를 원했는데 아직 모른다고 하자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꿈 깨!"를 외쳤다. 어느 대학에서도 초짜 박사에게 부교수를 주지 않을 거란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아직 결과를 몰라 말할 것이 없다고 하고는 일을 했다. 한 열흘쯤 지난 후 캘리포니아에서 편지가 왔다. 덤덤하게 열어 읽어 내려가다가 나도 내 눈을 의심했다. 부교수로 결정을 했으니 계약을 하겠느냐는 편지였다. 그때 마침 "박사를 마친 후에 교수로 4-5년 정도의 경력이 없는 상태에서 부교수는 감히 불가능"이라며 안타까워했던 한국 유학생 후배가 우연히 편지를 열 때 우리 집을 방문 중이었다. 그 편지의 내용을 이야기하자 후배는 "역시 김효선 선생님이시네요"라는 의미심장한 반응을 했다. 아주 아주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후배도 같은 대학교에 교수 임용 지원서를 냈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배포 있는 협상으로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가는 6년의 기간을 뛰어넘는 기록을 미네소타 대학에 남기게 되었다. 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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