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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주 Dec 24. 2023

과거로의 여행

수줍은 소년과의 재회

나의 머릿속에 너무도 생생한 어렸을 때의 기억이 있다. 한 네 살 쯤이었을 때였다. 넓은 공터에서 엄마는 숨을 고르기 위해 업고 있었던 나를 내려놓고 담배를 한대 피어 물으셨다. 나는 그 담배가 엄마에게 마지막 흡입을 허락하던 때까지 공터에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놀고 있었다. 그 공터에는 많지는 않지만 늘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고 한쪽으로 가면 그 아래로 길건너에 극장이 신비로움으로 눈에 들어왔었다. 담배를 땅에 발로 비벼 불을 끄고서 엄마는 다시 나를 업고 반대쪽 돌계단을 내려왔다. 어느 골목길로 들어서면 매일 통원치료를 받았던 조그만 병원이 눈에 들어왔고 나의 기억은 거기에서 끝이 난다.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마치 가본 곳 같은 생생함이 있는데 어디쯤이었을까? 어른이 되어 인천토박이라고 하는 친구가 그 극장이 애관극장이라고 말해주었지만 아직도 되찾아 가보지는 못한 그리운 곳이다.


그 당시 나는 인천의 작은 집에서 엄마와 둘이 살았는데 한 달에 한 번씩 꼭 우리를 찾아오는 아줌마가 있었다. 툇마루에 앉아서 문을 들어서는 아줌마의 얼굴을 보면 나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함박웃음으로 퍼졌고 늘 즐거운 마음으로 환대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아줌마는 나에게 용돈도 주셨고 맛있는 먹을거리를 한 보따리씩 사가지고 왔기 때문에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좋았던 기억이 있다. 그 좋은 아줌마가 대문을 들어설 때 늘 아줌마의 치마 뒤에 숨어 눈만 빠꼼이 내고 나를 쳐다보는 수줍은 소년이 있었는데 나보다 두 살 위인 친구였다. 늘 나이가 많으셨던 엄마와 둘이만 살며 매일 병원을 가는 일이 하루의 일과였던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내 또래의 친구가 찾아와 노는 시간이 너무도 행복했었다. 같이 살던 엄마는 육순이 넘은 할머니였는데 동네에 나가면 네 살짜리 땅꼬마가 "엄마"라고 부르는 나를 보면 화들짝 놀라며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진짜 엄마냐고 묻고는 깔깔 대고 웃었었다. 이유를 모르던 난 그 웃음소리에 늘 숨어들 곳을 찾아다니다 보니 나 또한 내성적이라 수줍음이 많은 소년과는 말을 나누지 않아도 그냥 재미있게 놀곤 했었다. 


"오빠" 그거 기억해? 오빠가 "한 달에 한 번씩 우리 집에 왔었던 거?" 몸이 약했던 나는 1년쯤의 통원치료가 끝난 후에 서울로 올라와 살다가 유모 엄마가 돌아가시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 착한 아줌마는 나의 진짜 엄마였고 수줍어하던 소년은 두 살 위의 막내오빠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오빠가 네 명이나 있었고 그 위에는 예쁘지만 무시무시한 고등학생 언니가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어려워 늘 한쪽구석에 있던 나를 오빠는 매일 해가 뜨면 업고 나가서 해가 떨어져야 꼬제제한 몰골로 집으로 돌아오곤 해서 우리는 신작로 위에 "새로 나온 거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나는 오빠에게 업혀 매일 만화가게를 갔었고 오빠가 친구들과 구슬치기를 할 때 옆에서 구경을 했다. 오빠 덕분에 나는 학교에 다니기 전에 만화를 통해 한글을 떼었고 서먹서먹했던 새로운 가족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또 오빠를 통해 나는 청파동과 원효로 일대의 넓은 세상을 마주 할 수 있었다. 그런 오빠와 다시 헤어진 것은 초등학교 3-4학년 때쯤인 것 같다. 철이 들고 서로 다른 초등학교를 다니며 자연스럽게 오빠의 삶과 나의 삶은 벌어져 같은 집에 살면서도 가정교사와 시간을 지내는 오빠를 볼 시간이 없었다. 그 이후 각자 격동의 중고등학교와 대학시절을 마치고 사회 속으로 뛰어들어 각자 바삐 살았다. 이제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자 기억 속에서만 생생하던 오빠를 미국으로 초대를 해 재회를 한 것이다. 오빠도 기억했다. "내가 너 참 많이 업어줬었지..." 


어렸을 때의 오빠는 엄마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면 이번에는 평생의 배우자인 올케언니와 함께 찾아왔다. 옛날에 엄마가 나에게 "좋은 아줌마"였던 것처럼 올케언니는 우리 엄마를 모셨던 효부이고 아들 둘을 낳아 훌륭하게 키워낸 현모이며 소심할 정도로 수줍은 성격의 오빠를 옆에서 너무도 현명하게 내조를 해온 양처로 나에게 "좋은 아줌마"로 오빠와 함께 온 것이었다. 보름정도의 짧은 기간이 정신이 없이 지나갔다. 아직도 보여주고 싶고 나누고 싶은 것이 너무도 너무도 많은데 나도 오빠부부도 이미 무리하게 돌아다닐 수가 없는 나이가 된 것이다. 여행을 하며 우리 셋은 모두 아팠다.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기억 속의 행복했던 순간을 나누는 것을 막지 못했다. 셋이서 열심히 기침으로 합창도 하고 약 보따리를 꾸려가지고 다니며 최대한의 새로운 추억을 만들었다.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주에만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여호수아 나무와 돌산이 어우러진 국립공원에 가서 언니와 오빠가 처음 보는 진귀한 나무를 좋아해서 행복감으로 긴 운전의 피로를 씻어주었다. 세상에서 제일 큰 생명체를 보통 고래라고 생각하는데 그 고래보다 커서 세상에서 살아있는 생명체로 가장 크다는 기록을 가진 "셔먼장군"이라 불리는 세고이야 나무도 찾아가 봤다. 셔먼장군 이외에도 내로라하게 여러 명의 성인이 팔을 벌려도 나무둘레를 감싸기 어려운 큰 세코이야 나무들이 무성한 국립공원은 우리 집에서 서울 부산거리 정도가 떨어져 있는데 그 먼 곳을 하루에 갔다 왔어도 나는 마냥 행복한 어린아이로 되돌아 가 있었다. 하지만 밤이 오면 에고에고 노래를 하며 잠자리를 드는 노인들이 되어서야 만난 것이었다. 내가 외롭고 서울이 그리울 때 자주 찾던 캘리포니아의 태평양 바닷가. 그 바다의 서쪽 끝에 한국이 있다. 날씨 좋은 날에는 서울이 보인다고 스스로에게 농담을 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어 위로가 되었던 곳이었다. 


가장 눈에 띄게 변한 오빠의 모습 중에 하나는 쇼핑이었다. 어렸을 때의 수줍음이 나이가 들어 표현을 잘하지도 않고 표현을 해도 무뚝뚝하게 하는 오빠가 평생의 그늘막이 되어 준 언니 뒤를 따라다니며 몇 시간이나 쇼핑을 하는 것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가 초등학교 입학식에 입을 멋있는 옷과 필요한 물품을 사는데 손가락으로 몇 뼘이니까 맞겠다 안 맞겠다 하며 이것저것을 고르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또 막 태어난 손녀가 이 겨울을 지나고 봄이 되어 첨으로 세상 나드리를 나올 때 예쁜 모습으로 꾸며주기 위해 공주옷을 여러 벌 구입하러 간 쇼핑에서는 혼자 이리저리 기웃기웃하다가 할아버지 눈에 가장 예뻐 보이는 옷을 들고 와서는 "이것이 어때?" 하며 추천도 했다. 무뚝뚝해도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는 자상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게 해 준 언니의 손길이 느껴졌다. 사랑하는 오빠에게 언니가 소중하듯이 조카에게 소중한 며느리가 생각나서 나는 "며느리 것은?" 하며 손자 손녀도 좋지만 며느리를 챙기라고 귀띔을 했다.


내가 오빠에 대한 좋은 기억 중에는 떡볶이가 있다. 언니는 오빠가 저녁을 넉넉하게 먹고도 밤이 깊어지면 간식을 원한다며 컵라면을 한국에서부터 들고 왔다. 한번 집에서 저녁을 같이 해 먹던 날에 나는 저녁 간식으로 떡볶이를 만들자고 했다. 인스턴트 떡볶이를 언니가 만들었지만 나는 오빠와 식탁 앞에 앉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렸을 때도 오빠는 밤이 되면 뭔가 군것질을 하고 싶어 종종 나에게 떡볶이를 만들어 달라고 했었다. 지금처럼 양념이 다 들어있는 인스턴트 떡볶이가 없던 그 시절에 어린 내가 만들었으니 내가 먹어봐도 진짜 맛이 없어 미안할 정도였지만 한 번도 빠짐없이 오빠는 맛있게 바닥까지 핥곤 했다. 난 그게 참 고마웠었다. 같이 살던 기간이 짧았던 만큼 기억 속에 남은 이야기는 바로 바닥이 드러났지만 적은 양의 기억이라도 다행히 다 기쁘고 행복했던 조각들이라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짧은 방문이 순간에 지나가고 다시 또 보자는 간절함으로 인사를 나누고 오빠는 떠났다. 그래도 "좋은 아줌마" 언니와 함께 가는 뒷모습이 좋았다. 두 분이 떠난 후에도 강아지 산책 때문에 두 분이 머무시던 호텔 앞을 매일 아침에 지나가며 새로 만든 따뜻한 기억을 매일 되뇌고 있다.


위의 삽입된 "수줍은 소년"의 라인드로잉은 오픈 AI의 DALL-E로 생성한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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