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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주 Mar 03. 2024

기산지절(箕山之節)

자신의 신념에 충실.

한참 연구에 심취해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나는 워싱톤에 있는 미국 연방정부의 교육부로 한 달에 한두 번씩을 가서 일을 했었다. 현재는 미네소타대학에서 같은 연구팀의 일원이었던 사람이 교육부 특수교육부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내가 한참 워싱톤으로 일하러 다닐 때는 마이클 박사였는데 그는 심한 뇌병변 장애로 휠체어를 타지만 자가운전을 하면서 생활하는 독립적인 분인데 내가 휠체어를 타다 보니 눈에 띄었는지 나와 쉽게 친해졌었다. 마이클이 떠난 후에는 늘 우리와 함께 일을 했던 실무관이 뒤를 이어 디렉터가 되었다. 디렉터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과제에 함께 참여를 하다 보니 교육부의 많은 직원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어느 날 전화가 울렸다. 전환교육 연구팀장이 저편에서 인사를 건네고 나와 워싱톤의 한 대학 교수들과 함께 낸 연구계획서를 봤다며 워싱톤으로 이사를 올 계획이 있느냐 물었다. 이왕 워싱톤으로 이사를 올 거라면 연방정부 교육부에서 함께 일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러며 그들 팀전체가 내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하며 여러 가지 파격적인 조건을 제공했다. 집을 마련해 주고 과장급의 자리를 준다며 유혹을 했다. 그 당시 그들이 말하는 과장급이면 내가 받던 교수월급의 2배가 넘었다. 


아 고민! 거긴 한국날씨와 비슷해서 여름에 비도 오고 습도로 높고 겨울에 춥고 눈도 오는데 여기 캘리포니아의 천국 같은 날씨에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교수는 일주일에 15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내가 원하는 연구며 타기관과의 협력프로젝트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반면에 많은 월급을 주는 워싱톤에는 소위 말하는 "Nine to Five" 즉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직장에 풀타임으로 묶여있는 샐러리맨의 삶을 말하는 것이었다. 숨 쉴 수 없게 묶여있는 생활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있는 나는 혹시 지난번 디렉터였던 마이클박사가 가 있는 조지워싱톤 대학에 시간강사로 나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교육부 일 이외에 외부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없다니 아무리 돈을 많이 주고 위상이 높아진다고 해도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다. 그러고 나서는 과감하게 가르치는 일에 가장 큰 가치를 두는 소신을 지킬 수 있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만족해했다. 그리고도 한동안 워싱톤을 오가며 그들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20여 년이 흘렀다.


한국의 특수교육과 복지제도는 내가 한국에서 특수교사로 일할 때와는 달리 눈부신 발전을 했다. 내가 교사일 때는 장애학생들만 고립되어 수업을 받던 특수학교가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부터 일반학교 내에 한두 개씩의 특수반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거의 모든 일반학교에 적어도 한 학년에 한 반씩을 만들 정도로 일반학교에서의 공교육 기회가 분리된 특수학교에서의 교육기회를 넘어서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일반사회에 적응이 어려운 지적장애학생들을 위해서는 고등학교 이후에 취업준비와 독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전공과가 생겼으며 장애인의 평생교육차원의 대학 프로그램과 지역사회 프로그램들도 많이 생겼다. 대학 특례입학제도의 실시로 장애학생들이 일반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또한 장애인의 취업을 돕기 위해 사업기관의 의무고용이 법제화되기도 있다. 그리고 지역마다 복지관이 있어 방과 후 프로그램이라든지 재활프로그램, 직업훈련등 성인장애인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양적 팽창을 따라오지 못하는 질적인 향상의 문제점들로 현장에서 겪는 전문인들의 어려움과 부모님들 간의 갈등소식을 듣기도 한다. 


장애인 교육과 복지가 개선되어 가고 있는 만큼 장애인과 부모의 변화된 요구는 점점 장애 관련 기관에서 전문인들이 좀 더 다양하고 개별화된 프로그램으로 개선하기를 원하고 있다. 전에는 먹고사는 기본 생활비를 정착화하는 복지를 원했다면 이제는 밖으로 나와 일반인들이 사는 사회 속에서 학교를 짓고 싶어 하고 원하는 곳을 원하는 시간에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이동권을 요구하게 되었다. 예전처럼 방치에 가까운 수용시설보다는 가정과 비슷한 생활환경을 요구하게 되었다. 장애학생들도 일반학교 교실에서 교육을 받게 해 달라는 요구는 이제 비장애아동과의 협력활동에 참여하는 실질적인 의미의 통합교육을 요구하게 되었다. 친구나 교사나 전문인들로부터 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동등한 인간관계를 요구하게 되면서 또 다른 사회적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지난번 서울을 방문했을 때는 지하철에서 몸으로 투쟁하는 장애인 분들을 만나 감사표현과 함께 미래의 투쟁을 위해 보다 전문적인 교육으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함을 힘주어 강조하기도 했다. 사회에 대응해 장애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최전선에는 부모님들이 있다. 예전과는 달리 전문적 지식도 갖추고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방법도 가지고 있지만 아직도 듣지 않으려는 세상의 문을 두드리는 일에 조급함과 우격다짐을 하는 것도 보며 너무도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나라님들이나 관련된 사람들이 서로 조금만 더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어떨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본질적인 장애인 인권을 쟁취하기 위해 첨예하게 대립하고 점점 더 고조되고 있는 상황을 마주하면서 처음으로 나는 오래 전의 결정을 후회하게 되었다. 한국과 같이 수직적인 사회구조와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회에서는 "권력"의 서열이 중요하고 높은 위치의 사람이 주도할 때 서비스의 변화가 빨리 이루어진다. 교수로 이럽시다 저럽시다 하고 아무리 말을 해도 이론에 치우친 탁상공론으로 치부되는 상황이 만약 수년 전에 미국 연방정부의 특수교육 담당 공무원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한국정부와의 대화에서 미국정부의 특수교육 현실과 프로그램을 설명하고 장애인을 위한 행정에서 이런 것이 중요하다고 했으면 장애인의 교육과 복지가 더 큰 질적 변화에 기여했을지도 모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연방정부 교육부의 일을 거절한 것이 후회막심해졌고 어리석은 결정으로 장애아동의 부모님을 크게 도울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기까지 했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은 늘 툭툭 털고 일어서는 나였는데 되돌릴 수 없는 사실을 알면서도 후회되는 마음에서 쉽게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한국 특수교육 초창기부터 교육부에서 장애인 정책과 교육발전을 주도해 일하던 친구에게 후회된다는 말을 하니 "맞소, 미국 정부 일을 했으면 한국에 더 큰 영향을 미쳤을 거요."하고 동의를 했다. 거의 지난 1년 동안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상황으로 자괴감에 짓눌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 정치권에서의 사례들을 보면서 나의 후회는 오히려 강한 확신과 새로운 의지로 다져지게 되었다. 바로 권력을 탐하고자 정치에 뛰어들어 자신의 신념과 학문적 이론을 지키지 못하고 갈대처럼 움직이며 권력에 편승해 말을 뒤집는 학자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물론 사람들은 큰 뜻을 품고 나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란 각오로 시작을 해도 결국은 자신의 욕심이 그동안 자신이 닦아온 학문을 스스로 굽혀 세상에 아첨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나은 편이라는 말로 자신을 위로하며 진흙탕 싸움에 몸을 던지기보다는 처음부터 발을 담그지 않는 절제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옛말에 까마귀 떼 노는데 백로야 가지 말라는 말이 있다. 과학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백로하고 까마귀 하고 종도 다를 뿐만 아니라 옆에 서있다고 절대로 색이 옮을 리가 없다. 그래도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먹을 가까이하면 자신도 모르게 검은색 물이 든다는 말로 설명이 되겠다. 학자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정치에 뛰어든다 곧 물이 들고 의도치 않은 모습으로 변하면서도 합리화를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교육을 통해 변화하는 과정이 느리고 답답해도 정치에 뛰어들기보다는 그들에게 필요한 자료를 연구하고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 바로 나의 역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후회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학자로서의 길을 떠나지 않고 나의 신념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나는 늘 수업 중에 장애학생을 가르치는 특수교사가 되려는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있다. 특수교사에게는 장애아동을 가르치는 일이 주어진 본분의 50%이고 우리가 잘 가르친 장애학생들이 사회에 나갔을 때 시민들이 준비된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시민교육을 하는 일이 나머지 50%라고 강조해 왔다. 한국의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제5조의 2에도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이 명시되어 있다. 사업자 및 고용인 모두가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을 받아야 하고 사업자는 교육을 실시하고 그 문서를 보관해야 한다. 내 삶을 돌아보니 나는 지난 30여 년 동안 장애인과 그들의 부모님, 그리고 특수교사를 위한 교육에 집중을 했었다. 학생들에게 강조하던 나의 가르침에 비추어보면 나 스스로도 50%밖에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빨리 정년으로 지금의 일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30년은 시민교육에 초점을 두는 계획으로 에너지가 충전된 새로운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위의 그림은 마이크로 소프트 코파일럿에서 Dall.E3로 그린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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