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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주 Feb 18. 2024

앵그리 버드

세상을 바꾸고 싶은 당신에게

프롤로그

새로 부활된 개그콘서트 중에 봉숭아학당이라는 코너가 있다. 거기에 한 타투 전문가 캐릭터가 나오는데 그는 사람의 가슴 배 부위와 등뒤에 타투 그림을 그린다. 가슴에 그려지는 타투가 특별한 감정을 자극한다.


전화가 울린다는 것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의 사건임을 말한다. 우리나라 적십자 대표로 노르웨이로 가는 인터뷰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전화벨로 울렸다. 영어가 모국어인 박사들과 경쟁을 하고 싶어 미국 대학에 남은 나는 영어로 작성한 연구계획서로 상위 1-2%만이 받는다는 연방정부의 연구그랜트를 받게 되었다는 연락도 전화로 받았다. 그리고 나의 인생의 한 획을 그은 "다른 검사가 더 필요하다"라는 소식이 전화로 전해졌다. 무엇을 하려고 하면 세월아 네월아 목을 뽑고 기다리는 것이 미국생활인데 중요한 연락은 편지로 공문을 띄우기 전에 미리 전화로 알려주곤 한다. 유방암 검사를 한 지 24시간도 채 안되어 전화가 온 것이다. 별거 아닌 듯 의사는 좀 더 검사를 하자고 했는데 이 느림보 미국에서 다양한 검사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전화를 받은 지 1주일도 안되어 유방암 진단이 떨어졌다. 특별한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몸은 떨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표현을 들으면 건물이 무너지고 폐허가 된 잿더미 위에 있는 영화장면에서 본 것이 생각난다고 하지만 내가 직접 경험한 무너진 하늘은 뿌연 흐린 날씨로 세상이 멀리 보였다. 모든 사람들과 자동차,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 광경이 회색빛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윤회설(輪廻說)의 둥그런 수레바퀴 같은 세상을 경험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만치 떨어진 그 수레바퀴 위의 세상에서 열심히 하던 일에 열중하며 돌아가고 있는데 거기서 혼자 뚝 떨어져 나온 나의 모습은 아직 내 눈에 보이는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은 듯 나의 존재를 잊은 채 각자의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어? 윤회에서 떨어져 나온 거면 나는 부처?" 하는 농담에 웃음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직도 상태가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의사가 전한 여기치 못한 소식에 잠시 환상을 본 것 같은 느낌이 한 이틀정도 지속됐다. 갑자기 닥친 상황에 주관적으로는 놀라고 당황해야 하지만 나는 스스로 나를 객관적인 눈으로 보는 편이라 생전 처음 경험해 보는 감정들이 신기했다.


계속 놀람과 불안함 속에 있을 수 없었던 이유가 너무나 신속하게 진행됐던 검사결과를 놓고 많은 질문을 해대던 의사들 때문이었다. 의사에게서 받은 결정을 해야 할 많은 일들이 발등에 떨어졌기 때문에 머릿속에 분주함을 느꼈다. 진단을 했던 의사는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짧은 설명을 한 후에 나를 수술을 할 의사에게 보냈다. 들어가자마자 레지던트들이 조그만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이러저러한 연구가 있는데 거기 피험자로 참여해 달라는 말도 잊지 않고 깨알같이 알려주었다. 갑자기 상황이 심각하게 변한듯했다. 진료실로 들어가자 의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칠판에 칸을 치고 여러 가지 옵션을 적고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여러 가지라고 해야 암세포만 조금 떼어내는 방법과 한쪽 유방을 절제하는 방법과 양쪽을 다 절제하는 방법 등 세 가지 옵션을 각각 설명했다. 조금 전 진단을 했던 주치의의 말로는 뾰루지 난 것을 쪽 하고 짜는 정도라고 했는데 복도를 사이에 두고 걸어오는 동안 사건이 엄청 심각해졌음을 느꼈다. 생각할 것이 많을 테니 2주 안에 결정을 하고 다시 오라고 예약을 잡아주었다.


아무리 각각의 방법에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써놓고 결정을 하려고 해도 계속 뱅뱅 돌기만 할 뿐 결정의 진전이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아 연구물을 찾아보았다. 영국에서 300여 명의 유방암 환자를 추적한 연구에서 양쪽을 다 절개한 사람들의 만족도가 가장 높다는 것이었다. "이런, 하필이면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방법이 선호되는 것이람." 방법 1부터 3까지를 수도 없이 빙빙돌기만 할 뿐 결정을 못하는 동안 2주일이 훌쩍 지났고 예약이 되어있는 날 나는 병원 앞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제 약속시간까지 30여분. 심호흡을 하고 벽을 보고 서서 이제는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자신을 다그쳤다. 그 당시 골프 삼매경이던 나는 골프 치는데 여자에게 약점이 스윙시에 유방이 팔에 걸려 남자들만큼 못 칠 수밖에 없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에이 그래 만족도도 가장 높았고 양쪽을 절개하고 나면 덕분에 나는 골프를 더 잘 치게 될 것이고" 하며 그 긴 방황을 유머로 끝내고 자신감 있게 의사가 있는 진료실로 마칭을 해 들어갔다.


"양쪽 다!"하고 외치며 들어간 나에게 의사는 "절개를 하면 우울증에 걸릴 거라며?"하고 놀리듯 대꾸하면서도 나의 예기치 못한 결정에 깜짝 놀란듯했다. 나는 그 대신 부탁이 있다고 했다. 연구물을 뒤지다 보니 양쪽 절개를 한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진 흉터를 보게 되었는데 모두 다 가슴 가운데에서 겨드랑이 쪽으로 올라가며 앵그리 버드의 화난 눈썹모양이었다. 나는 의사에게 그 화난 앵그리버드의 눈썹과 같은 흉터가 거울에 비칠 때마다 내가 화가 날 것 같으니 나는 반대로 가슴 가운데 위쪽에서 시작해서 겨드랑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해피 앵그리버드 모양으로 절개를 해달라고 했다. 의사는 한참 고민을 하더니 설명을 했다. 해피 눈썹처럼 하려면 수술할 부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만큼 해피하게 할 수 없다며 최대한 앵그리 눈썹만은 피해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마치 앵그리 버드가 생각하는 것 같아 보이는 가슴을 가로지르는 일자로 된 흉터를 갖게 되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하!


이런 결정과 의사와의 상담내용을 친구에게 이야기하자 "세상에 그렇게 묻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라고 했다. 또 다른 의사친구도 뭔 X소리냐며 수술을 하고 나와서 의사가 이렇게 잘라놨으면 이런 것이고 저렇게 잘라놨으면 저런 거지 하며 미국 병원에서 오간 대화가 말도 안 된다며 헛웃음을 쳤다. 그런데 나에게는 지극히 정상이고 당연한 질문인 것이다. 내 몸을 맡기는 것이고 나는 그 상처를 평생 가지고 보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인데 의사는 당연히 나에게 최선일 수 있는 방법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묻고 싶다. 한국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나와 같은 질문을 해보셨어요?" 질문을 해야 한국에서도 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한 답을 직접 들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더 중요한 점은 꿈에도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을 질문을 자꾸 받아봐야 의사도 고민을 해보게 되고 변화를 시작하게 되지 않을까? 세상이 변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의 시작은 바로 당신의 "질문"에서부터이다.


에필로그

암 진단을 받자 나는 영영 골프를 치지 못할 것 같아서 열심히 은퇴골프를 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 후 나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전보다는 뭔가 더 확실히 잘 칠 수 있는 신체적 우위를 점하는 무기를 탑재했다는 자신감으로 전화를 돌려 은퇴골프팀들과 컴백골프를 쳤다.

"아! 이럴 수가..."

골프를 잘 치는 조건은 수백 가지에 달했고 유방유무의 조건은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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