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안에서 크는 품 밖의 아이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야고보서 3장 1절)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들고, 조심스러워요. 특히 요즘은 학생들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학생이 아무리 잘못해도 함부로 말하거나 체벌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래요. 인권 침해당했다고 느끼는 순간. 아이는 경찰에 신고하고 부모는 학교로 달려오는 일이 발생하고 있어요. 선생님들은 가능하면 체벌하지 않고 상처 주지 않으며 훈육하려고 노력하지만, 한두 자녀를 키우며 아이 중심으로 사는 가정에서 성장한 20~30명 아이들의 학습지도와 생활지도를 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내가 능력이 있어서 가르친다고 생각하면 더욱 힘들어요. 먼저 배움을 경험한 사람으로 한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일어서고 걷고 뛸 수 있도록 칭찬하고 격려하며 도움을 요청할 때 손잡아주고 길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이라는 생각이면 조금 편안하고요. 내비게이션은 길을 안내할 뿐 직접 그 길을 가지는 않아요. 혹 잘못된 길로 접어들면 재탐색하여 가려고 했던 길, 가기 원하는 길로 갈 수 있도록 다시 안내할 뿐 왜 그렇게 운전을 못 하느냐고 탓하지 않지요. 몇 번이고 재탐색하고 또 재탐색하여 목표지점을 향해 갈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에요.
내가 잘 가르치고 있음을 아이를 통해 증명하려고 하면 안돼요. 전달한 지식이 공중에서 흩어지지 않고 아이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관계 맺기가 먼저 되어야 해요. 관계 맺기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식만 전달하는 것은 공중을 울리는 소리에 지나지 않아요.
학습지 방문교사와 초등학교 방과 후 교사로 오랫동안 일하며 모범교사 표창을 받은 선생님을 ‘즐거운 집’ 보유교사 선생님으로 채용하여 아이들의 학습지도를 맡겼어요. 선생님은 열정적으로 학습지도를 하는데 아이는 멀뚱멀뚱 쳐다보고 따라 하지 않는 거예요. 선생님은 달래고 어르며 잘 가르쳐보려고 했지만, 아이의 성적은 오르지 않고 도리어 선생님과 공부하는 시간이면 짜증 내고 성질내기 일쑤였어요. 그래도 잘 가르쳐보려고 애쓰는 선생님을 노려보거나 막말을 쏟아내기도 하여 선생님은 자괴감에 빠지고 아이는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되었어요.
‘항상 기뻐하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상황 파악을 하고 아이를 따로 불러 선생님을 노려보거나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행동이라고 얘기하고 선생님께 용서를 구하도록 했어요. 정말 공부가 하기 싫으면 “선생님 저 정말 공부하기 싫어요”라고 말하고 선생님과 상의하여 학습 분량을 조절해도 된다고 일러주었어요. 선생님께는 아이가 3학년이라고 3학년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아이가 유치원 수준이면 유치원 수준에서 시작하되 즐겁게 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지요.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언 15장 4절)
선생님은 교육자이고 교육은 말을 통해 이루어져요. 아이는 선생님의 무심코 뱉은 말 한마디에 희망을 품기도 하고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해요. 저는 초등학교 다닐 때 바보처럼 생겼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어요.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첫 시험을 보고 나면 선생님은 저를 불러 ‘너는 바보처럼 생겼는데 공부는 잘하네’ 하셨어요. 그 말에 상처를 받아 외모 콤플렉스가 생겼고 ‘왜 나는 바보처럼 생겼을까’라는 생각이 오랫동안 저를 괴롭혔어요. 저처럼 소심하고 마음이 여린 아이는 아무 말 못 하고 혼자서 괴로워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어요.
작은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학교가 지옥이라고 학교 가기를 거부했어요. 체육을 담당하신 담임 선생님은 중간고사를 공지하면서 80점 미만은 점수에 따라 종아리를 때릴 것이라고 했고 아이는 왜 벌써 점수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고 겁을 주느냐고 따졌어요. 선생님은 자기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따지는 아이를 문제아로 낙인찍었어요. 선생님께 정중하게 말씀드리지 않은 아이도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ㅇㅇㅇ없이, 선생님 말에 말대답한다고 욕을 하고 문제아로 낙인찍은 선생님 또한 잘했다고 할 수 없어요.
선생님을 찾아뵙고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선생님이 조금만 참아주실 것을 부탁드렸어요. 선생님은 듣지 않았고 아이는 학교 가기를 거부했어요. 그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에게까지 전달되었으면 6학년 담임 선생님은 아이에게 전화해서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느냐.”라고 했고요. 아이는 초등학교 때 총학생회 회장에 출마할 만큼 활달하고 학교생활 잘했는데 6학년 담임 선생님에게까지 문제아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급기야 사람 만나기를 거부했어요. 집 안에만 있다 혹 나갈 때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갔어요. 한 아이가 학교 밖 아이가 되는 것은 순간이었어요.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7장 24절-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 저는 상담주간에 상담 신청을 하고 아이들의 담임 선생님을 만나요. 아이를 위탁해서 키우는 위탁 엄마이고 아이는 공동생활가정이라는 사회복지기관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린 후 아이에게 특별히 잘해주거나 선입관을 가지고 바라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예요. 그냥 한 아이로만 보고 일반 가정의 아이들과 같이 잘하면 칭찬하고 잘못하면 동일한 벌을 주시기를 당부드려요. 어떤 선생님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하세요.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가복음 10장 31절)
지금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평생 존경받으며 행복하게 잘 산다는 보장이 없어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처럼 못나고 부족해 보였던 아이가 성인이 되어 훨씬 행복하게 잘 사는 경우를 볼 수 있으니까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5장 40절)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는 선생님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 학교 성적이 좋고 내 말 잘 듣고 따르면 예뻐 보이고 더 잘해주고 싶어 져요. 그런 감정을 밀어내고 예수님이 병든 사람들을 치료해 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셨던 것처럼 작은 아이, 소외된 아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아이의 가슴에 희망의 씨앗 하나 심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