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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꿈 Oct 28. 2020

누구에게나 서툰 처음이 있어요

이슬이의 첫 심부름

초등학교 입학 후 며칠이 지나고, 1학년 전체 교실이 본관 1층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아마 지금이었다면 선생님이 아이들을 다 인솔하여 함께 새로운 교실로 갔을 테고, 그전에 충분히 알림장이나 가정통신문을 통해 부모님에게 공지를 했겠지요. 그런데 30년도 더 전이였던 그때는 강당 출입구에 덜렁 붙여진 안내문 한 장이 다였습니다. (제 기억에는요.) ‘교실이 바뀌었고, 거기를 찾아가야 해.’라는 생각과 두려움에 압도당했던 느낌이 기억으로 오래 남은 걸 보면, 8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맞닥트린 고난의 시간이었나 봅니다.      

 

다행히 입학 전에 글을 읽을 수 있었기에 안내문을 보고 교실을 찾아가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뒷문에 난 조그만 창문으로 할아버지 같은 담임선생님의 얼굴도 얼핏 보였고,  두런두런 아이들의 목소리도 들렸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나를 쳐다보게 되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를 발견하고 안으로 불러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얼마쯤 문 앞에서 서성이다, 결국 집으로 그냥 돌아와 버렸습니다.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 부끄러워서 교실 문을 못 열었다는 말은 차마 못 하고 ‘교실이 없어졌어’라고만 말하는 나를 엄마가 다시 학교로 데려주는 것으로 그날의 에피소드는 끝이 났습니다. ‘똘똘한 줄 알았더니만 아이고~’ 하는 엄마의 눈빛도 함께 받으며 말이죠.     


중학교, 고등학교에서의 처음들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달라지고 배우는 것들이 차이가 났지만, 큰 틀은 변하지 않았고, 나는 꽤 모범적으로 학교에 잘 적응했습니다. 대학교에서의 처음은 설레는 것들 투성이었습니다. 처음 가본 MT, 처음 마셔본 술, 처음 해본 아르바이트, 친구들끼리만 떠났던 첫 여행, 첫 미팅, 첫사랑, 첫 키스, 처음 해보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신나는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어려웠던 처음도 있었어요. 대학교, 직장생활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꽤 복잡하고 어려웠습니다. 나와 맞지 않다고 아예 안 보고 지낼 수 없었지만, 다투고 화해하고 싸우고 친해지는 과정을 서로 애쓰지 않았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당히 좋은 척하며 지내는 법을 알기까지 상처 받고 오해하고 멀어지는 많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처음은 엄마로서의 처음이었어요. 처음이어서 다 서툴렀고, 처음이어서 실수도 많았는데 엄마는 절대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내가 잘못해서 아이가 다치면? 내가 잘못 키워서 아이가 바르게 자라지 못하면? 내가 실수해서 아이에게 회복될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생기면? 엄마란 자리는 늘 두렵고 겁이 났어요.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와 싸우고 와 그 엄마에게 전화를 받았던 날은 인생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불행했습니다. 선생님이 아이가 수업에 집중을 잘 못한다고 했던 날은 걱정과 실망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이의 실수, 결점, 약점, 실패 그 모든 게 내 탓인 것처럼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이슬이의 첫 심부름 ] / 쓰쓰이 요리코 글 / 하야시 아키코 그림 /  한림출판사 / 1991.3.1

어느 날 엄마는 이슬이에게 우유를 사다 줄 수 있겠냐고 물어봅니다. 이슬이는 혼자서 집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어 깜짝 놀랐지만 우유를 사 오기로 합니다. 이제 다섯 살이니까요.      


이슬이는 빠르게 쌩~ 지나가는 자전거와 마주칩니다. 엄마와 함께였다면 그저 옆으로 조금 비켜서면 됐을 거예요. 엄마가 먼저 자전거를 발견하고 이슬이의 앞을 부드럽게 막아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혼자인 이슬이는 가슴이 철렁하여 벽에 바짝 붙어 얼음이 됩니다. 이번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어요. 다친 무릎이 꽤 아플 텐데 이슬이는 아픔보다 떨어진 동전을 찾는 게 더 급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슈퍼, 하지만 작은 목소리는 자동차 소리에 묻히고, 작은 몸은 사람들에게 가려져 자꾸만 밀려납니다. 점점 불안하고 초조하던 이슬이는 ‘우유 주세요!’ 하며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뱉습니다. 아주머니는 미안하다며 우유를 주고, 이슬이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참았던 눈물을 ‘똑’ 떨어뜨립니다.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처음을 경험할 기회가 점점 줄어듭니다. 기껏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음식을 처음 먹어보는 일 정도일까요?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일을 하고, 만나던 사람들을 만나며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을 즐깁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거나, 이전과 다른 방법을 시도하는 것은 때때로 무모함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많은 것들이 처음입니다. 많은 처음들을 설레기도 겁내기도 하며 겪어 나갑니다. 실수도 있었지만 이슬이는 용감하게 첫 심부름을 해냈습니다. 처음이 있어야, 그다음이 있지요. 우유를 듣고 환하게 웃고 있는 이슬이는 아마 다른 처음들도 주저하지 않고 시작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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