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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강 작가의 독일삶 Jan 12. 2022

쌍둥이 형제의 소통은 눈빛으로도 통할까?

친한 언니를 보내며

 세계적인 심리학자 웨인 다이어는, 자신의 옷장에 주머니를 전부 제거한 양복 한 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에겐 무언가 담고 갈 주머니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려고 의식적으로 준비해 둔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형제, 가족들도 어느 나이가 되면 각자의 삶을 향해 가고, 결국엔 죽음을 통해 이별을 경험한다. 그게 삶이다.  


베머 씨는 쌍둥이다. 일란성 쌍둥이로,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구분 못할 정도로 얼굴이 비슷하다. 현재 쌍둥이 동생은 병상에 누워 있다. 동생은 삼십의 나이에 뇌졸증이 엄습했다. 피부처럼 가까웠던 그들에게 이별은 데인 화상처럼 쓰라렸다. 그들은 쌍둥이들이 으레 그렇듯, 초등학교와 김나지움, 대학도 같은 곳을 다녔다. 그들에게 이별은 생각지도 않은 현실로 다가왔다.


어느 날 동생이 갑자기 사지 불구상태가 되어 누워 있다. 언어기능도 상실해 의사 소통도 할 수 없다. 집에서 돌볼 형편이 안되어 요양시설로 왔다.

형은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하루가 멀다 하고 방문했다. 처음엔 아랑 곳 하지 않고 며칠 간격으로 방문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쉽지 않았다. 그저 동생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은 마음으로만 간직했다.


내가 근무하던 날, 형이 동생을 보러 왔다. 말을 하지 못하고 누워 있는 동생을 보며 형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과 똑 닮은 동생을 보면서 자신도 함께 누워있다고 상상했을까?

병색으로 초췌해지고 살도 빠진 동생을 보는 형의 커다란 눈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속울음을 겉으로 꺼내지 못한 것이다. 인생에서 같은 날 몇 분 차이로 태어났으나, 지금 그들은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한 명은 희망 없는 미래를 품고 겨우 살아내지만, 다른 한 명은 여전히 생의 남아 있는 시간을 부지런히 살고 있다.

동생은 형을 알아보는 듯, 얼굴빛이 환해졌다.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동생의 손을 잡아주었다. 난 쌍둥이 형제의 가슴 아픈 해후를 등 너머로 지켜보며 문을 닫고 나왔다. 비록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억겁의 세월을 통과한 끈끈한 소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함께 했던 시간들 속에서 이미 그들은 눈빛 만으로도 서로를 알아채는지 모른다.


 인간은 상대적으로 서로간의 교감이나 의사 소통이 없으면 어느 한쪽이 지치기 마련이다. 소통의 종류에는 언어 표현 외에 몸짓이나 눈빛으로 하는 소통이 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간헐적이 아닌 지속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한쪽 사람에게만 에너지가 쏠려 소진이 되고 만다. 그래서 서로간 곧바로 대응하며 주고 받는 언어적 교감이 중요하다.

독일에서 친하게 지내던 아는 언니가 몇 년 전 하늘나라로 떠났다. 한국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더 공부를 하기 위해 독일로 왔지만, 얻은 건 화려한 박사학위 뿐만 아니라 초라한 질병이었다.

유방암을 앓고 항암치료를 거쳤다. 유방암이 완치되는 것 같았고 우리는 행복감으로 연말이면 가족끼리 여행을 갔다. 하지만 그로부터 5년 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러졌다. 가족력이라고 할 수 있는 뇌졸중이었다. 언니의 어머니와 위의 언니도 그 병으로 세상을 떴다며, 평소에도 걱정하곤 했었다. 언니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곧바로 뇌수술이 이어졌고, 3주 만에 깨어났다. 기뻐한 것도 잠시, 의사는 청천벽력의 소리를 내뱉었다. 의사 말의 대략은,  언니가 5살 지능의 아이로 되었다는 거였다. 어느 우주 한 가운데서 누군가 언니의 뇌를 바꿔치기 한 건 아닐까? 유망한 독문학 박사로 지적이며 명쾌하고 인성 좋았던 언니 대신 그저 해사하게 웃는 아이를. 마냥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다. 언니의 입술은 오직 'ja'만 연발했다. 언니는 그저 웃었고, 난 웃을 수 없었다. 언니의 언어는 딱 거기까지였다. 난 언니를 자주 방문하고 한국말을 들려주고 언어지능을 깨우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 또한 지쳐갔다. 1년 후 언니는 고통 속에서 지난한 삶을 마감했다. 비가 하염없이 내리던 봄이었다.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우산을 쓰고 마지막 으로 언니를 환송했다. 장례식에서 관 속에 누워 있는 언니를 보며, 얼마나 자신의 내면 안에서 고통스러웠을까 짐작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언니와 마지막까지 소통을 멈추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때마다 인내와 수고의 대가가 필요했다.


소통은 참 쉽지 않은 기술이다. 기술이라 표현한 것은 배워서 익혀야 할 분야라는 얘기다. 소통과 연관된 경청도 마찬가지다.

독일 서점에는 ‘적극적 경청’에 대한 책들이 많이 보인다. 어릴 때부터 토론하고 회의하는 것이 일상인 그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여과 없이 펼치라,는 교육을 받는 그들에게 경청은 참 어려운 미덕임이 틀림없다.

적극적 경청은 다른 사람의 가치 내면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 사물을 보는 것이다. 즉 상대방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입각해 세상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적극적 경청의 본질은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기 보다 어떤 사람을 감정적으로 뿐만 아니라 지적으로도 공감하고 깊게 이해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귀로 들을 뿐만 아니라 눈과 가슴으로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이 갖는 느낌과 의미를 이해하고 경청하는 것이다. 오른쪽 뇌만 반응하는 것이 아닌 왼쪽 뇌까지도 사용해 감지하고 직관하는 것을 말한다.


독일에서 경청교육의 가장 중요한 일례는 성경 안에서 살펴보곤 한다. 가장 경청을 잘한 에피소드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대화를 듣는 예수의 모습이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 들어가보자.

잔인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는 죽기 전까지만 해도 따르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신봉자 예수는 사라졌다. 물론 나중에 부활했지만.

그중 열두 명의 제자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자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라는 소문 때문에 왕국을 다시 재건할 것 같은 능력자 예수가 또다른 유대인들의 저지를 뚫지 못하고 무참히 참수 당했다. 실의에 빠진 두 제자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내려가던 길이었다. 제자들 사이를 슬그머니 누군가 다가온다. 그리고 묵묵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가만히 듣고는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다. 다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듣는다. 섣부르게 자신이 예수라고 드러내지 않는다.

예수는 그 대목에서 억울하게 자신이 죽었다고 제자들의 팔목을 붙잡고 이해를 구하며 통곡하지 않았다. 예수는 그저 제자들 스스로 충분히 자신을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인내하고 들어준 것이다.


난 일상에서 싸우거나 논조에 휘말릴 때 상대방의 눈을 잠잠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보면 이야기에 지친 상대방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나 또한 그 흥분에서 조금 떨어져서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쉽지 않은 훈련의 시간이 필요했다.

모든 만물은 흘러간다. 잘 흘러가는 것이 강하다. 물을 보라. 흐르는 물은 바위도 부순다. 물을 강하게 잡고자 하면 손 사이로 우수수 빠져나간다. 흐름에 따르고 일어난 일은 일어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마음이 편해진다.


쌍둥이 형이 어느새 방 밖으로 나왔다. 울었는지 눈이 바알갛다. 그들은 지금까지 슬퍼해왔고, 또 언제까지 슬퍼할지 모른다. 형질의 세계가 끝날 때까지 슬퍼할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아주 오랜 우주의 시간부터 그들은 오랜 끈으로 연결되어 왔으리라. 그러기에 서로가 말로 소통하지 않아도 쉬이 지치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그들의 소통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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