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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강 작가의 독일삶 Jan 07. 2022

자유 죽음

죽음이 자기 주도권이라는 허황된 진실

 한 달 만에 간 양로원 복도엔 몇 명의 낯익은 사진과 작은 공책, 촛불이 놓여 있다. 한 인간이 남긴 삶의 끝은 쓸쓸하다. 죽은 이의 프로필과 양로원 측에서 작성한 짧은 추모글 뿐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겐 죽음은 너무 흔해서 무디어진 마음도 그저 일의 일환이라고 합리화하게 된다. 바로 어제만 해도 그의 앙상한 몸을 일으켜세워주던 사람들에겐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인연의 끈은 가볍다, 오늘을 살다보면 누구나 종착역에 다다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살아있는 자들은 순간적으로 종착역이 없는 것처럼 일한다.


전 세계적으로 노인의 인구는 증가했다. 20세기 초만 해도 65세 이상의 생존율이 불과 13%였지만, 오늘날 무려 67%로 늘어났다. 한층 좋아진 위생, 페니실린 발명, 적절한 영양 섭취, 사회복지, 의료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수명을 확장시켰다.

독일도 예외는 아니다. 비록 2차 대전에 패한 국가였지만 빠르게 성장한 서독은 흡수통일을 통해 거대한 강국으로 이뤄냈다. 역동의 시대를 이겨낸 이들이 지금의 독일 노년층이다. 성장의 발판에서 동력을 얻은 그들의 노년은 골드세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세월은 흐르고 질병이 있어 간병이 필요한 노인들은 많은 비용을 지불하며, 대부분 요양시설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한다.

현대인들의 아이러니는 더욱 오래 사는 것을 바란다는 것과 더 길어진 죽어감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웰다잉을 공부하고 생명의 자기 주장권을 고민한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삶의 마지막에 놓여 있는 노인이나 환자를 위해 환자의 죽을 권리를 인정하고 의사 조력 죽음을 제도화하는 것도 그 노력의 일환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장 아메리 작가(1912-1978)의 ‘자유 죽음’을 소환해보자. 자살이라는 용어보다 ‘자유 죽음’이 풍기는 어조가 존엄성을 보장하는 것 같아 편안해진다. 책의 내용은 시선에 따라 신성모독처럼 보이는 구절도 보인다. 그럼에도 통찰의 여지도 극명하다.

그는 ‘소크라테스는 자살을 신들의 허락 없이 신의 소유물에 해를 입히는 행위이므로 용납될 수 없다고 했지만, 이런 시각은 신의 계율을 어기는 것이라며 죄악시한 기독교의 가치관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의 죽음도 ’잠재적 자살‘로 보아야 한다.’ 며, 사람은 자유롭게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종교적 가치관에서 죄의 결과물인 ‘자살’이란 용어보다는 ‘자유 죽음’을 택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아무리 자발적 죽음이라 할지라도 죽음은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어려운 영역인 건 사실이다. 아무리 회생 불가능한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결단하기 어려운 신중한 사안이다.


지난 2018년 독일 올덴부르크 지방법원 형사법정. 세기의 다중살인자 닐스 회겔(Niels Högel)의 혐의와 관련한 재판이 열렸다. 회겔은 이미 최소 6건의 살인, 수차례의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돼 2015년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상태였다. 이후 희생자가 더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일어 기소를 위해 130구가 넘는 시신이 발굴되고 부검을 받았다. 검찰은 회겔이 2000~2005년 근무한 병원 두 곳에서 환자 100명 이상을 살해한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85명에 대한 살해 혐의만 인정되었다.

 회겔은 중환자 병동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위독한 상태의 환자를 골라 범행을 저질렀다. 환자에게 의사의 처방 없이 리도카인, 염화칼슘 등 복용시 인체에 치명적인 부작용을 미치는 약물을 몰래 투여했고, 환자의 심박이 약해지면 자신이 심폐소생술에 나섰다. 환자를 되살려 주위로부터 칭송을 받고 싶었다고 그는 진술했다. 그의 살인 동기는, 병동생활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고 환자를 죽음 직전에서 다시 살려내어 영웅적인 대우를 받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의 심리 기저 속에는 중환자 스스로도 죽고 싶어할 것이고 누군가 죽음을 도와주길 원할 것이라는 망상이 존재했다. 생명을 살려야 하는 의료진이 후안무치한 동기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등골 오싹한 사건이었다.

인간은 극한 상황에서 살 의지가 더 있는 법이다. 중환자실에서 ‘내일의 태양’을 보리라 소박한 꿈을 가진, 가냘픈 촛불 같은 숨을 내쉬는 환자들에게 어이없는 마지막이었다.

독일 언론 등에서 조심스럽게 ‘타인에게 부여한 뮌하우젠증후군’(DSM-5에 의한 인위성 장애)을 언급했지만 심리 전문가들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음으로써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신의 영역을 자처한 회겔의 행동을 단순히 심리장애로 진단해 일말의 동정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은 위험하게 보인다. 물론 수사 과정에서 범행동기의 의도성 혹은 우발성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동기적인 측면에서 뮌하우젠 증후군의 소지가 있지만 그의 살인의 무게가 너무 커 심신 미약자로 보호하기엔 부담스러운 큰 사회적 사건이었다. 설사 환자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싶다 할지라도 타인에 의해서는 주도권을 허락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양로원에 누워 있는 노이만(Neumann) 여사는 입버릇처럼 죽고 싶다고 말한다. 온 몸은 운동량이 부족해 점차 경직이 되어 있고, 언어만 살아 있다. 나중에는 언어능력 조차도 소실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녀는 스스로 의사표현을 하지 못할 상황이 오기 전에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다. 하지만 노이만 여사는 비교적 건강이 양호한 상태다. 그러기에 젊은 간호사들에겐 관심병 같은 한 노인의 투정으로만 비쳐질 뿐이다. 노인들이 죽고 싶다는 말은 거짓말이라지 않은가, 라고 애둘러 말하기도 했다. 전직 의사였던 노이만 여사는 자신 스스로 쓸쓸하고 병약한 노년의 삶을 힘들어 했다. 죽고자 해도 죽을 권리도 없다. 불필요한 생명 연장을 막기 위해 환자가 사전에 작성한 ‘연명치료 중단’의 해당사항에도 현재 상태는 충족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나중에 안과 질환이 생겼는데, 치료를 제 때 안한다고 성화며 강한 삶의 의지를 보였다. 결국 그녀는 삶의 욕구가 너무 강해서 현재의 삶을 인정하지 못한 거였다. 게다가 의료진들의 관심을 유도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10여 년 전 내가 사는 도시로 유학온 한인학생이 자살을 했다. 민박집에서 동맥을 끊었던 그는 다행히 민박집 주인에게 발견되어 급히 병원으로 후송했다. 하지만 그는 자살에 실패한 자신을 비관하며 또다시 병원 창문에서 뛰어내려 결국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나는 당시 민박집 주인과 아는 관계로 한인회관에 설치된 빈소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한국에서 온 어머니의 처연한 눈물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저마다 죽음의 이유가 있겠지만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살아 남은 자의 회한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생명을 끊은 동기에 대해 여러 설들이 오갔다.


우리의 마지막은 어떠해야 할까? 누군가는 그토록 삶을 갈망하고 누군가는 그토록 죽음을 갈망하는가. 20대의 젊은 청년이 왜 목숨을 놓아야 했는지 탐구하기 전, 생각 없이 살아 남은 내가 미안하다 말하고 싶었다. 자유 죽음이라는 단어도 살아 남은 자들에겐 그또한 서글픈 트라우마일 뿐이다. 아무리 자유 죽음이란 단어로 자살을 아름답게 포장한다 해도 삶의 마지막 터널을 지나는 것은 깊은 어둠일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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