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 승진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
나는 교사다. 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선생보다 훌륭한 제자들로 키워내는 교사, 학생과 성장을 겨루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누가 더 얼마나 진지하게 자기 삶을 키워내는가를 겨루는 사제지간.
누가 더 부모에게 효도하고, 누가 더 많은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었으며, 누가 더 열심히 공부하고, 누가 더 역경에 스스로 부딪쳐 싸워 이겼는지를 겨루는 사제지간을 꿈꿨다.
연륜이라는 것, 경험이라는 것, 경력이라는 것이 전문성을 나타내는 줄 알았다.
그것이 교단에 선 후배들에게 선배들이 보여줄 모습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힘들고 어려운 학년 혹은 학생을 먼저 피했다. 그 힘들고 어려운 학년 혹은 학생을 후배 교사가 맡아야 했다. 그것이 선배에 대한 예우였고, 후배의 도리였다. 그렇게 후배 된 도리로서,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채 아이들을 열정만으로 가르치다 소진된 채 양지만을 쫓아다니게 된 선배 교사들을 보면서 나는 실망했다. 그들의 삶이 내 교사로서의 미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많은 선배들이 교감 교장, 혹은 장학사가 되는 길을 이야기했다.
나이 먹고 체력도 안되고, 아이들에게 치이느니 장학사 시험을 보거나 교감 교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 먹은 교사들은 학생도 학부모도 하물며 교사들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치인다. 나는 이 말이 가슴에 걸렸다. 교장 교감이 되신 분들은 아이들을 피해서 그 자리로 가셨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십 수년간 교사로서 무엇을 고민하고 배우며 성장한 것일까?
그래서 나는 두 가지가 궁금해졌다.
첫째, 장학사나 교감, 교장의 삶이 교사로서의 삶보다 더 행복할까?
둘째, 왜 나이 든 선생님을 학생도 학부모도 동료 교사들조차도 싫어할까?
젊고 성실하다는 이유로 선배의 부탁을 받아 지역교육청 업무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지역교육청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교육청 장학사의 삶이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온갖 민원 전화와 상급기관의 앉아쏴 업무 폭탄, 권위적인 상급자들과 행정직들, 저녁도 없고, 주말도 없고, 방학도 없는 워커홀릭의 삶. 그야말로 매일매일이 번 아웃의 연속이었다. 내가 본 장학사의 삶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교감, 교장의 삶은 어떤 행복이 있을까? 교감은 교장과 교육청의 평가를 받는다. 개인의 승진에 이 두 주체가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한다. 그래서 늘 상급자 혹은 상급기관의 눈치를 봐야 한다. 학생을 가르치지 않는 교감이 가진 교육관이 펼쳐질 영역은 교사들에 대한 수업장학에 한한다. 수업장학은 교사로서 전문성을 갖추고, 교사와 학생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된 후에 이뤄져야 하지만 그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이들에게 수업장학을 할 역량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그저 교사와 교장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주어진 업무에만 충실히 살아야 한다. 그들에게 자신이 가진 교육철학을 나눌 시간도 공간도 역할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일에 순응해야만 한다. 자율성은 커녕 유능감마저 경험할 기회는 박탈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감으로서의 삶도 행복하지 못하다.
교장으로서의 삶은 행복할까? 빠르게 교장으로 임용이 될 경우 평균 8년 정도 교장으로서 근무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약 55세 정도에 교장으로 임용이 된다면 교사로서의 경력도 평균 25년 이상 된 것이다. 25년간 교사로서 인간의 발달과 성장에 대해 과연 얼마나 고민하고 배우며 성장하였을까? 나는 교사로서 교장 선생님들이 학생 개개인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동료로서의 교사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도와주는 교장, 학부모들의 자녀 양육에 대한 어려움을 이해하고 이를 학교교육을 통해 도와주려는 교장의 삶을 만나 본적이 매우 드물다. 왜 그럴까? 이는 교원 승진 가산점 제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승진가산점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공통 가산점과 선택 가산점. 공통 가산점은 시도 간 구별 없이 동일하게 부여되는 가산점이고, 선택 가산점은 도서 벽지 지역이 많고 적은 것과 같은 지역적 차이에 따라 시도 교육감의 재량에 의해 부여되는 가산점을 의미한다.
승진 가산점의 항목들을 살펴보면 교육부 장관 지정연구, 시범, 실험 학교(이하 '연구학교'로 통칭) 근무경력 1점, 재외국민교육기관 파견 근무 경력 0.5점, 학점화로 인정된 직무연수 1점, 학교폭력유공 1점이다. 이와 같은 공통 가산점 외에 선택 가산점은 1급 정교사의 보직교사 근무경력, 교육전문직(장학사 및 교육연구사) 경력, 도서벽지-농어촌 공단- 접경지역 근무 경력(이하 지역가산점으로 통칭), 교육감(교육장) 지정 연구학교-선도학교-중심학교-교과 특기자 육성교(이하 교육부 및 시도교육청 사업으로 통칭) 등 유공교원 경력, 수업실기대회 우수교사 경력, 저학년 방과 후 교실, 교과특성화 교실, 초등 자율체육활동 체험교실 지도 경력 등으로 정해진다.
가산점 항목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과연 이러한 승진 가산점 제도가 교사의 수업지도 혹은 학생 생활지도 역량을 키우는 구조로 되어있는지 아닌지를 평가할 수 있다.
먼저 공통 가산점 제도를 보자. 연구학교, 재외국민교육기관 파견, 직무연수, 학교폭력 유공이 있다. 교육부 지정 혹은 도지정 연구학교의 연구주제는 이미 교사의 필요와 선택에 의해 정해지지 않았다.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는 입장인 것이다. 이는 단위학교 구성원이 필요로 하는 교육 요인의 반영을 제한한다. 따라서 연구학교로 선정되는 순간, 연구학교 구성원의 연구는 교육에 대한 동기가 아닌 승진에 대한 동기로 출발한다. 교사 개인의 성장은 논외의 문제로 넘어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연구성과는 장학관과 장학사 그리고 연구학교 구성원 안에서 회자되다가 사라진다. 다시 말해 교사로서 유능감을 경험할 기회를 연구학교라는 제도는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항목은 어떠한가? 재외국민교육기관에 파견되는 교사는 일부에 해당하니 논외로 친다면, 직무연수는 어떠한가? 교사들은 수많은 직무연수를 듣는다.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남이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에 참여(?) 혹은 참석(!)한다. 이러한 직무연수는 과연 교사 개인의 역량과 전문성을 신장시키는가?
교사들은 교원평가로 인해서 해마다 평균 60시간 이상 학점화 된 직무연수를 듣는다. 배움은 상호작용에 의해 일어난다. 요즘 유행하는 학생중심의 온갖 수업 형태들이 사람들의 인기를 끄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학생 개개인의 과제 수행 시간이 얼마나 지속되는가, 얼마나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의 상호작용이 학습과제를 중심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는가가 핵심이다. 그렇다면 교원의 학점화된 교원연수는 이러한 과제 수행 시간이 충분히 확보되고, 과제를 중심으로 하는 상호작용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과정으로 구성되었는가? 대부분의 연수는 강의식이다. 특히 '혁신'이라는 낱말이 학교 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더더욱 그랬다.
교원 승진 가산점은 상급 기관의 명령을 잘 수행하면 얻을 수 있는 점수다. 연구학교, 재외국민교육기관 파견, 학점화된 직무연수, 학교폭력유공, 보직교사, 지역가산점, 그리고 교육부 및 시도교육청 사업에 적극 참여하면 얻을 수 있다. 특히 연구학교, 보직교사, 교육부 및 시도교육청 사업의 성과는 늘 문서작성이 핵심이다.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원하는 문서를 작성하느냐가 교사로서 능력의 가늠자 역할을 한다.
영화 곡성으로 사람들에게 유행어가 된 말이 있다.
"무엇이 중헌디?"
그렇다. 만약 지금의 내가 교장이 되려고 한다면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할까? 아니... 위에서 이야기한 승진 가산점을 얻기 위해 내 교직 인생을 바쳐야 한다면 나는 과연 교사로서 전문성을 갖고, 2~30년 이상의 교직 경험을 통해 다져진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학교 구성원 모두의 행복을 위해 살아갈 수 있을까?
짧지만 길었던 교직 생활을 돌아보건대 교감이나 교장 선생님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드러내기 위해 늘 지도안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수업지도안의 문구에 집착하거나, 혹은 그 수업장면 하나만을 가지고 교사와 학생을 평가하는 우를 범했다. 학급의 아이들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수업장면에서 왜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한 교육학적, 심리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피드백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왜 그랬을까? 교육부나 교육청이 교사들에게 요구한 건 학생 한 명 한 명에 대한 관심보다 공문처리, 업무처리였기 때문이다. 이를 잘 수행하는 사람이 승진하는 구조였기에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뿐인가? 학교에서 생기는 온갖 학부모들의 민원의 책임은 회피하기에만 급급했다. 오히려 교사 개인으로 책임으로 돌리기가 십상이었다. 이는 교감 교장들이 학부모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직접 부딪치고, 만나서 대화해 본 경험이 적기 때문이다. 모든 민원의 핵심은 아이의 행복에 있고, 학교 교육이 아이들 행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충분한 노력을 기울여 설명할 수 있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이들의 모습에 대해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얕기 때문이고, 이는 교사로서의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사의 전문성은 문서나 업무처리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교사로서의 자존감은 낮을 수밖에 없다. 교감 교장으로 승진하는데 사회가 요구한 역량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교장으로서의 삶에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해마다 아이들에게 교사로서 나의 꿈을 이야기한다.
"너희들처럼 어린아이들이 어디를 가건, 언제 나가건 안심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나의 꿈이다."라고.
그렇다. 이것이 나의 꿈이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 나는 내가 가르친 아이들을 나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내야 한다. 나보다 건강하고, 나보다 지혜롭고, 나보다 효도하며, 나보다 벗과 깊은 우정을 나누는. 누구에게나 신뢰받고 어디서든 인정받는 훌륭한 개개인으로 성장시키는 일이 내가 교사로서 해야 할 일이다. 이 일을 잘 하기 위해 독서도, 공부모임도, 대학원도 다니는 것이다.
승진. 그것이 만약 이와 같은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일까? 승진을 꿈꾸며 나의 성장을 포기하기보다는 나의 꿈을 위해 매일 1mm씩이라도 성장하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결국 승진 그 자체를 꿈꾸기보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나의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승진을 꿈꾸지 않는다.
덧글.
물론 훌륭한 교감 교장 선생님도 많이 계십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교육자로서의 전문성을 가진 선배들이 부족합니다. 그 까닭이 교사 개개인의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치부하기에는 사회구조적 문제도 크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교사가 교사로서의 삶을 성장시키며 행복을 느끼고 그 속에서 전문성을 키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저는 모든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성장하고 행복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