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신뢰받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교사의 탄력성 관련)
모두에게 신뢰받는 교사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
신뢰받는 정부, 신뢰받는 병원, 신뢰받는 기업, 신뢰받는 학교... 모두들 불가능에 도전하고 있다.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신뢰받을 수 있을까?
이는 마치 커다란 거울 앞에 서서 먼지 하나 없는 거울을 만들겠다고, 닦고 또 닦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그렇게 끝없이 거울을 닦으면 과연 먼지 하나 없는 거울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교사로서 나도 모든 아이들에게, 모든 학부모들에게 신뢰받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교사로서의 선의를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학생 혹은 학부모가 꼭 있었다. 그래서 상처받았고, 그들을 원망하기도 했으며 그 원망은 고스란히 다른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교사로서 내가 해야 할 일에 소홀해지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기대하고,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실망하기 때문이다. 마치 오래도록 노고한 끝에 준비한 선물이 눈 앞에서 버려지고 밟히는 기분이랄까?
피그말리온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해 보았다.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 이것은 긍정적인 기대나 관심이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다른 말로 로젠탈 효과라고 부르기도 한다.
피그말리온은 조각가였다. 그는 자신이 조각한 갈라테아(Galatea)라는 여인상을 조각하고, 세상 그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웠던 조각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이에 감동한 아프로디테가 갈라테아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다.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아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갈라테아를 한 여인으로 여기고 사랑했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힌트가 있다. 즉, 신뢰받는 교사가 아니라 신뢰하는 교사가 되는 것이다.
한 학급에 이, 삼십 명의 아이들이 있다. 모든 교사가 수십 명에 달하는 아이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마음에 드는 아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다. 즉, 교사가 모든 아이들을 처음부터 신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누군가로부터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그 행위의 주체가 내가 아닌 타인이다. 즉, 내가 결정하고 통제할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다. 이는 나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은 그 행위의 주체가 바로 나다. 내가 결정하고 통제할 범위에 있는 일이다.
학급에 있는 모든 아이들에게 신뢰받는 교사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을 신뢰하기 위해 애쓰는 교사가 되는 건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반드시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왜냐하면, 진심이 담긴 격려에 사람은 반드시 움직이기 때문이다.
신뢰받는 교사. 그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기보다 차라리 내 마음속에 아이를 불신하는 마음이 없는지 살펴보는 일이 더 쉽다. 그리고 그 불신을 넘어서기 위해 애쓰는 일은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신뢰받는 교사이기보다는 신뢰하는 교사이고 싶다.
모든 아이를 신뢰하는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