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적 포상이 위험한 까닭. (Buckner's의 인지적 자기조절 관련)
"이거 하면 뭐 해주실 거예요?"
해마다 몇몇 아이들에게 빠짐없이 듣는 말 중 하나다.
Give & Take.
공부나 청소를 '교사를 위해'하니까
교사는 눈에 보이는 보상을 학생에게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는 의식이나 사고방식.
밥을 잘 먹지 않는 아이가 있다. 이때 부모는 이런 약속을 하기 쉽다. 아니... 내가 그런 적이 있다.
'밥 다 먹으면 네가 보고 싶어 하는 혹은 먹고 싶어 하는 것을 줄게.'
그리고 밥을 다 먹으면 약속한 보상을 준다.
학령기가 되고 학교에 가면 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가 된다. 이때 부모는 이런 약속을 하기 쉽다. 나는 아직 이렇게 하지 않았다.
'공부 다 하면 네가 보고 싶어 하는 혹은 먹고 싶어 하는 것을 줄게.'
그리고 공부를 다 하면 약속한 보상을 준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밥을 잘 먹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지 않는다. 아이가 밥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부모를 위해서이고, 당연히 부모는 그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자녀에게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여긴다.
리처드 니스벳과 마크 레버, 데이비드 그린이 어린이 집 아이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을 그려보게 했고,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걸리는 시간을 기록했다. 그리고 2주 후 다시 그림을 그리도록 했는데 이때 조건에 따라 3가지 그룹으로 나누었다.
첫째 그룹에는 그림을 그리면 '상'을 받을 수 있다며 묻고, 상을 주기로 약속한 집단원 모두에게 '상'을 주었다.
둘째 그룹에는 약속을 하지 않았지만 상을 주었다.
셋째 그룹에는 약속도 하지 않고, 상을 주지도 않았다.
다시 2주 후.
상을 약속받고, 그림을 그린 후 상을 받은 그룹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절반'도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림을 그리는 활동에 더 이상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Investment Company Institute, "401(K) Plans: A 25-year Retrospective."
-리처드 니스벳의 Mindware 168쪽 발췌 인용.
혁신학교에 갖가지 대회가 사라진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시상을 조건으로 하는 대회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주는 만족감, 성취감에 대한 몰입을
'포상'이라는 조건이 가로막는 것이다.
이 포상은 아동의 행위를 유인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인간은 누군가로부터 나의 행동이 조종된다는 느낌을 받으면 동기가 낮아진다.
마찬가지로 시상을 목적으로 하는 대회는 결국 아이의 자율성을 크게 침해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지시와 명령이 아닌 권유와 부탁의 표현을 해야 한다.
미시간 대학의 바바라 프레드릭슨은 정적 정서의 확장 구축 이론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정적인 정서가 인간 개인이 가진 지적,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자원을 지속적으로 확장시키고, 자신의 자원으로 구축하여 위기의 순간이나 기회가 되면 이를 활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mindfulness(마음 챙김)이 중요하다. 글을 쓸 때는 글을 쓰는 행위에, 책을 읽을 때는 책을 읽는 행위 자체에 몰입한다. 호흡에 집중하거나, 악기 연주에 집중한다.
Here & Now
지금 이곳에서 하는 행위에 집중하면 정적인 정서가 지속되고, 이는 개인이 가진 자원을 보다 더 확장시키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간다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에 '포상'이라는 기제가 끼어든다.
이는 매슬로우가 말하는 욕구 위계 이론에서 최상위 욕구에 해당하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단번에 침해하는 것이다. 또한 Ryan이 말하는 인간이 본래 추구하는 3가지 욕구. 즉,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 중 자율성을 먼저 침해한다. 침해당한 자율성은 다시 자신의 자율성을 침해한 대상과의 관계성을 재 정립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행위 자체에 몰입을 방해하므로, 아이가 느끼게 되는 유능감을 제한한다.
이는 결국 아이가 스스로 행하게 하는 내적 동기를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아이들 시상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많은 학부모들이 걱정을 한다.
우리 애가 스스로 하지 않을까 봐.
보상이 없이 어떻게 사람이 움직이느냐고.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위와 같다.
교사는 교육에 대해 전문가다.
우리가 배운 이론을 매일 현장에서 접하고, 이를 '삶으로 읽기' 때문이다.
만약 책을 '눈으로 읽는'사람, '머리로 읽는' 사람, '삶으로 읽는'사람이 있다면
교사는 '삶으로 읽는'사람이어야 한다.
삶으로 읽는다는 건 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와 원인을 알았다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떤 방법이 아이의 자율성을 높여주고, 관계성을 확대하며, 유능감을 두텁게 할 것인가?
과연 외적인 보상을 대신할 방법은 없는가?
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있다.
그 행위의 의미와 목적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방법은 다음 기회에 자세히 이야기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