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 동기를 키우는 3가지. 자율성, 유능감, 그리고 관계성
프로이트가 리비도를 말했듯이 Ryan과 Deci는 SDT(Self-Determination-Theory)에서 인간에게 있어서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은 본래 갖고 있는 욕구라고 하였다. 현재 동기와 관련하여 이들의 이론이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나 또한 이들의 말을 신뢰한다.
자. 여기 한 남자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아침마다 아빠가 웃옷의 단추를 끼우는 걸 눈여겨보았다.
다음 날 아침. 아빠가 옷을 입는데 "아빠 단추 할래."라고 말했다.
아빠는 아들에게 단추 끼우는 것을 맡겼고, 아들은 낑낑대며 단추 하나를 끼우는데 10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끝내 단추를 끼웠다.
아빠는 아들에게 고맙다며 꼭 안아주었다.
이 이야기에는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 3가지 요소가 고르게 갖춰져 있다.
아이는 스스로 하고자 했고, (자율성)
하고자 하는 걸 해냈으며, (유능감)
자신의 행위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경험했다.(관계성)
아이들이 뭐든 스스로 하려고 할 때가 있다.
그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바로 부모의 '관심'이다.
그리고 그 행위를 행동으로 옮길 때 아이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금방 느낀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격려다.
'네가 해주었으면 좋겠다. 괜찮아. 아빠 시간 많아.'
이 순간에 바로 아빠와의 관계가 깊어진다.
실패하고 실수하는 아이, 무엇이든 미숙한 아이의 도전을 지켜봐 주는 행위가 바로 아이의 관계성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것만으로 아이가 스스로 하는 힘이 길러지지는 않는다.
특히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들은 반드시 자기 행위의 목적을 찾는다.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갖춰진 자율성과 유능감이 무엇을 위해 키워졌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저학년 아이들에게 교사가 부탁을 하면 아이들은 서로 들어주려 하지만, 고학년 아이들은 서로 미루기 바쁘다. 행위의 목적이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부합한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과 삶의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십 수년 전 일이다. 나의 어머니가 신앙하던 SGI의 남자부 선배가 있었다. 가끔 찾아와 읽고 있는 책을 물어보고,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을 권하던 분이었다. 니코마스 윤리학, 일리아드, 오디세이, 수레바퀴 아래서, 폭풍의 언덕, 그리고 브론테 자매의 이야기, 빅토르 위고의 삶,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헤밍웨이 등의 책들을 그분을 통해 소개받게 되었다. 나는 그분이 꽤 번듯한 직장에 다니실 거라 추측했지만, 막노동을 하고 계셨다. 그분의 초대로 사시는 곳에 식사를 하러 간 적이 있었다. 옥탑방이었다. 황갈색 새시문을 열고 들어가니 왼쪽에는 싱크대가 있었고, 방 한쪽 가득 책이 있었다. 놀라웠다. 옥탑방, 공사장 인부, 그리고 그분의 독서... 나와 다르지 않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분의 하루하루는 정말 훌륭한 삶이었다. 매일 힘든 노동이 끝나고서 늘 책을 들고 다니며, 다른 사람을 만나 격려하고, 이동하는 틈틈히 한쪽 한쪽 진지하게 책을 읽는 모습은 자기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 그 자체였다. 내가 다니는 학교의 선생님들보다 더 훌륭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그 선배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반지하에 살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의 친구들은 꽤 좋은 동네에 살고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왠지 모를 위화감에 휩싸여 있을 때, 그 선배는 나를 찾아와 입학 선물로 기타를 주셨다.
그리고 나에게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이런 말을 하셨다.
"경호 씨. 평생 함께 사제의 길을 걸어갑시다"라고.
열일곱 살이나 많은 어른이 나를 이렇게까지 대접해주다니.
내 가슴속에 알 수 없는 뜨거움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매일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가 저 선배의 기대와 꿈에 영향을 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분이 말한 사제의 길은 다른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비참이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 싶다."는 그 선배 인생 스승의 꿈.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삶이 바로 사제의 길이었다.
결국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도, 부모님께 효도해야 하는 이유도, 친구와 깊은 우정을 만들어 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 선배는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를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나와 공유했던 것이다. 자기 삶의 가치를 17살이나 어린 나에게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그 길을 함께 가자고 했다.
빅터 프랭클은 왜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하였을까?
공자는 왜 15세가 되어서 무엇을 배우려는 뜻(志學)을 세웠을까?
사춘기 아이들이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려는 까닭이 빅터 프랭클이 말한 삶의 의미이고, 공자가 15세가 되어서 세운 志學이 아닐까?
나는 그래서 아이들에게 진지하게 삶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생각을 나누어야 할 시기가 바로 사춘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과 매달 한 편의 시를 나누고, 매일 한 문장의 명언을 읽고 생각을 나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헤어질 때 내 삶의 가치를 편지를 통해 아이들에게 전한다.
책을 쓰시는 작가 분들 혹은 선생님들과 페이스북 친구로 조금 교류를 하고 있다.
몇 년간 페북을 하면서 이 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순간을 알게 되었다.
그건 자신의 책을 누군가가 진지하게 읽은 순간이었다.
왜 진지하게 읽는 순간을 좋아할까?
책은 지은이의 삶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이 낱낱이 드러나는 공간이 바로 책이기 때문이다. 그 공간을 진지하게 돌아다니고,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은 독자는 곧, 지은이 삶의 목적과 의미를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책을 읽다가 생각난 글을 놓치기 싫어서 빠르게 글로 올리자마자 글을 읽으신 어떤 분들이 피드백을 주셨다. 나의 다음 글을 기대하신다는 말씀이었다. 이러한 반응은 내 글 속에 담긴 내 삶의 목적과 의미를 공감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글을 쓰게 된다.
아이들이 SNS에 글을 올리고,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는 이유도 아마 이와 같지 않을까?
나의 삶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
내 삶의 목적과 의미가 타인에게 공감받고,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그것이 아이들이 자율성을 갖고 관계를 맺고, 자기 삶을 통해 타인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유능감을 경험하려는 것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Ryan & Deci가 말한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
이 3가지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자율성을 기를 수 있도록 안전한 환경에서 충분히 실패하며 유능해질 경험을 했다면, 이제 스스로 자신의 자율성과 유능감을 타인에게 펼쳐 보일 능동적 관계성을 만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능동적 관계성'이라는 말에 잠깐 주목해 보자.
아이들은 주로 수동적 관계성을 경험해 왔다.
어릴 때는 부모가 자녀에게 다가가서 도움을 주어야 했고, 교사가 학생에게 다가가 가르쳐주어야 했다.
하지만 자녀가 부모에게 다가가도록, 학생이 교사에게 다가서도록 하는 것이 바로 능동적 관계성이다.
부모학에 따르면 영아기는 양육자, 유아기는 훈육자, 아동기는 격려자, 청소년기는 상담자가 부모로서 가져야 할 역할 모델이다. 청소년기에는 '상담자'가 부모의 역할이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찾아오기 전에 먼저 다가가지 않는다. 내담자가 상담자를 찾아오는 것이 일반적인 상담의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아이가 스스로 부모에게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아이가 부딪치는 일상의 고민을 털어놓을 대상으로 가장 가깝고, 신뢰할만한 부모가 되어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계를 이끌어가는 것이 부모가 아니라 바로 자녀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학교로 가져와보자. 어떻게 해야 학생의 능동적 관계성, 아니 학생 주도적인 관계를 경험하게 할까?
답은 '반응'에 있다. 아이들의 말이나 행동이 교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어떤 긍정적인 감정을 일으켰는지, 생각의 변화를 가져왔는지 직접 표현하는 것이다.
수업장면에서 아이의 표현을 공개적으로 칭찬하되, 교사 개인의 느낌이나 생각에 미친 영향을 표현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아이가 보여주는 말이나 행동이 교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표현해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아이가 타인(교사)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리해보자.
아이는 유아기에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시험해 볼 안전한 환경을 제공받는다.
이를 통해 자율성이 길러진다.
이어서 아동기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행위의 영역을 넓히고, 능숙해지면서 유능감을 경험한다. 마지막으로 청소년기에는 이러한 자율성과 유능감을 무기로 타인과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이 3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아이는 스스로 움직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