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똥누기, 인지적 자기조절 그리고 행복.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본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그러면 아이들이 대답한다.
"선생님이요."
"의사요"
"요리사요"
"가수요" 등등...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렇다. 질문이 잘못되었다.
이렇게 물어보았어야 했다.
"커서 어떻게 살고 싶니?"라고.
그러나 보통은 이렇게 물어보지 못한다.
우리에게 장래희망은 '형용사'가 아니라 늘 '명사'였기 때문이다.
음악을 잘 모르지만 내가 좋아하는 드러머가 있다. 남궁연 씨다.
그가 옛날에 라디오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꿈은 명사보다 형용사가 중요해요."
그는 왜 명사보다 형용사가 중요하다고 했을까?
그 까닭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앞서 아이들에게 '무엇이 되고 싶니?'라고 물어보았을 때 아이들은 전부 명사로 대답했다.
교사, 의사, 요리사, 가수.
과연 교사, 의사, 요리사, 가수가 되면 행복할까?
더 이상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이후의 삶에서 행복이 지속될까?
교사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
의사로서, 요리사로서, 가수로서 자기 삶을 어떻게 살았는가가 이후 삶의 행복을 결정짓지 않을까?
나는 이 점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어 이야기했다.
1단계 : 생리적 욕구
2단계 : 안전에 대한 욕구
3단계 :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
4단계 : 자기 존중의 욕구
5단계 : 자아실현의 욕구
그렇다면 명사로 자기 꿈을 이야기하는 아이들의 욕구는 어느 단계가 바탕이 될까?
자기 존중? 자아실현?
글쎄... 소속에 대한 욕구가 더 크지 않을까?
교사, 의사, 요리사, 가수라는 집단에 소속되어 주어지는 소속감과 자신에게 쏟아지는 애정에 대한 욕구.
그렇다면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가 채워지고 나서 자기 존중 혹은 자아실현의 욕구를 추구하게 될까?
이에 대한 내 생각은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을 관찰해보면 안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
왜 그럴까?
인간은 자기 삶의 태도를 쉽게 바꾸지 못한다.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자기 삶의 철학이고, 가치관이며 인간관이고, 인생관이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왜냐하면 살아온 인생만큼 자기 삶을 대하는 태도가 항상성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동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어떻게'를 꿈꾸게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선생님, 어떤 의사, 어떤 요리사, 어떤 가수가 되고 싶은가를 꿈꾸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명사를 이룬 이후 '형용사'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게 되고,
그 형용사적 삶이 자기 삶의 에너지가 되고, 행복한 삶의 바탕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아이들과 매일 일류의 인물들이 말한 명언들을 읽고 자기 생각을 써보고 나의 생각을 피드백 하는'글똥누기'를 하는 이유이고, 글똥누기를 통해 아이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꿈꾸게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