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역치 수준, 생존, 혐오 그리고 행복.
역치는 생리학 용어로써 인간이 갖고 있는 감각기관이 감지할 수 있는 최소 한도의 자극량을 뜻한다. 예를 들어 향기의 역치라 하면 후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향의 최소 농도를 뜻한다.
코르티솔(Cortisol)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 있다. 이 호르몬은 스트레스 역치 수준에 따라 분비된다. 이것이 스트레스라고 여겨질 정도의 강도라면 코르티솔 호르몬이 즉각 분비되어 스스로를 보호한다.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일종의 방어 시스템 같은 것이다. 이 호르몬은 긴장과 각성을 동반한다. 인간이 위협에 대응하려면 근육은 긴장하고 뇌는 각성상태에 있어야 상대의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개 개인마다 스트레스 역치 수준이 있다. 기질에 따라, 환경에 따라, 성격에 따라 각각의 스트레스 역치 수준은 전부 다르다.
그렇다면 과연 개인에게만 스트레스 역치 수준이 있는 걸까? 사회나 국가가 가진 스트레스 역치 수준은 없는 걸까? 나는 사회 구성원이 가진 스트레스 역치 수준의 평균값이 사회적 스트레스 역치 수준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다시 개인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이십 년이 넘었다. 하지만 20년이 넘어서 만난 그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마음이 편안하고 말을 막 하게 된다. 야 이**야 정도는 오랜 친구의 상징 같은 표현이다. 처음 보는 이에게 이런 표현을 한다면 당연히 크게 한 판 붙을 일이다. 그런데 왜 친구에게 어찌 보면 불편해할 말을 해도 화를 내거나 관계가 바로 불편해지지 않을까? 그 이유는 그 표현이 나의 생존을 위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심리학 용어사전을 살펴보면 '혐오'라는 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제거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정서"
이를 다시 풀어보면 자신에게 해가 된다고 여기는 대상에 대해 느끼는 정서가 바로 '혐오'라는 것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자. 개인마다 가진 스트레스 역치 수준이 있다.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될 강도의 스트레스를 느끼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이는 기본적인 생존 욕구가 채워지지 못할 때 극도로 낮아진다. 생존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까지 매일의 삶이 무덥고, 힘들며,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지 못하고 더구나 앞으로 펼쳐질 나의 미래마저 절망적이라면... 생존을 넘어서 삶의 의미조차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개인의 일상이 무너지고 있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대기업에서도 비정규직 비율이 40%에 육박하고 있다.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시간제 근로자의 임금이 2014년 현재 정규직의 약 25%에 불과하다는 연구결과는 싼 값에 부려지는 노동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요즘 2~30대 실업률은 어떤가. 16년 2월 현재 청년 실업률은 12.5%로 1999년 6월 이후 역대 최고치, 작년에 일자리를 얻은 청년 중 64%는 비정규직, 지난해 2~30대 가구 월평균 소득은 2003년 가계 동향 조사가 실시된 이후 월평균 소득이 처음으로 감소되었다. 높은 실업률과 더불어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의 확산, 더불어 소득 감소는 인간관계의 기본이 되는 경조사 참석마저 두려워지고, 친구와의 만남을 멀리하게 될 정도로 개인의 사회적 관계마저 무너뜨리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결혼을 한 3~40대들, 높아지는 실업률과 가까스로 취업한 직장의 낮은 고용 안정성, 정규직 대비 낮은 임금으로 시달리다 가정으로 돌아간 부모의 스트레스 역치 수준은 이미 매우 낮아져 버렸고, 이는 다시 아이들의 불안정 애착 형성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결국 불안정한 애착의 아이들은 늘어가고, 이들이 학교에 모여들어 사소한 자극에도 스트레스 반응을 보여 도전 혹은 도주(외현화 행동 혹은 내현화 행동)를 보이면서 학교폭력은 점점 가혹해지고, 학교 밖 일상이 무너진 성인들의 잔혹범죄는 날로 기승을 부리게 된다. 그래서 이는 개인의 도덕성 문제 혹은 학교의 인성교육 문제로만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매일의 삶이 생존의 연속이라면 개인이 가진 스트레스 역치 수준은 계속 낮아질 것이고, 이는 아주 작은 스트레스 상황에도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해서 스스로를 보호하게 된다. 문제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다하게 , 그리고 장시간 분비될 경우 개개인의 면역력을 낮추고, 정신적인 문제들 예를 들면 불면, 불안, 우울 등과 같은 증상으로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면 사람은 자동적으로 도전 또는 도주(fight or flight) 반응이 일어난다. 하지만 온라인 상에서 타인으로부터 스트레스 자극을 받고, 이로 인해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었다면 사람들은 도주(flight) 하기보다는 도전(fight)의 반응을 쉽게 보인다. 도전하는 대상이 지금 내 눈 앞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낮아진 스트레스 역치 수준에 의해 아주 작은 자극에도 도전(fight) 반응을 보이기 쉬운 온라인의 그늘에 숨어 자신에게 해롭다고 여겨지는 불특정 한 타인을 나의 삶에서 제거하고자 하는 정서, 즉 혐오라는 감정이 표출된다고 생각한다. 정리해 보면 무너진 개인이 모여 '혐오'사회를 이루게 된다는 의미다.
감정은 전이된다. 슬픈 감정이 강하면 슬픈 감정이, 기쁜 감정이 강하면 기쁜 감정이 타인에게 전달된다. 중요한 것은 감정이 전이되는 대상이 면역력과 같은 자기보호가 강한, 혹은 자존감이 높은, 혹은 스트레스 역치 수준이 높은 대상이라면 이러한 감정은 쉽게 전이되지 않는다. 특히 혐오와 같은 감정은. 왜냐하면, 혐오라는 감정은 결국 자신의 자존감에도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평가할 때 남을 비난하고, 욕하는 행위는 결국 그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기준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가 스트레스 역치수준이 높다면 이와 같은 혐오반응은 쉽게 사라질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온라인 상의 많은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혐오한다. 하지만 모든 남성에게는 어머니가 있고, 모든 여성에게는 아버지가 있다. 혹은 친구가 혹은 자녀가 있다. 그 모든 대상을 단 한 가지 기준, 성별에 따라 혐오의 대상으로 치부해버리는 행위는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혐오할까? 그 이유는 우리 사회가 가진 사회적 스트레스 역치 수준이 정상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 아닐까? 건강한 수준의 스트레스 역치수준을 가진 구성원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 원인이 건강한 사회, 행복한 사회가 아닌 오직 생존을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이기기 위해 싸워야만 하는 사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 행복은 개인의 생존으로 이뤄질 수 없다. 각 개인이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해서는 민주주의도 행복도 존재하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지 않고, 존중할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한다. 그것이 개인의 건강과 행복을 지키는 길이고, 우리 사회의 건강과 행복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책임을 온전히 개인에게만 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타고난 기질, 환경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낮은 수준의 스트레스 역치수준을 타고난 사람도 있고, 환경에 의해 스트레스 역치 수준이 낮아진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이러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회적 제도와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더 이상 개인의 일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사회적 스트레스 역치수준을 높여서 서로의 차이를 수용하고 의견을 존중할 수 있는 건강한 개개인이 늘어나도록 우리 사회가 사회적 지지를 탄탄히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