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력성에 대한 첫번째 생각.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시인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십삼도
영하 이십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오도 영상 십삼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가을이 오고 낙엽이 떨어진다. 마지막 잎 하나까지 떨어지고 나면 나무는 마치 죽은 듯이 봄을 기다린다.
그 기나긴 겨울을 버티며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봄을 기다린다.
그러나 우린 한 겨울 눈보라 속에 홀로 서있는 나무가 틔울 싹과 피워낼 꽃을 상상하지 못한다.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의 주인공 재활의학과 의사 이승복은 체조선수였다.
그러나 한 순간의 실수로 척추를 다쳐 그의 꿈이었던 올림픽을 포기해야 했다.
꿈을 포기하고 절망에 빠져 있던 그는 가족의 지지와 격려, 그리고 스스로 일어서기 위해 재활치료에 매진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희망이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 끝에 재활의학으로 유명한 존스홉킨스 대학병원 재활의학과 의사가 되었다.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진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자하는 삶의 의미가 절망에 빠진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가 척추를 다치고 평생 누워만 있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게 되었을 때 누구도 그가 의사가 될거라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가족은 물론 그 자신 마저도.
그는 자신이 겪은 사고로 척수에 손상을 입게 되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재활에 매달렸다. 자신의 재활과 관련된 의학서적들을 열심히 읽었지만, 늘 벽에 부딪쳤다. 그 때 한 간호사가 권해준 하워드 러스크 박사의 'A World to Care for'라는 자서전을 읽고 본격적으로 재활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자기 삶의 의미를 찾은 것이다.
식물이 어떤 상황에서도 빛을 향하는 성질을 '굴광성'이라고 말한다.
굴광성은 1880년 다윈이 식물에 생장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식물이 굴광을 하는 이유는 성장에 필요한 양분을 만들기 위한 광합성을 해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행복은 무엇일까?
사람들마다 행복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불행이 무엇인지는 오랫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해왔지만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본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98년 APA(미국심리학회)총회에서 마틴 셀리그만이 인간의 좋은 점을 더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심리학의 관심이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인간의 행복을 구체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7년 후 Seligman과 동료들(2006)은 오랜 연구 끝에 행복은 3개의 요소로 나뉘어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좋은 혹은 즐거운 삶(Plaeasant life), 참여하는 삶(engaged life), 의미있는 삶(meaningful)을 말한다.
앞서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의 주인공 이승복 박사가 하워드 러스크 박사의 'A World to Care for'라는 자서전을 읽고, 자기 삶의 희망을 찾은 것은 식물이라는 생명 속에 스스로 빛을 향하는 성질을 갖고 있는 생장점이 있는 것처럼, 셀리그만이 말한 의미있는 삶(meaninful life)을 찾는 생명에 내재된 Resilience를 통해 행복한 삶의 요소를 갖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은 누구나 Resilience를 갖고 있다. 마치 식물이 굴광성을 가진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Ann Masten(2002)은 일상의 마술(Ordinery Magic)이라고 불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DNA를 갖고 있듯이 말이다.
사람은 햇빛을 보고 살아야한다. 해를 보지 않으면 사람은 우울해지고, 깊게 잠을 자지 못하며, 신체적으로도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우리보다 해와 떨어져 있는 북유럽 사람들은 해를 사랑한다.
사람은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한다. 희망이 없으면 사람은 우울해지고, 절망에 빠지며, 자신과 타인을 해치게 된다. 그래서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식물이 태양을 향하듯 스스로 희망을 갈구한다. 그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그 희망은 바로 삶의 의미다.
그래서 희망을 자기 삶의 의미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희망은 욕망에 비하여 긍정적 정서의 지속시간이 훨씬 길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필립 브릭먼(Philip Brickman)과 도널드 캠벨(Donald Campbell)이 1971년에 발표한 '쾌락 상대주의와 좋은 사회 설계(Hedonic Relativism and Planning the Good Society)' 따르면 인간은 행복한 일이 생겨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서 또 다른 것을 욕망하게 된다고 하였다.
후에 심리학자로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이 만족의 쳇바퀴(Satisfaction treadmill)로 발전시켰다.
즉 만족을 위해 더 비싼 고가의 물건을 바라게 되어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불행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소비심리학에 따르면 '개인적 소비'는 소비자의 행복지수에 영향을 주지 않으나 남을 위한 '사회적 소비'를 많이 한 사람의 행복감은 높았다. 이는 욕망을 통해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보다 희망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개인 뿐만 아니라 타인의 행복감까지 높일 수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2003년 미국 미시건 대학교에서 423쌍의 장수부부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오래사는 비결을 5년간 관찰하였다. 그리고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한다. 그들 대부분이 정기적으로 몸이 불편하거나 가족이 없는 사람들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봉사활동을 하고 나면 며칠 혹은 몇 주간 심리적 포만감이 지속되었다. 의학적으로도 혈압과 콜레스테롤이 낮아지고, 엔도르핀이 3배 이상 증가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1988년 하버드 의대에서 실시한 연구에서도 아무런 대가 없이 한 봉사활동을 한 참가자의 타액 속에 Ig A라는 면역 항체가 월등히 증가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남의 앞을 밝히면 내 앞도 밝아진다는 성인의 말씀과도 통한다. 결국 무엇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걸 것인가가 그 사람 인생의 에너지를 결정 짓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욕망이 아니라 희망에 불타올라야 한다.
그렇다면 희망은 도대체 무엇일까? 희망과 욕망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욕망은 개인적 바람이라면, 희망은 모두의 바람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고, 모두를 위한 것이 희망이다.
그 희망하면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
바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이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가 간섭이니 무효니 하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앨라배마 주에서,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내 인생의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 '비참'이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 싶다."고.
그리고 나 역시 아이들에게 나의 '희망'을 말한다.
"너희들처럼 어린 아이들이 어디를 가건, 언제 나가건 안심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희망은 사람들 삶의 의미가 된다.
인간의 행복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교육의 목적은 아이들의 행복이다.
모든 아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교육의 목적이다.
듀이, 페스탈로찌, 루소, 프레이리, 발도르프 등 모든 교육학자들이 같은 꿈을 꾸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같은 꿈을 그들과 나는, 그리고 우리들 모든 교사들은 동지(同志)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가르칠 수 있을까?
나는 헤르만 헤세의 단편소설 [아우구스투스]를 통해 그 길을 찾아 보았다.
소설의 주인공인 아우구수투스의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결혼 초 남편을 잃고 힘들게 살다가 빈스반겔이라는 노인의 도움으로 아이를 순산하게 된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낳은 아이가 ‘모든 이들에게 사랑 받는 아이’로 자라기를 소원한다. 엘리자베스의 소원대로 아우구스투스는 아주 귀엽고, 영리한 아이로 자라며,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나,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아이 가 되어버렸다.
이에 크게 실망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아이를 위한 소원’이 잘못되었음을 후회 하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음에도 한없이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시했다.
마치 모 항공사 회장의 딸처럼.
아우구스투스는 그토록 자신이 경멸하고 무시하는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수록 사람들을 괴롭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고 아무런 노력 없이 얻는 사랑과 관심에 깊은 권태와 허무를 느꼈다.
끝을 모르는 권태와 허무 속에 빠져 괴로워 하는 삶에서 벗어나고자 아우구스투스는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에 대해 깊은 좌절을 느낀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하려 했다.
그러나 그 때 빈스반겔 노인을 통해 아우구스투스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얻게 되고, 그는 이렇게 소원한다.
"제가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십시오."
사랑받는 사람에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에게 구제받는 사람에서 남을 구제하는 사람으로 자기 삶의 목적을, 의미를 욕망이 아닌 희망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렇게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한 적 없었던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상처 준 사람들을 만나 진심으로 사과하고, 그들의 좋은 점을 기억하려 애쓰며, 힘 닿는 데까지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고, 도와줄 수 없을 때는 밝은 미소와 친절한 인사 같은 따듯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다.
그렇게 아우구스투스는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모든 사람들이 아우구스투스를 사랑했을 때 그는 아무런 땀과 노력 없이 항상 좋은 결과를 얻었다. 이는 결국 아우구스투스의 높은 이상을 향한 시선을 가리고, 그의 삶을 무의미하게 느끼게 했으며, 일상의 작은 기쁨으로부터 무감각해지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한 마디로 은혜를 모르는 자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 그를 지지해주는 빈스반겔을 만나게 된다. 누가봐도 은혜를 모르는 짐승만도 못한 아우구스투스의 Resilience를 믿어준 빈스반겔. 자살이라는 엄청난 시련 속에 자신을 믿어준 빈스반겔을 통해 자기를 돌아본 아우구스투스는 결국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그 속에서 자기 삶의 의미(사람들을 사랑하는 삶)을 찾게 된다.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대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 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인간은 누구나 역경이나 시련을 겪게 된다. 이러한 역경이나 시련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역경이나 시련이 병일 수도 있고, 이별일 수도 있고, 죽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교사에게 가장 큰 역경은 바로 '불신'이다. 교사는 1년이라는 시간동안 미성숙한 아이의 '성장'을 믿고, 기다린다. '미성숙한' 아이의 실수, 실패, 좌절을 옆에서 지켜보는 일은 아이가 '미성년'임을 잊은 채 아이가 가진 가능성을 망각하게 만든다. 그 망각은 곧 아이에 대한 불신으로 자리하게 된다.
수업시간에 돌아다니는 아이, 거친 말로 주변에 상처를 주는 아이, 학습이 부진한 아이, 자기표현을 못하는 아이, 교사를 힘들게 하는 무기력하거나 무개념한 아이들의 가능성을 믿고, 그 아이가 가진 Resilience를 키워주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그리고 매일 눈빛을 나누는 아이들 중에서 단 한명의 아이도 빠짐없이 모두 생명을 갖고 있다.
바로 그 생명을 가진 모든 아이들에게는 Resilience가 존재한다.
담쟁이처럼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 남을 수 없는 시련을 딛고 올라서는 힘이 바로 Resilience다.
추운 겨울 찬 바람 속에 죽은 듯이 버티고 선 나무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아이의 내면 깊숙히 자리한
Resilience를 믿고 키워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 교사가 해야할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교사가 생각하는 아이의 Resilience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