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결핍, 인간에 대한 이해 결여, 그리고 돈.
임계치를 넘어섰다.
교사 개인이 학교폭력을 예방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어린 시절 시장 한켠에서 고약을 팔던 아저씨가 있었다.
여기 아파도 고약, 저기 아파도 고약을 바르면 낫는다던 아저씨.
어린 내 눈에도 효과가 의심스러웠지만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고약 한 통마저 남김없이 사가던 기억이 있다.
어느 날 우리 집에서도 그 고약을 만났다는 것은 안 비밀.
학교폭력을 예방하기 위해서 학교가 하는 일은 무기명 설문조사와
학교폭력 행위가 무엇인지 가르치고, 이를 금지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교사들이 아무리 때리지 마라, 욕하지 마라 말로 해도 아이들은 듣지 않는다.
하지 말라는 건 더 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에 대한 이해 따위 고려치 않은 채
상벌점 제도, 학교폭력 대책위원회, 스쿨 폴리스 배치 등
온통 처벌과 위협만 논의할 뿐 근본적인 해결에 대한 접근은 논의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건 정책의 방향과 내용을 학교 밖에서 논의하고, 결정한 후
학교 안에서 시행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급기야 교육부는 생활기록부에 학교폭력 행위를 기록하겠다는 으름장을 놓는다.
과연... 이 으름장은 통했을까?
봉사활동, 학교폭력 예방교육 수업 듣기, 주의, 경고, 정학, 무기정학, 퇴학.
학교폭력 가해자에게 주어지는 처벌의 종류들이다.
과연 이런 방법으로 아이들이 친구를 대하는 태도가 개선될까?
학교폭력 예방교육이 주는 메시지는 딱 하나로 정리할 수 있다.
'처벌'
그러나 그 따위 처벌은 간단히 무시하는 게 요즘 아이들이 사회를 대하는 태도다.
그래서 무섭다.
이들에게 처벌은 사회에 대한 저항을 드러내는 일종의 '용기'다.
어른도 다르지 않다.
교도소에 여러 번 다녀온 일을 마치 자랑처럼 떠벌리며 '별'이 몇 개라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시장 통에서 만병통치약이라는 고약을 팔던 아저씨나 학교폭력 예방한다고 처벌만 남발하던 교육부나 도대체 다른 게 무엇인가?
학교폭력 예방교육이 전면적으로 시행된 지 어느새 약 10여 년이 지났다.
그러나 학교폭력 가해의 시작 연령은 점차 내려가고, 양상은 더 은밀해졌으며, 행위의 강도는 용서의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갖가지 정책의 효과에 대해 회의적인 이유다.
그렇다면 도대체 대책은 무엇인가?
미로를 찾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길을 찾는다.
이제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먼저 학교폭력 예방이 실패하는 이유를 짚어보고자 한다.
아이들 옆에 부모가 없다.
교실에는 친구가 없다.
수업에는 교사가 없다.
이는 명백히 사실이다.
국가는 부모에게 더 열심히 일하시라고 12시간 동안 아이의 돌봄을 학교가 책임진다고 한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오롯이 '공부하는 곳'인 학교에 머물러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아이들 옆에 부모가 없다.
책상과 의자가 놓인 교실.
아침에 신은 양말은 벗을 수도 없고, 교실에서 뛸 수도 없다.
부모와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 아이들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Cortisol 수치가 높다.
코르티솔 수치가 높다는 것은 긴장과 각성상태를 의미하고,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해마의 성장과 발달이 억제되거나 오히려 위축되기도 한다.
여기서 해마는 기억, 학습, 동기와 관련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학습능력이 저하되는 셈이다.
돌봄에서 만나는 친구들 모두 예민하다.
돌봄 교실에서도 학교폭력 예방교육은 필수다.
따라서 친구와 어울려 놀기보다 서로를 경계하기 일쑤다.
서로를 경계하는 아이들, 쉴 수 없는 공간, 오지 않는 부모.
아이들의 스트레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학교는 '공부하는 곳'일뿐 놀거나 쉬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학교의 돌봄이 아니라 부모의 돌봄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언젠가 일찍 돌아올 거라는 부모의 약속이지, 12시간 동안 학교에 있게 해준다는 정책이 아니다.
아이가 학교에 다녀오면 부모는 묻는다.
누가 괴롭히지는 않니?
그렇다.
모든 부모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불안이 존재한다.
내 아이가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되지는 않을까?
혹은 내 아이가 학교폭력의 가해자가 되지는 않을까?
그 걱정은 아이들의 신경을 곤두세운다.
아직 대뇌 피질이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의 변연계는 예민하다.
시각 정보를 통해 파악한 타인의 행동에 담긴 정서를 오판하기 쉽다.
무슨 말이냐고?
간단하다.
눈이 마주치면 무조건 나에게 거는 시비라고 생각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어른들도 중고생들 모여 있으면 피해 다니는 이유가 이것이다.
아이들은 자신과 눈을 맞추면 공격으로 해석한다.
이들의 대뇌피질은 변연계를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타인의 행동을 곡해하기 쉬운 상태의 아이들을 더 예민하게 만든다.
"누가 너를 괴롭히지는 않니?"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아이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가정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주변의 친구들을 가해자로 놓아야 한다.
이 프레임은 한번 씌워지면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고?
초두효과라는 것이 있다.
처음에 입력된 정보가 나중에 습득하는 정보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준다는 뜻이다.
이는 무서운 말이다.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를 대하는 프레임으로 학교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
그렇다.
'친구는 학교폭력의 가해자일 수 있다.'
이걸 먼저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도 초, 중, 고등학교 12년 동안 지속적으로...
도대체 친구는 어디에 있을까?
시간과 공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
10년 20년이 지나고 다시 만나도 어색해하지 않고 반가워할 친구는 어떻게 만들어 줄 것인가?
아이들에게 '학교폭력 가해자'가 아닌 '친구'를 먼저 가르치고 경험하고 느끼게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교사에게 수업보다 업무가 우선이다.
이 명제는 참일까?
거짓일까?
심정적으로는 거짓이지만 현실적으론 참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과정과 관련된 업무라면 좋다.
그러나 교사들에게 부여되는 업무는 교사가 짜 놓은 교육과정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 다반사다.
돌봄, 방과 후, 청소년단체, 보건, 사서...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고, 우리나라의 노동시간이 OECD 1,2위를 다투는 동안 아이들은 학교에 내맡겨졌다.
-비싼 사교육비를 절감한다고 학교 안에 방과 후 학교를 만들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각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운영되는 청소년 단체가 학교에서 시작되고 자리한지도 벌써 수십 년.
-18 학급 미만의 학교에는 보건 교사가 없고, 18 학급 이상의 학교에서는 보건 수업을 하는 보건교사 대신 보건실에서 아이들의 보건을 책임져야 하는 교사들.
-아이들 가르치는 일 따위 누구나 할 수 있으니 학교 도서관 관리 및 운영도 하는 초능력 교사들.
교사와 학생이 마주하는 시간의 양이 학업성취와 인성발달에 중요한 변인이라는 수많은 연구 따위 간단히 무시되는 학교에서 교사들은 아이들 옆에 머무를 수 없다.
교사 1인당 학생수가 OECD 평균에 근접한다는 언론보도 역시 아이들에게 교사를 빼앗는 원인이다.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수업하지 않는 교사를 포함하여 교사 1인당 학생수를 통계 내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이기 때문이다. 언론은 이 점을 확인하지 않은 채 기사를 내보낸다.
수업을 하지 않는 교사를 제외한 교사 1인당 학생수는 OECD 평균보다 약 10여 명 높다는 것은 통계 따위 살펴보지 않은 기자들의 무책임에서 그치지 않고,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피해를 입힌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수는 여전히 부족하다.
아이들 교육과 관련 없는 일을 할수록 쌓여가는 업무의 전문성과 반비례하여 낮아지는 수업과 생활지도의 전문성은 결국 교사의 무기력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교사들의 이 모습만 보고 철밥통이라며 비난하기 일쑤다.
그래서 묻고 싶다.
왜 수업을 하는 교사가 돌봄 강사를 관리하고, 예산 계획을 세우고, 프로그램을 짜야하는가?
왜 수업을 해야 하는 교사가 방과 후 학교 강사를 섭외하고, 프로그램을 짜고, 분기마다 학생들 모집하고, 안내장을 내보내는 일을 해야 하는가?
왜 수업을 해야 하는 교사가 간호사가 없어서 간호사의 일을 해야 하는가?
왜 수업을 해야 하는 교사가 학교 도서관 사서가 없어서 장서관리, 대출 관리를 해야 하는가?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변인은 셀 수 없이 많다.
부모의 변인 속에는 부모의 과거력, 경제력, 사회적 관계, 양육태도, 직업의 안정성 등이 있다.
부모만 있을까?
친구, 교사, 학교라는 시설, 식습관, 수면 상태 등 아이들 인지와 정서에 영향을 미치는 변인은 두 손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아무리 사이좋게 지내라한들 매일 서로의 갈등을 부부싸움으로 해결하는 부모를 보며 자란 아이들의 문제 해결 방법은 오로지 다툼뿐이다.
부모의 낮은 생활소득은 가까운 친인척 간의 왕래조차 끊어지게 만들고, 수시로 뉴스에 오르내리는 강력범죄는 이웃 간의 인사마저 '의심'의 눈초리로 경계하게 만든다.
집 밖을 나서며 마주하는 수많은 이들을 불신과 경계의 눈초리로 대해야 하는 부모에게 안정된 양육을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잘못된 일일지도 모른다.
그걸 사회도 아는지 어느새 아이들 잘못에 가정교육을 묻기보다 교사의 책임에 더 무게를 둔다.
그렇다.
학교는, 아니 교사는 아이들의 가정교육마저 책임져야 하는 시대다.
친구라는 말보다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말을 먼저 경험하는 아이들, 수업보다 업무가 중요한 교사들.
하지만 무엇보다 슬픈 건 아이들의 발달을 고려하지 않은 학교 그 자체다.
저학년은 대근육이 소근육보다 발달한 시기다.
조금이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이유는 근육의 발달을 촉진하려는 본능적 움직임인 셈이다.
그러나 학교는 이들의 발달을 촉진하기보다 억제하는 공간이다.
조금만 뛰어도 머리가 울리는 층간 소음,
옆반 아이들 목소리가 마치 옆 자리에 앉은 친구의 귓속말처럼 또렷이 들리는 교실 사이의 벽,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아이들의 경기 결과를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창.
가뜩이나 주의력이 산만한 아이들에게 수업과 관련 없는 부적절한 자극을 차단하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교실.
블루 라이트라는 빛의 색깔과 색온도가 주의 집중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 따위 개의치 않고 꺼지는 복도와 화장실 전등.
부족한 학교 예산 때문에 전기세를 아끼느라 아이들의 주의력도 줄어드는 현실 속에 교육부와 교육청은 갖가지 예산을 틀어쥐고 단위학교 예산을 늘려주지 않는 비교육적 행위.
발달에 따라 정서에 영향을 주는 색이 다름에도 일괄로 칠해버리는 학교 벽.
그 학교라는 시설을 짓는데 교사의 의견 따위 1도 물어보지 않는 교육청과 교육부.
과연 아이들은 학교라는 시설이 자신들을 배려하는 공간으로 인식할까?
억압하는 구조로 인식할까?
과연 어떤 생각으로 교육청과 교육부는 학교를 짓고 있을까?
시설이 아이들 정서 발달에 미치는 영향 따위 관심이나 있을까?
아이들은 씹지 않고, 아이들은 자지 않는다.
아이들의 식습관이 위태롭다.
아침은 거르고, 급식은 골라 먹고, 저녁은 때운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준비하고, 다듬고, 만드는 힘들고 어려운 과정 따위 지켜볼 여유가 없다.
가족끼리 밥이라도 먹을 때면 의례 외식이 당연하다.
집에서 먹는 밥에 드는 품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부모는 12시간 이상 일하도록 국가가 장려하고,
아이들은 안전에 대한 부모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학교에 맡겨지거나 학원에 돌려진다.
가족이 함께 음식 따위 준비할 시간은 없는 셈이다.
아이들은 볕을 쬐며 하늘을 올려다볼 시간이 없다.
따라서 수면 호르몬인 멜라토닌의 분비량은 적고, 잠이 들어도 얕은 잠을 자기 일쑤다.
깊은 수면이 이뤄지지 않으면 성장호르몬 분비는 물론이고, 신체의 이완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불규칙한 수면은 정서조절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우리 뇌의 청반이라는 핵을 1/4 가량 파괴하고, 이는 다시 쉽게 정서 폭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럼에도 아이가 피곤할까 봐, 아이와 함께 하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에 볕이 들지 않는 차로, 걷지 않아도 되는 자가용으로 아이를 등교시킨다.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 있음을 모른 채 악순환은 계속된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은 더 이상 무엇이 소중한지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정말 슬프고 절망스러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제 장래 희망의 한자리를 꿰찬 그 이름.
어떤 아이에게는 선망의 직업이요.
어떤 교사에게는 악의 축이다.
유투버는 왜 아이들에게 선망의 직업이 되었을까?
까닭은 돈이다.
가만히 집에 앉아서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피곤한 이성이나 양심 따위 저 멀리 내팽개치고, 스스로를 함부로 대할수록 별풍선이 쌓이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매력적인가.
돈을 벌기란 사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알바를 해도 임금을 떼먹거나 덜 주는 어른들,
갑질에 시달리는 을의 자리에 서서 고통받는 부모들.
아이들에게 직업을 갖는 것은 어쩌면 내 고통의 대가로 돈을 벌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누구도 자기 직업이 주는 즐거움 따위 말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직업은 보람은커녕 오늘을 살기 위해 참고 견뎌야 하는 고통 그 자체다.
우리가 하는 일 그 자체가 주는 삶의 의미, 보람, 가치 따위 자녀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일의 고단함, 고통을 경쟁하듯이 쏟아붓는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서 과연 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아빠나 엄마가 하는 일이 얼마나 보람차고,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인지 이야기하는 부모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우리가 잊고 있던 우리가 하는 일의 소중함, 가치를 전하기보다
돈이 가진 위력을 온몸으로 내뿜고 있던 사이에 아이들 역시 그렇게 살고 있다.
노동 그 자체가 가진 가치와 의미보다
최소 노동에 의한 최대 급여 지급을 직업 선택의 기준으로
여기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학교폭력 예방이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보다 돈, 양심보다 힘, 우정보다 폭력이 우선시되는 아이들 세계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