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다는 것의 의미.
아이를 믿는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예를 하나 들어보자.
아이는 지금 학원에 가야 한다. 때마침 친한 친구들이 놀자고 한다. 이제 아이의 고민이 시작된다.
학원에 갈까? 친구랑 놀까?
아이는 전화기를 만지작 거린다.
화면을 켜고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건다.
몇 번의 벨소리.
받는다.
그렇다.
엄마다.
아이는 배가 아팠다.
그래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배가 너무 아파요"
"그래? 많이 아파?"
"네"
"그래. 그럼 집에서 쉬고 있어"
그리고 전화를 끊는다.
갑자기 고통이 사라졌다.
역시 엄마는 만병통치약이다.
고통이 사라지자 친구들이 보인다.
이신득입(以信得入)
신(信)을 가지고 성불을 결정하느니라-어서 299쪽 발췌.
아이가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는 행위는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 중에서 인지적 욕구에 속한다.
반면 친구와 놀고 싶은 욕구는 애정 및 소속의 욕구다.
그렇다.
인지적 욕구가 더 고차원적 욕구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고차원적 욕구를 추구한다고 믿고, 그렇게 보이고 싶어 한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거짓말을 한다.
친구와 만나서 놀았어도 부모님께는 도서관에 다녀왔다고 말할 때가 있다.
친구와 만나서 놀았어도 회사 일 때문에 바빠서 연락을 못했다고 말할 때가 있다.
그렇다. 누구나 매 순간을 고차원적 욕구를 충족하며 살 수는 없다.
더구나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띵동.
엄마다.
엄마가 왔다.
슬슬 아파오는 배.
저녁 밥상에 차려진 나물반찬이 복통을 더욱 촉진한다.
"배가 또 아프니? 병원에 가봐야겠다"
"아까보다는 나아졌어요"
엄마는 아이가 꾀병을 부리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한다.
복통은 생존의 욕구와 결부된다.
인지적 욕구보다 생존의 욕구가 우선이다.
고차적인 욕구를 추구하지 않은 합리적 이유를 설명한 셈이다.
다시 말해 아이가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는 대신 집에서 쉬려 했던 이유를 엄마에게 다시 확인받은 셈이다.
차경 난지(此經難持)라고 하였다.
받기는 쉬워도 가지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엄마는 아이가 인지적 욕구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피그말리온이 사람이 된 이유는 그 흔들리지 않는 믿음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를 믿는다는 것은 아이에게 높은 수준의 욕구가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지속하도록 돕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는 미성숙하다. 어른보다 스스로를 조절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자기조절 능력은 향상할 수 있다.
자기조절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신뢰할 수 있는 양육환경이다.
아이를 믿는다는 것.
그것은 결국 아이에게 신뢰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