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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a Jul 18. 2023

학교에 갇힌 자들

드라마 <더 글로리> 속 공간과 움직임

* 이 글에는 드라마 <더 글로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릴 적 학교에 가면 좋았다. 매순간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친구가 내 맘을 몰라주는 게 슬펐고, 어이없는 오해로 선생님께 꾸중을 들은 날에는 교실을 뛰쳐나갈 수 없음이 괜히 분했다. 그래도 좋은 게 더 컸던 이유는 그곳에 '내 자리'가 있어서였던 것 같다. 학교라는 공간에는 학생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자리가 있다. 비록 학교, 교실이란 곳이 때때로 허허벌판에 혼자 서 있는 것처럼 서늘한 외로움을 느끼게 할지라도, 적어도 거기 있는 내 책상, 의자, 사물함만큼은 나의 소유이자 내가 점유할 권리가 있다. 내게는 의미 있는 작은 세상일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교실 속 문동은(송혜교 아역 정지소)의 자리는 안전하지 못하다. 그는 부여받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지만, 아무나 아무 때나 그곳에 침범하여 그의 머리 위로 우유를 쏟아 붓는다. 이때 그에게 교실이라는 공간은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는 곳이 된다. 이렇게 되면 그곳은 한 사람에게 주어진 권리로서의 자리, 가치가 담긴 장소가 아니라 안전과 존엄이 위협받는 곳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뿐 아니다. 가해자들은 교실 밖 강당, 건물 뒤, 학교 곳곳에서 도무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동은에게 위해를 가한다.



더 높이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같은 반 학생을 괴롭히는 걸까? 이 드라마는 복수를 위해 교사가 된 문동은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 이 교실에서 다음 세 가지는 아무 힘도 없을 거야. 부모의 직업, 부모의 재력, 부모의 인맥. 그리고 다음 세 가지는 꼭 지켜줬으면 해. 더 좋은 옷,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에 산다는 이유로 친구를 괴롭히지 말 것



부모의 권력, 재력, 인맥을 바탕으로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끼고 싶어서, 그것들을 가지지 못한 대상을 찾아 끔찍한 폭력을 행사하는 이는 그 역시 ‘우월 컴플렉스’를 가진 열등한 존재일 뿐이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는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항상 우월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상태를 우월 컴플렉스라고 했는데, 정도가 심한 경우 일종의 정신병리적 상태로 보았다.


인간 사회에서 우월과 열등은 '위와 아래'라는 위치와 방향성 즉, 공간 감각을 반영하고 있다. 더욱 더 높아지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이 적절히 다스려지지 못하면, 끊임없이 자신보다 더 낮은 존재를 찾아 밟고 올라서려 하게 된다. 이때 욕망의 주체는 가해자가 되고, 자신의 적절한 위치감을 상실한 채 정신질환자가 되어버린다. 슬프지만 학교도 하나의 작은 사회라서 이 '높이에 대한 감각'이 작동하는 곳이다. 심지어 아주 아프고 혹독하게. 아직 채 자라지 못하기도 했고, 필터 없이 부모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도 있어서 더욱 그렇다.


그런데 정말 박연진(임지연)이 더 높은 자였나 생각해보면, 이 상대적인 위치의 감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 싶다. 그들을 보는 시청자 우리는 그 높이감에 동의할 수 없다. 저 혼자 자신을 위에 두고 아래로 누르는 힘을 쓰고 있는 그에게, 아래를 보라고, 니가 있는 곳은 사실 허공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어 부들거린다. 높이 오르고 싶은 마음은 죄가 없다. 그건 어쩌면 땅을 디디고 하늘을 향해 직립해 있는, 지구라는 공간에 사는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만, 더 높아진다고 할 때 '무엇보다 더'인지가 중요하다. 결국, 산에 오르는 건 나다. 내 안의 한가운데를 콕 집어 기준 삼은 뒤, 나를 데리고 내가 오를 때 나는 높아지는 것이다. 나의 근육을 써서 힘차게 도약해야 높아지는 것이지, 누군가를 밟고 그 위에 올라선다고 높아지는 것이 절대 아님을, 우리는 드라마 속 그들을 보며 다시 한 번 배운다.


<더글로리> 스틸컷



나아감을 방해받는 것 –학교에 갇힌 자


학창 시절은 성장기이다. 이 시기는 성인이라는 목표점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상태에 있다. 지적인 성장 뿐 아니라, 심리적, 사회적 성장이 일어나는 시기이다. 그래서 우리는 졸업이란 문을 열고 조금 더 너른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비유하곤 한다. 학교라는 한 공간의 밖으로 나간다는 의미에서 공간의 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성장의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공간의 이동, 이것은 존재의 확장과도 닿아 있다. ‘너른 세상으로 나간다'는 관용적 표현은 이를 잘 나타내준다.


그러나 <더 글로리>의 문동은은 그 안에서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시간은 흘렀어도, 학교를 마치고 확장된 세계로 나오지 못한 채 여전히 그곳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그는 연진과 주변 인물들로부터 아무 이유 없이 폭행과 겁박을 당했다. 도움을 청했던 담임은 마땅히 학생을 보호해야할 책임과 의무를 져버리고 오히려 그를 탓하고 심지어 폭행까지 한다. 이 경험들로 인하여 그에게 학교는 성장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닌, 증오를 키우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증오는 긴 시간이 쌓여 자라난다. 우리는 살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부정적 경험을 하더라도, 어느 한 자리에서 올라 온 작은 싹 하나가 잠시 쉬어갈 틈을 내어주면 그런대로 버티며 갈 길을 간다. 매순간 행복하고 만족하지 못해도 대체로 그렇게 살아간다. 학창 시절은 부모나 형제가, 아니면 학교에서 혹은 학교 밖에서 만난 친구들이 그런 싹이 되어주어야 하는 시기이다. 하지만 그 모든 싹이 다 말라 버린 채로 이유 없는 폭력에 홀로 노출된 동은에게 자라날 것은 증오뿐 아니었을까. 성장의 시기에, 성장의 장소에서 성장은 멈추어버렸고, 컴컴한 암흑의 학교에 갇혀버리게 된 것이다.


그는 자퇴를 했고 몸은 학교라는 공간을 벗어났지만, 삶을 누리는 자 대신 복수를 준비하는 자가 되었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교사가 되고, 연진의 남편에게 접근할 목적으로 바둑을 배우는 등 최선을 다해 복수를 준비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자신의 삶을 뚜벅뚜벅 살아가는 모습은 아니었다. 나는 그런 그가 마치 손발도 움직이지 못할 비좁은 공간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래로 내리 누르는 비정상의 힘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갇혀 버린 것처럼 보였다.


<더글로리> 스틸컷



원점에서, 열 아홉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다


<더 글로리> 시즌2에서 결국 동은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복수를 이룬다. 작가는 원점’이라는 말로 동은의 해방을 이야기한다. 극중에서 연진의 남편 하도영은 동은 곁에서 함께 칼춤을 추어주는 주여정에게 묻는다. 동은을 아낀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을 멈추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는 대답한다. '피해자들이 잃어버린 것 중에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영광(더글로리)과 명예뿐이고, 그걸 찾은 다음에야 동은의 열아홉 살이 시작된다고, 자신은 그 원점을 응원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덧붙인다. ‘그가 지금보다 덜 불행하길 바란다'고. 복수를 선택한 동은이 복수에 성공한다고 해서 이전 삶과 완벽히 단절되고 완전한 해방을 맞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갇힌 곳에서 나와 평범한 삶이라도 시작하는 것, 그것을 돕고 싶다는 뜻으로 들렸다. 결국 동은은 과거에서 벗어나 원점에 섰다. 열여덟 살에 멈추어 있던 그의 인생 시계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초침부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출발은 원점을 전제로 한다. 방향을 정하고 움직이기 직전에 서있는 곳이 원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해방이 시작된다. 그는 같은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던, 죽은 소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비로소 시간이 흘러가 소희야.
축하해. 너와 나의 열아홉을

<더글로리> 스틸컷




지금 이 시간에도 성장기의 어린이,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들이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인 학교. 그 교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비틀린 높아짐을 위해 누군가를 누르지 않는, 성장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친구의 길목을 가로막지 않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자기 안쪽 중심에 '기준점'을 잘 놓아두고, 위로 앞으로 즐겁게 오르고 나아갈 수 있기를, 아무도 혼자 교실에 갇히지 않고 졸업 이후의 삶과도 이어져 흐르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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