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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a Jul 18. 2023

나의 걷기 고백록

'건강앱' 걸음수로 측량할 수 없는 것들 ㅣ2023년 3월

며칠 전 지인들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각자 휴대폰 속 건강 앱을 열고 지난 한 주의 걸음 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이 걷는 사람은 매일 만 걸음 이상을 걷는다 했고, 하루종일 집에 있는 날에는 150걸음도 채 못 된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숫자들 속에서 문득 나의 걷기 생활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집에서 걷다 feat. OTT


내가 매일 걸음 수를 확인하기 시작한 건 코로나19로 강제 집콕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였다. 어쩔 수없이 나는 집 안에서 걸었다. 집에서는 직선거리로 몇 걸음 나오지 않으니, 벽을 따라 집을 크게 돌았다. 하지만 그렇게 걷는 일은 지루했다. 평소 멍 때리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하기를 잘 하는 편인데도, 어쩐 일인지 그렇게 걸을 때는 생각이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쳇바퀴 돈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지루함을 견뎌보기 위해 유튜브를 여러 개 구독했다. 앱으로 바로바로 늘어나는 걸음 수를 계속 확인하면서, 숫자가 채워지는 재미 덕도 조금 본 것 같긴 하다.


집에서 걷는 길 /사진  Vena


생각해보면 코로나 전에도 사람들은 이런 걷기를 했다. 헬스장 런닝머신 위에서 걷고 달리는 일은 현대인에게는 제법 익숙한 일이 됐다. 냉난방 시스템으로 실내온도가 조절되고, 늦은 밤에도 환한 조명 아래에서 걸을 수 있다. 아무리 많이 걸어도 공간은 최소한만 써도 된다니. 좁은 도시의 바쁜 생활자들이 말 그대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히 몸의 운동과 벌크업을 하기에는 아주 훌륭하다. 게다가 우리에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해줄 OTT들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쩐지 나는 이 걷기에 재미를 붙이기가 어렵다. 어쩔 수 없이 집 안을 돌던 일도 너무 지루했던 나머지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았고, 이제는 다시 하게 되지 않을 것 같다. 대신, 나는 걷기 위해 바깥으로 나간다.



어린 시절의 혼자 걷기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걷는 것을 좋아했다. 다니던 국민학교가 집에서 먼 편이어서 매일 20분씩 왕복 40분을 걸어야 했다. 걷다 보니 익숙해졌고, 심심하거나 답답할 때는 자연스럽게 신발을 신고 나가 어디로든 걸어갔던 것 같다. 내가 어릴 적에는 지금처럼 금쪽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어른들이 별로 없었다. 그저 굶기지 않고 따뜻하게 옷 입히면 대충 좋은 부모라 생각했던 시절이어서, 어린 아이의 혼란스러운 마음이란 것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야 했다. 그럴 때 나는 걸을 수 있었고, 요즘처럼 아이의 안전에 대한 단속도 철저하지 않았던 때라, 아무 때나 아무 데로나 걸어갔다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함께 조잘거릴 친구도 없이 걷는 일이 그저 좋았던 나는 철학자 루소의 말처럼 걸으면서 ‘나의 영혼을 속박에서 풀어주고, 사유에 더 많은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나를 존재들의 광활한 바다에 빠지게’ 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루소의 이야기에서 떠오른 건 이런 느낌이다.

집을 나서는 순간, 나는 세상으로 들어간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나의 몸은 나를 감싸고 있는 공기를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건 공기의 저항에 맞서기 위해 힘을 쓰는 일이다. 내가 힘을 내고 있음이 느껴진다.

동시에 나의 발이 땅을 딛는 것 역시, 나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공기와 땅과 만난 내 몸으로 공간을 열어젖힌다.

그러니 나는 힘 있는 사람이 된다. 엄한 대상을 향해 힘을 쓰지 않아도, 나의 힘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나는 고양(高揚)된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열린 공간과 만나 이루어지는 성장이다. 아마도 어린 시절 나의 걷기는 그렇게 나를 자라게 하지 않았을까.


어릴 적 걷던 길의 느낌과 닮은 길이다 /사진 ig ph_t_graph.07



집 앞 거리를 걷다


오늘 아침에도 집을 나서서 길을 걸었다. 몇 개의 건물을 지났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길 건너의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 거리에서 보기에는 아직 봄눈이 보이지는 않았다. ‘남쪽 동네에는 벌써 목련이 피었다던데, 다음 주 정도면 여기도 꽃을 볼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들른 집 앞 편의점에는 처음 보는 알바생이 있었고, 버스 정류장에는 나처럼 버스를 기다리는 서너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아직 한 겨울 패딩을 입은 사람도 있고, 벌써 밝은 크림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사람도 있었다. ‘저 옆에 서 있는 목련나무에 꽃이 활짝 피면 저 코트색과 비슷하겠네’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머지않아 곳곳에 꽃나무들이 만들어내는 봄의 그림을 볼 수 있을테니 말이다.


나만큼이나 걷기를 좋아하는 것 같은 작가 리베카 솔닛은 우리가 열린 공간에서 걸을 때 ‘몸의 움직임’‘눈의 볼거리’가 만나 ‘마음의 움직임’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래서 걷는 일은 ‘모호한 일이면서 동시에 무한히 풍부한 일’이 된다.


매일 걷는 집 앞길에는 건물들, 횡단보도, 신호등, 정류장 등 도시의 시설들이 거의 항상 같은 모습으로 있다. 하지만 그곳을 걸어서 지나는 나는 매번 조금씩 다르다. 기분, 생각, 그리고 몸 컨디션 등이 한 번도 같은 순간이란 없다. 그뿐 아니다. 길 위에서 만나는 자연과 사람들도 매번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같은 공간을 걷고 있지만, 매번 다른 마음의 움직임이 우리를 찾아온다. 예측할 수도 없고 결코 반복되는 일이 없다. 모호한데 풍부하고, 모호해서 더 풍부하고 무한해서 더 매력적이다.



epilog 걷기와 사색


매일의 걸음 수를 안다는 것이 가져다주는 유익이 꽤 되는 것 같다. 너무 오래 걷지 않고 있는 나를 움직이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존재다. 하지만 각종 OTT에서 흘러나오는 화면을 보며 하루의 걸음 수를 꽉 채운다면, 인생의 어떤 재미와 의미는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걷는 일에 대해 사유한 18세기 사상가 루소의 말은 그런 내게 밖으로 나가서 걸으라고 말해준다.


나는 걸을 때만 사색할 수 있다.
내 걸음이 멈추면 내 생각도 멈춘다.
내 두 발이 움직여야 내 머리가 움직인다.
-루소 <고백록>

곧, 봄날의 산책을... /사진 YJ_C

<세상의 모든 문화> 공간 인문학 산책 연재글

나의 걷기 고백록_공간인문학_김근영

https://maily.so/allculture/posts/d1ea5b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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