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난 약속장소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약속장소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여유를 두고 걸어가기로 했다. 집에서 빠른 걸음으로 20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난 걷는 걸 유난히 좋아한다. 좋아할 뿐만 아니라 걸음이 무척 빠른 편이다. 경쟁심이 유난히 강하다거나 성격이 급한 것도 아닌데 걸을 때 앞에 누군가 있으면 기필코 따라잡아 앞지르고 나야 속이 후련한 편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내 걸음에 다 따라 잡히고 마는데 나만큼 걸음이 빠른 사람을 잘 보지 못했다, (어렸을 때 공부를 그렇게 잘했더라면....)
남편과의 산책도 좋아하는데 우리 부부의 산책하는 모습은 여느 사람들이 하는 그것과는 모습이 많이 다르다.
내가 빨리 걷는 걸 좋아하는 탓에 남편과 나란히 걷지를 못한다. 내가 앞서 갔다가 되돌아오기를 여러 번 반복 해야만 남편과 보조를 맞출 수 있다.
"좀 빨리 걸으면 안 돼? 그런 느린 걸음은 전혀 운동이 되지 않는다니까!"
그러면 남편은 말한다.
"난 운동 나온 거 아닌데, 그냥 산책 나온 거야. 동네 풍경 구경도 하고."
"그래도 이왕 나왔으니 운동도 하면 좋잖아."
난 앞서갔다가 다시 돌아와 남편을 끌었다가 따라오지 않는 남편을 두고 다시 앞서 가기를 반복한다.
그렇듯 난 걷는 걸 좋아하고 빠르게 걷는 걸 특히 더 좋아한다.
그날도 약속장소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남편도 없이 혼자 걷는 걸음이니 느리게 걸을 이유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들이라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렇게 약속장소에 도착하면 지인들은 당연하다는 듯 모두 물어본다.
"오늘도 걸어왔어?"
"당연하지."
그만큼 내가 걷는 걸 즐긴다는 걸 주변의 지인들도 모두 잘 알고 있다.
모임은 기대만큼 즐거웠다. 오래만의 수다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다음날 위층에 사는 친한 친구(10여 년을 같은 아파트에 살고 나이도 같다 보니 부부가 모두 친한 사이가 됐다)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너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라니?"
"그게 우리 남편이 너 봤대."
"날? 어디서?"
"여기 앞 사거리에서 신호 기다리다가 횡단보도에 서있는 널 봤대."
"그랬대?"
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남편이 너 화가 많이 나 있더라던데?"
"화? 아닌데."
"너 엄청 화가 난 얼굴로 꼭 누구랑 싸우러 갈 것처럼 횡단보도에 서있더래. 그래서 아는 척도 못했다고."
순간 난 웃음이 났다.
물론 난 화가 나지도 않았고 누구랑 싸울 일은 더더구나 없었다. 단지 횡단보도 신호등이 좀 길다라고 느끼며 서 있었을 뿐이다. 오히려 그때 내 기분은 최상이었다.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니었던가.
난 전화를 끊고 거울을 봤다. 어제 횡단보도에 서있었을 때를 생각하며 무표정한 얼굴을 만들었다. 그런데 정말 거울 속 내 모습이 화가 나 있었다. 눈은 치켜떠 있었고 댓 발 나온 입꼬리는 화가 난 듯 아래로 쳐져있었다.
예전에 요가 수업을 할 때 강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여러분! 평소에 제발 미소 좀 짓고 있어요. 무표정한 얼굴은 자칫 화가 나보이기도 하고 그런 화가 난 표정은 1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해요. 그러니 평소에 미소를 짓는 연습을 하세요."
그러니 웃자! 괜히 히죽히죽 웃다가는 주변 사람이 이상하게 볼 수도 있으니 가볍게 미소라도 짓고 살자. 어려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난 거울을 향해 씩 하고 웃어보았다. 정말 어려 보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