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명절에도 친가인 대전을 다녀왔다.
우리 할아버지는 올해로 94세이신데, 6.25 전쟁 때 귀를 다치셔서 청력이 엄청 안 좋으시다.
대화 한 번을 하려고 하면 '고요 속의 외침' 게임을 하는 것처럼 할머니가 고함을 지르셔야만 했고, 그 과정이 지치다 보니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자연스레 줄게 되었다.
평소 통화를 할 때는
"그래. 잘 안 들린다. 할머니 바꿔줄게."
찾아뵐 때도 "왔니? 그래. 건강해라."라는 인사 정도가대화의 전부였다.
그렇다고 해서 할아버지가 차갑거나 엄한 분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외출할 때면 신발장에서 할머니 신발까지 같이 꺼내주신다거나
손녀인 우리가 잠들어있을 때 이불을 덮어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빠의 다정함은 할아버지에게서 왔구나 짐작하곤 했다.
그래도 "식사하세요! 식사요! 식! 사! 밥! "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쉽지 않으니 할아버지는 우리들의 소통에서 종종 소외되곤 하셨다.
그러다 이번 설에는 할아버지와 다른 방식으로 소통을 시도해 보았다. 갤럭시 탭에 글씨를 크게 써서 필담을 나누는 방식이었는데, 전자탭의 특성상 글씨가 잘 안 보이면 바로 확대할 수도 있고, 지우는 것도 편리하고, 할 말이 많아져도 글자를 무제한으로 쓸 수 있어
잘 안 들리는 할아버지와의 대화에 안성맞춤이었다.
"20분 후에 초밥 배달 올 거예요."로 시작한 대화는
"할아버지, 서예 멋져요!"
"장학금 받았어요!"
"언니는 올해 외국에 가요."
"할아버지가 그림을 잘 그리셨다고 들었어요."
등등의 다양한 주제의 대화로 이어졌다.
분명 이전에 가족끼리 공유한 내용이었는데도
할아버지는 처음 아신 듯한 정보가 많아 보였다.
잘 들리지 않으셨던 탓인지 정확한 내용을 모르고 계신 듯했다.
우리 가족의 크고 작은 소식을 전해드리니 손뼉을 치며 좋아하시기도 하셨고, 할아버지를 칭찬하는 내용에는 "내가 옛날에는 ㅇㅇ 극장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도 썼었지" 하며 옛날의 추억을 말씀해주시기도 하셨다.
오래간만에 웃음꽃이 피었다.
심지어 할아버지는 지금 복용하고 계신 약 종류가 너무 많다며 직접 약상자를 꺼내 우리에게 보여주시기까지 하셨다. 사실 그렇게까지 대화에 적극적인 할아버지의 모습은 여태 본 적이 없어 낯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동안 할아버지도 가족들과 대화하고 싶어 하셨고, 충분히 대화할 수 있는데 방법이 어렵다는 이유로 할아버지의 소통 기회를 빼앗아버린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후회와 미안함이 몰려왔다.
할아버지와 우리의 대화는 느린 대화였다.
우리가 갤럭시 탭에 한 자 한 자 글씨를 다 쓸 때까지
할아버지가 기다려주셔야 하고, 우리가 쓴 문장을 할아버지가 완전히 이해하실 때까지 우리가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서로를 기다리는 느릿한 대화를 하며 할아버지와 마음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이번 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것 같다.
할아버지께서
"이젠 삶에 낙이 없다. 먹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재미가 없다."라고 하셔서
내가 "증손주 보실 때까지 사세요!!" 라고 적어 보여드리니 할아버지가 활짝 웃으시며 허허허 크게 웃으셨다. 아빠도 할아버지가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모습을 처음 본다고 했다.
이번에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쓰며 느리게 전한
우리의 마음과 소망이 할아버지 인생의 낙이 된다면 정말 좋겠다.
P.S. 할머니한테도 할아버지께 한마디 하시라고 갤럭시 탭을 드렸다.
한 자 한 자 정성껏 적으시는 할머니.
"여보 사랑해?"
"여보 건강하세요?"
뭐지?
뭐지?
"영감님! 말 잘 들어요!"
(2023.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