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카이밥] 아름다운 뒷모습, 그리운 얼굴들

<마음 따라 발길 따라 미국 여행> 미국 그랜드 캐년

by Kyrene KM

▲ 그랜드 캐년, 노스 림(North Rim, Grand Canyon) 가는 길 © Kyrene KM 2025






일상의 삶도 그렇지만 특히 여행 중 예상치 못한 곤경에 처하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난감한 일이다. 특별한 선물을 받고 오랜만에 다시 미국 서부여행을 계획했다. 이른 아침 브라이스 캐년(Bryce Canon)의 상쾌한 가을공기와 청명한 하늘을 벗 삼아 그랜드 캐년(Grand Canyon) “노스 림(North Rim)”으로 향한다.


남쪽으로 2시간 거리에 카이밥 인디언 보호구역(Kaibab Indian Reservation, Kaibab, AZ)이 있다. 보호구역 동쪽에 위치한 프레도니아(Fredonia)에서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의 22번 도로(Ryan Road, Route 22)를 따라 라이언(Ryan)으로 향하는 길은 차량도 인적도 드물다.


20251026_101950-cp-1.jpg ▲ 카이밥 인디언 보호구역(Kaibab Indian Reservation) → 라이언(Ryan) 가는 길 © Kyrene KM 2025


워낙 규모가 큰 이곳 국립공원은 선택한 입구에 따라 사뭇 다른 모습의 경관을 보여 준다. 노스 림 지역의 방대한 부분에 안타까운 흔적이 남아있다. 키가 큰 나무의 상당수가 새까맣게 불에 타고 선 채로 죽어 있다.

놀라운 것은 초록의 새 생명이, 불타버린 검은 대지 위를 점점 덮어가고 있는 것이다. 애처로운 마음과 생명의 신비가 겹쳐지는 순간이다.


20251026_100117-cp-1.png ▲ 카이밥 고원(Kaibab Plateau) 정상, 화재 현장 © Kyrene KM 2025


내비(Navigator) 화면에 목적지 입구가 보이는데 갑자기 엉뚱한 안내 멘트가 나온다. 잘 정비된 포장도로를 떠나서 우측으로 보이는 비포장 도로로 인도한다. 의심스럽긴 했지만 이쪽 길은 초행(初行)이라 지금껏 가이드를 잘 해 왔으니 내비의 안내를 따르기로 한다. 입구는 평범한 비포장도로 같았지만, 들어갈수록 날카로운 자갈길에 위험할 정도로 경사가 심하고 점점 험난하다. 오프로드(Off Road) 차량이 가기도 벅찰 만큼 비포장 도로가 아니라 아예 길이 닦여 있지 않은 산속이다.


20251026_102941-cp.png ▲ 그랜드 캐년, 산림도로(Forest Service Road) 입구 비포장 길 © Kyrene KM 2025


이른 아침부터 어두운 밤이 되기까지 보낸, 오늘 하루가 꿈인 듯 현실인 듯 아득하기만 하다. 지금껏 자동차와 함께한 수십 년 동안 한번도 경험하지 않은 일이다. 불과 몇분 전에도 오늘의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안내 멘트에 따라 20여 분 동안 인적 없는 비포장 숲길 주행 중, 차량 공기압(空氣壓) 계기판에 타이어 공기압이 빠진다는 메시지가 나타난다. 계속 공기압이 낮아지고 있었지만 타이어 상태를 확인해 보니, 외견상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곧이어 그 예상치 못한 난감한 상황에 직면한다. 순식간에 휴대폰도, 휴대폰과 연동된 내비도 먹통이 되어버린다. 계기판의 공기압 숫자는 '0 psi'를 보이고 있다.


20251026_105347-cp-1.png ▲ 차량 공기압 계기판 © Kyrene KM 2025


과거 해외여행에서는 언제나 출발 전에 지도를 활용해 행선지(行先地)에 도착하는 세부경로를 확인하였다. 내비가 일상화된 후, 이에 의존하게 되고 지도는 더 이상 휴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번 미국 서부여행에서도 전적으로 내비에 의존하여 여행길에 나섰다.


막상 내비와 인터넷이 작동되지 않으니 목적지에 대한 상세한 경로와 정보를 확인할 수 없고, 게다가 산길을 따라 이어지던 통로가 갑자기 끊기기도 하고 갈래길이 나타날 때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난감하다. 비포장 좁은 자갈길 끝이 갑자기 급경사 낭떠러지로 돌변한다.


20251026_105844-cp-1-Half.png ▲ 자갈길 끝, 낭떠러지 바로 앞 © Kyrene KM 2025


급경사를 오르내리는 산길을 따라 간신히 노스 림으로 향하는 관리소(Entrance Station) 근처에 도착한다.

공기압 '0'인 상태에서 겨우 도착했으나, 타이어 하나는 완전히 주저앉아 더 이상 주행이 불가하다.


20251026_111621-cp.png ▲ 돌밭길 주행 후 주저앉은 타이어 © Kyrene KM 2025


산림도로 끝자락 출입구 주변은 철조망과 통나무로 막혀 있고, 양쪽 콘크리트 기둥 사이에 설치된 철제 바리케이드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바로 앞은 조금 전 우리가 향하던 포장도로(Grand Canyon Highway)와 연결되어 있으나, 차량은 주행 불가하고 출입구 주변이 봉쇄되어 이곳을 벗어날 방법은 찾을 길이 없다.


20251026_154806-cp-Half.png ▲ 폐쇄된 산림도로 입구 © Kyrene KM 2025


철조망을 겨우 넘어 도로 가운데 위치한 공원 입구 관리소에 도착했으나, 연방정부 폐쇄(Shutdown)로 문은 잠겨 있고 직원도 보이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오늘은 일요일, 휴일이라 차량정비소도 영업을 쉴 테고 휴대폰은 먹통이니 외부와 통화도 단절이다.


20251026_154659-cp.png ▲ 텅 빈 ... 노스 림 입구 관리소 © Kyrene KM 2025


한참 동안 하염없이 막연하게 기다리던 중 차량 한 대가 다가온다. Help me! 를 연발하며 두손을 마구 흔들어 구조(!) 요청을 하였지만, 차량은 이미 저만큼 멀어져 간다. 다행히 잠시 후, 차가 멈추고 노부인이 내리고 이어서 노신사가 차에서 내린다. 우리의 난감한 상황을 듣더니 철조망을 넘어와 우리 자동차를 확인하고 다시 자신의 차로 돌아가, 휴대형 타이어 공기주입기를 가져와 공기 주입을 시도해 보지만 별무소용이다.


아이다호(Idaho)에 살고 있는 노부부는 트레킹 여행 중이라 한다. 5마일 정도 거리에 로지(Lodge)가 있는데, 그곳에 가서 해결책을 찾자고 제안하며 그곳까지 라이드를 해주겠다고 한다. 캐리어 등을 우리 차에 남겨 놓은 채 로지(Lodge)에 도착하자 노부부는 가던 길을 가지 않고 우리와 함께 로지로 들어간다.


20251026_121634-cp-1-Half-1.png ▲ 도움을 받은 로지(Lodge) 전경 © Kyrene KM 2025


우리가 처한 상황을 우리보다 더 적극적으로 로지 근무자에게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이곳도 휴대폰 사용이 불가하다고 한다. 스타링크(Star Link) 전화를 이용하여 지역의 미케닉(Mechanic)에게 연락했지만 타지역에 출장 중이어서 도착하려면 2~3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노부부는 작은 기념품을 사고 물건값 지불 후 상당 금액의 거스름돈을 받지 않고, 우리를 도와준 직원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며칠 후 여행일정이 겹치는 곳에서 재회(再會)를 기약하며 그들은 다음 여행지로 떠났다.


미케닉이 도착하여 함께 차량을 타고 우리 차에 도착하니, 몇시간 전에 굳게 닫혀 있던 관리소 옆에 순찰차와 무장(武裝)한 공원 레인저(Ranger) 몇 명이 보인다. 그간의 상황설명을 하였지만, 열쇠를 갖고 있지 않아서 그 끔찍한 비포장 산길을 다시 돌아 나가라고 안내한다. 차량과 도로상태 등을 참작하여, 20분 정도 기다릴 테니 시도해 보고 불가하면 다시 찾아오라 한다. 차창에 국립공원관리청(National Park Service)의 빨간 관찰 통지서가 붙어있다. 우리가 자리를 비운사이에 다녀간 모양이다.


20251107_134004-cp-1-2-4x3-3.png ▲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ational Park Service) 관찰 통지서 © Kyrene KM 2025


스페어 타이어로 교체하고 다시 급경사 돌밭 언덕을 간신히 운전해서 안내받은 도로를 찾아 돌아 나온다. 미케닉이 트럭을 타고 역코스로 우리쪽으로 오겠다고 한다. 유사시(有事時)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함께 있어 준다는 말이 큰 위안이 되었다.


우리를 도와준 로지로 함께 돌아와 로지 직원의 친절에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미케닉에게 수리비와 정산절차를 헙의하였으나, 이미 관리직원에게 사례했으니 자신의 노동과 도움은 도네이션 한다며 한사코 수리비를 사양한다. 미케닉의 선(善)한 주장에, 우리도 완강하게 수리비용 지불 의사를 표명(表明)하고 처음 약속했던 전액을 지불하였다. 곁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관리직원도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스페어 타이어로는 50마일 이하의 속도로 최대 1시간 정도 주행이 가능하다 한다. 호텔까지 2~3시간을 더 가야 하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다. 괸리직원의 자세한 경로 설명과 제공해 준 지도를 참조해 깜깜한 사막평원을 40마일로 운전하여, 달과 별이 안내하는 늦은 밤에 안전하게 우리의 다음 목적지 호텔에 도착하였다.


20251107_133611-cp-4x3.png ▲ 노스 림(North Rim) → 패이지(Page) 안내 지도 © Kyrene KM 2025


오늘의 도움은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이 소중하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차량과 캐리어를 모두 버려둔 채 도로를 걸어 나와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다행히 어떤 이의 도움을 받아 함께 여행짐을 옮겨서 근처 로지에 하룻밤 머무른다고 해도, 다음날 차량 정비에 수반되는 불확실한 수리기간과 일정변경 등에 따른 그 이후 수 많은 끔찍한 상황은 생각조차 하기 싫다. 노스 림 방문은 우여곡절 끝에 입구에서 푯말만 확인하고 돌아왔다.


타이어 수리를 마치고, 며칠 후 세도나(Sedona)로 향했다. 날씨는 화창하고 따스함이 느껴진다. 남쪽은 여전히 가을이 한창이다. 우리가 머문 숙소 주변 풍경도 온통 사막의 붉은색이다. 맑은 공기, 푸른 하늘, 온화한 날씨, 독특하고 아름다운 풍광, 여유로운 환경,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20251026_095945-cp.jpg ▲ 세도나의 가을 풍경 © Kyrene KM 2025



20251028_140506-cp-1-Half.png ▲ 세도나의 휴식 © Kyrene KM 2025


세도나 여행 중 시내에 분위기 좋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어서 우리에게 도움을 준 노부부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여행담(旅行談)과 살아 온 얘기 등을 나누고 그들의 선한 손길에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전했다. 서로의 생활 터전에 방문 기회가 생기면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며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20251028_194435-cp-1.png ▲ 세도나, 이탈리안 레스토랑 © Kyrene KM 2025


철조망 속의 우리를 구출한 노부부, 적극적으로 차량수리 방법을 찾아 준 로지 관리직원, 전문적 작업 제공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미케닉, 무단 주차 관련하여 고의적인 불법행위(Torts)가 아님을 인정해 준 레인저, 이번에 만난 고마운 사람들이다. 이들과 나눈 모든 대화는 우리에게 천사들의 합창이었다. 그날은 Thanks God! Lucky day! 그러나 다시는 NEVER! 이렇게 또 나눠야 할 선행(善行)의 빚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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