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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rene Apr 01. 2024

쏟아 버린 말 주워 담기

<삶의 한 순간을 - 함께 사는 세상> 이해와 배려

 확신에 찬 옳은 소리  © Kyrene





한번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누군가의 귀와 가슴 한구석에 단단히 틀어 박혀 어느 순간 무기로 되살아나 사람을 다치게 한다.

한 점 오류 없는 확신에 찬 옳은 소리가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된 경우 그 말을 듣는 이를 지독하게 억울하게 만들고 만다.


잘 못 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진심을 다해 즉시 용서를 구해보지만 켜켜이 쌓여가는 작은 흔적들을 말끔히 지워버릴 수는 없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드시 필요한 식재료가 몇 가지 있다. 각종 견과류, 차를 끓이는 다양한 재료, 샐러드용 채소, 과일과 시드(Seed)류가 그것이다. 소분해 넣은 시드 한 종류가 바닥을 보여 다시 채우려고 아무리 찾아도 행방이 묘연하다. 번들(Bundle)로 구입한 대용량의 식재료를 일정 장소에 보관하는 일은 남편의 몫이다.


나: 시드 어디에 있는지 못 찾겠어요.

남편: 저기 있을 거야, 찾아볼게요.


사용 빈도가 낮은 물품들을 보관해 놓은 작은 방으로 들어간 남편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가만가만히 들여다보니, 무거운 박스를 일일이 들어내 옮기며 박스마다 확인 작업을 하고 있다. 중노동을 하고 있는 남편이 안타까우면서도 순간 짜증이 올라온다. 


남편의 성격은 지나치게 꼼꼼하고 모든 일에 치밀한 계획이 우선한다. 덕분에 나는 가족건강관리와 가정경제를 포함한 어떤 일에도 사전에 의견제시 만 할 뿐 실행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일상이 너무도 편안하고 만족스럽다.


그런데, 아주 사소한 한 가지는 늘 마음 상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우리 집 물품보관 박스에는 예외 없이 번호가 적혀있고, 그 번호에 따라 내용물이 기록된 리스트가 존재한다. 문제의 시작은 리스트를 작성할 때마다 불거진다.


나: 목록을 적을 때는 작은 것 하나도 빼지 말고 낱낱이 적어 넣어야 나중에 찾기가 쉬워요.

남편: 대표적인 것만 기록해 두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나: 포장할 땐 기억할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절대 못 찾아요.

남편: 걱정 놓으세요, 내가 다 알 수 있다니까.


기존의 박스를 비우기도 하고 새 박스를 만들면서 늘 나누는 대화내용이다.


나: 그래도 박스를 만드는 즉시 번호를 쓰고 내용물을 하나하나 적는 것이 좋을 텐데 …

남편: 알았다고요, 뭘 그렇게 신경을 써, 머리 아플 텐데.


대화는 여기서 중단되지만, 우리 둘 다 이미 마음이 불편해진 상태라는 것은 숨길 수 없다. 다행히 잠시 후 이 장면을 벗어나면 그냥 일상적인 상황으로 돌아오곤 한다.


한 참이 지난 후 남편이 빈 손으로 작은 방을 나오더니,


남편: 아무리 찾아도 없는데? 상당량을 포장한 기억이 있는데 말이지.

나: 그러니까, 내가 몇 번을 말해요, 낱낱이 적어야 된다고!


내 말이 옳았다는 확신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조목조목 따지고 있다.


남편: 그러게.


이렇게 의기양양하게 마무리를 하고 몇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소파에 앉아서 시드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

나: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을 수 있을까?

남편: 언젠가는 나오겠지, 다시 구매하지 뭐.


순간,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용수철처럼 튀어나가 부엌에 있는 저장고 문을 열어본다.

아니나 다를까, 볶아 놓은 곡물, 다크초콜릿과 함께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드 봉지.


온갖 장면이 속도를 높이며 스쳐 지나간다.

- 박스에 넣어 놓은 것들이 왜 여기에?

- 누가 여기에 넣어 둔 거지?

- 분명히 박스 포장을 했는데 …?


우리는 애들처럼 하이파이브를 하고 보물 찾기를 한 듯 기분이 좋다.

남편/나: 우리가 이걸 언제 넣었지? 그러게 말입니다.


나는 얼른 장난스럽게 허리를 굽혀 배꼽인사로 사죄를 한다.

나: 죄송합니다. 박스 옮기는 중노동을 하게 해서 …

남편: 별말씀을, 덕분에 운동 잘했습니다.


▲ 민망함은 나의 몫


웃어 넘기기는 했으나, 박스에 있지도 않은 물품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인 아내의 잔소리를 고스란히 들었던 남편은, 많이 서운하고 억울할 것 같다.


나는 매번 다짐을 하면서 늘 후회를 한다.

‘조금 더 참고, 조금 더 기다리고, 다시 한번 생각한 후에 말하고 행동하자’ 해 놓고 상황이 닥치면, 팩트를 따지고 성급한 결론을 내린다. 그다음은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한 동안 마음이 무겁다.

그리고 또 후회를 하고 또다시 다짐을 한다.

‘한 템포만 늦추자, 여유를 갖자.’


남편은 한결같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고.

쏟아 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 쌓여 있을 작은 흔적들이 정말 괜찮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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