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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rene May 09. 2024

[어떤 사람의 페르소나] LP판의 추억

<우리 이렇게 삽시다 - 공감과 배려의 삶>

▲ 추억의 턴테이블  © Kyrene






젊은 날, 책과 꽃과 음악이 내 전부인 때가 있었다. 축음기, 전축이라는  단어가 오디오시스템(Audio System) 보다 익숙한 시절에 엄마 덕택에 클래식음악(Classical Music)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나팔 닮은 스피커, 검붉은 체리 빛 여닫이 문 속에 귀하게 자리한 전축은 그리운 추억의 한 부분이다.


첫 번째 공부를 마치고, 꼭 한번 살아보고 싶은 도시에서 혼자 사는 삶이 시작된다. 기대하기 어려울 만큼 합격이 꽤 힘든 과정인데 감사하게도 내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대학캠퍼스 근처에 우선 방을 구하고, 신학기의 설렘과 대학 새내기들의 싱그러운 분위기에서 한 달을 보낸 후 첫 봉급을 받았다.

지금 젊은이들에겐 옛날이야기이겠으나 그때 봉급은 현금을 봉투에 넣어 지급되던 시기이다. 봉투에는 조목조목 급여명세도 적혀있다. 


교육공무원 봉급이 풍족한 수준은 아니지만 기본 생활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돈은 LP판을 새로 구입하는데 쏟아 넣었다. 지니고 있던 여윳돈으로 아담하고 예쁜 오디오시스템도 구입했다. 오직 나만의 느긋하고 한가로운 연주회를 꿈꾸면서.


연둣빛 봄날의 플루트, 한여름 소낙비 같은 피아노, 가을 햇살 속의 실내악, 깊은 겨울의 중후한 오케스트라 연주를 한껏 즐길 수 있어 미리 행복에 젖어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다음날 출근해서 퇴근까지의 시간은 아주 기ㅡㄴ 하루였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내 평생(현재까지 포함) 처음 보는 장면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경험을 했다. 


오디오가 놓인 자리는 비어있고 서랍이 열린 채 보관하고 있던 현금도 사라져 버렸다. 장로님이신 집주인장께서 경찰에 신고를 하고 가까운 파출소(그 당시)에서 두 명의 형사가 찾아왔다.


형사: 우선 주변의 대학생들과 오디오를 설치한 방문기사를 만나겠습니다. 출근해서 퇴근시간까지 집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소행입니다.


주인장: 우리 집에서 이런 일이 처음이니 꼭 잡아야겠습니다.

나: 어떤 방법으로 진행되는 건가요? 나도 처음 겪는 일이라 …

형사: 우선 이 집 학생들부터 만나봐야지요.

나: … … 나로 인해 학생들 모두 의심을 받게 되겠네요. 그냥 더 이상 진행하고 싶지 않습니다.

주인장: 그래도 그냥 넘어가는 것은 안 좋은 것 같습니다.

나: 아니요, 여기서 마무리해 주세요. 학생들과 방문기사 모두.

형사/주인장: 선생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나: 네, 매일 아침 학생들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걸요.

주인장: 죄송합니다.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나: 아닙니다, 문단속을 소홀히 한 제 잘못입니다.


다음 날 출근하면서 나는 메모 한 장과 내게 남은 많지 않은 돈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돈이 더 필요하면 이 돈을 가져가고 오디오를 돌려주면 고맙겠습니다.” 출근 후 빈집인 것을 아는 사람이면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돈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디오도 돌아오지 않았다.


오디오와 돈을 훔쳐간 그 사람도 지금은 중년이 넘었을 것이다. 그(그녀) 자신의 행위를 어떻게 정리하고 살아가는지 궁금하다. 한 때의 치기 어린 행동으로 치부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처음 방문했던 음악사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의 단골집이 되었고 쉽게 구할 수 없었던 실버·골드 디스크 액자를 선물로 받기까지 했다. 내 돈으로 구입한 나만의 첫 오디오는 LP판을 얹어 보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지만, 좋아하는 곡을 선정하고 마음에 드는 지휘자와 연주자를 선택해 LP판을 고르는 일은 젊은 날의 추억이며 행복한 시간이었다.


▲ 한 시절의 작은 음악실  © Kyrene


지금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수백 장의 LP판, 지금은 거의 모든 음악을 다양한 음원과 간편한 방법으로 감상할 수 있지만, 턴테이블(Turntable)에 LP판을 얹기까지 몇몇 과정을 거치면서(판을 고르고 닦고 바늘 상태를 점검하고 … ) 느꼈던 여유와 기대감은 오늘날의 젊을 친구들에게는 귀찮고 번거로운 일일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오페라 극장이 되기도 하고 혹은 실내악 연주홀이 되어, 바늘이 사그락 사그락 LP판을 스치는 소리, 가끔은 판이 튀면서 같은 선을 넘지 못하며 만드는 우스꽝스러운 소리도 정겹기 그지없다. 


아픈 기억도 추억은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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