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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rene Apr 16. 2024

[가치관과 삶] 비우기, 보내기

<우리 이렇게 삽시다 - 공감과 배려의 삶>

▲   비워내기  © https://www.blansfieldbuilders.com







내일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나를 둘러싼 주변의 물건들은 어떤 의미로 남겨질까. 3개월 후, 1년 후, 아니 3년 혹은 30년이 흐른 뒤 내가 머물렀던 자리에서 사라진다 해도 남겨진 것들이 갖는 의미가 지금과 조금이라도 달라질 것이 있을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바로 손끝이 닿는 책상 위의 필기도구, 컴퓨터, 펼쳐진 책들로부터 눈길이 가는 곳마다 나름의 존재의미를 과시하며 나를 향해 한 마디씩 건네기 시작한다. 그것들 속에 갇혀있는 나를 돌아보면서 갑자기 덜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급한 마음이 생긴다.


얼마 전 서랍 깊은 곳에서 발견한 작은 수첩은 2004년의 것이었다. 물건이 자리한 눈에 보이는 모든 공간과 숨어있고 가려진 모든 곳을 들어내고 열고 풀어헤쳐 본다. 상자 속, 가방 속, 서랍 속, 옷장 속에서 쏟아지는 물건들이 산더미를 이룬다. 종류도 어찌나 다양한지 장마당을 열고 매대라도 설치할 지경이다.


10년 혹은 20여 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들이 곳곳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가 햇빛 구경을 하고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다.


- 그릇: 한식, 양식, 일식, 중식 상차림을 위한 다채로운 색상과 디자인의 그릇들은 한 동안 사용한 적은 없으나 여전히 아름답다. 그 나라 사람들은 왜 그리 파티를 즐기는지, 초대받으면 초대하지 않을 수 없어 장만해 두었던 것이다. 경우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우리나라는 손님초대와 음식대접을 위한 훌륭한 장소들이 넘치는 것과는 달리, 모든 것을 집에서 직접 해야 했던 그 시절에 필요한 것들이어서 지금껏 깊은 곳에 들어가 관심에서 멀어진 존재들이다.


- 책: 전공자가 아니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 고가의 엄청난 분량의 전문서적들은 압도적인 무게와 부피를 가지고 장식품 구실도 못한 채 처치곤란이다.


- 옷: 30년 된 옷을 지금도 입는 편이라서 유행과는 그다지 상관은 없으나 나이가 들면 본인만 느끼는 신체의 변화로 인해 정장류에 속하는 옷들은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 있다. 버리자니 너무 아깝고 입자니 편치가 않아 방 한 칸을 거의 차지하고 있는 애물단지들, 버려진 헌 옷들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니 그나마 나는 옷을 고이 간직하고 있어 친환경적인 사람이라고 위안을 삼는다.


- 신발: 옷과 짝을 이루는 신발, TPO(Time, Place, Occasion의 약자/시간, 장소, 상황)에 맞게 다양하게 제작되고 구입했던 드레스 슈즈, 레저용 신발들이 신발장을 가득 채우고 있으나 요즈음 신는 신발은 스니커즈 몇 켤레가 전부다. 발가락의 위치도 불편하고 다리가 아프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장차림과 멀어지니 그에 맞는 신발 역시 손 갈 일이 없다. 수거업체에 문의해 보니 운동화만 수거하고 가죽류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 가구: 집안 여기저기 적당히 소용이 되고 장식효과도 있던 자그마한 가구들이 이젠 자꾸 눈에 거슬리고 부피를 너무 차지한다. 꼭 필요한 굵직한 것 외엔 치워버리고 싶다. 장식 소품들과 함께 오랫동안 곁을 지켜 온 것들인데 이젠 단순함이 좋다.


- 전자제품: 아주 작은 부품과 도구를 비롯해 큼지막한 물건에 이르기까지 우리 집엔 없는 것이 없다. 내 기준에는 옛날 전파상 하나쯤 차려도 될 것 같다. 새로운 물건이 출시되면 반드시 구입해서 실험하고 응용하고 적용해 보기를 즐기는 남편 덕에 전자기기, 부품, 도구를 보관하는 상자가 수십 개에 달한다. 이 많을 것들을 어디에 쓸 거냐고 물으면, 다 쓸 ‘때’가 있다고 한다.


- 화분: 동물들이 뛰어놀던 숲과 꽃들이 만발한 자연이 그리워 한국에 돌아와 집(아파트) 안에 작은 꽃밭을 만들겠다고 사들였던 화분, 질그릇, 도자기, 옹기, 나무, 플라스틱 텃밭 등에 온갖 화초와 공기정화 식물, 채소류까지 욕심을 냈지만 거의 모두 실패하고 지금은 겨우 화분 몇 개가 남아있을 뿐이다.


- 문구류: 각종 자료와 서류를 보관해 오던 수백 개의 바인더와 문구류 등의 처리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바인더의 플라스틱과 종이와 철물을 분리해서 폐기하는데 수많은 시간과 노동을 필요로 한다. 바인더에 묶여 있던 자료와 서류의 분류작업에 몇 날 며칠이 걸렸다.


- 운동기구: 테니스용품, 스키장비, 승마장비, 골프클럽세트, 등산장비, 낚시용품, 볼링용품, 각종 헬스기구 등은(장비 먼저 장만하는 나, 진짜 실력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거실구석과 벽면을 배경으로 그림처럼 서 있은 지 오래되었다.


이 밖에도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건들을 분해하고 파쇄하고, 가연성·비가연성으로 분리해서 처리하는데 엄청난 시간과 노동과 경비를 쏟아부었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위한 지침과 폐기물 처리방법을 정확히 알기 위해 유관기관에 수차례 전화를 하고 사진을 송부하기도 했다. 


서운함과 아쉬움과 미련과 추억을 뭉뚱그려 소형트럭 몇 대 분량의 물건을 보내면서 다짐한다.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것들만 지니도록 하자. 일상을 살아가는데 그다지 많은 것들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  생각 비우기  © Kyrene


너무 많은 생각도 마음을 흐리게 하지 않도록 비워내자, 나를 향한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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