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 순간을 - 함께 사는 세상> 가치관과 삶
▲ 야생화를 애도하며 … © Kyrene
창밖으로 강변 산책로가 내다 보인다. 이른 새벽부터 가로등이 켜질 때까지 끊임없이 사람들이 오간다. 걷는 사람, 달리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사람, 산책로를 이용하는 방법과 옷차림이 다양하다.
산책로 양옆으로 줄지어 서 있는 마른 나뭇가지의 가로수는 봄이 되어 물이 오르더니 엷은 수채화 물감처럼 이내 분홍빛을 머금는다. 하룻밤이 지나면 짙어지던 분홍빛은 마침내 하얀 꽃길을 이루고 꽃으로 터널을 만들어 놓는다. 지금은 초록이 무성하다.
하얗고 탐스런 꽃터널과 초록에 둘러싸인 강물은 나무와 결을 맞추듯 시간, 날씨, 하늘색에 따라, 그리고 푸르스름한 새벽부터 가로등이 강물에 반사될 때까지 수시로 얼굴빛을 달리하며, 서재에 앉아 내다보는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이른 새벽안개에 젖어 가끔은 모습을 감추기도 하지만, 해가 떠오르고 지는 시간에 따라 강물의 색깔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신기하다. 석양의 윤슬에 반짝이는 오렌지 빛 강물은 눈길을 오래도록 붙잡는다.
날이 풀리고 강변 가로수에 물이 오를 때부터 산책로를 걷는다. 산책로 아래로 강물 가까이 아담한 쉼터가 자리하고 있다.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담소도 나눌 수 있는 한적하고 여유 있는 공간이다. 주변은 온통 풀숲이 우거져 있고, 까치, 참새, 산비둘기들의 놀이터가 되어준다.
일주일에 서너 번 산책 나들이를 하다 보니 계절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는 풀숲, 다음에 꽃대가 올라오더니, 며칠 후에는 다양한 색깔의 야생화들이 하나 둘 얼굴을 내미는데 풀 속에 이토록 예쁜 꽃들이 숨어있던 것이 놀라울 뿐이다. 하얀색, 노란색, 분홍색, 보라색 꽃송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피어나는 모습을 보며 산책하는 길이 너무도 감사하고 행복하다.
우거진 야생화 꽃밭에서 까치 두 마리가 다정하게 데이트를 하고 있다. 내가 지켜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뽀뽀하고 있는 모습, 난생처음 보는 장면인데, 그날따라 휴대전화를 가져오지 않아 사랑스러운 그 모습을 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불과 이틀 전 강변의 모습이다.
변함없이 산책길을 걸어 쉼터에 도달하는 순간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예쁜 꽃들과 혹시 만날 수 있을 까치 한쌍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휴대전화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아, 이럴 수가 … 아무것도 없다.
형형색색의 야생화, 우거진 풀숲은 온데간데없고 그 넓은 공간과 언덕은 맨살을 드러낸 채 벌렁 누워있는 모습이다. 까치 한 마리가 맨 땅 위에서 외롭게 종종거리며 돌아다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한탄을 금할 수가 없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모두 쳐내버렸다.
나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공원관리 차원일 것이다,라고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이어야 하는가 이다. 겨울이 지나고 풀이 솟아날 때, 혹은 꽃대가 올라오기 전, 꽃이 피어나기 전에라도 관리작업(?)을 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수천수만 꽃송이들이 금방 터질 듯이 부풀어 있는 이 시기에 무참하게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만들어버린 행태에 몹시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내가 보기엔 갖가지 꽃들이 만발해 있는 모습이 지금 풀 깎인 맨땅과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울 것이다. 그런데, 아닌 모양이다. 사유지가 아니니 행정행위에 의해서 발생한 결과이지만 두고두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산책길에 나설 때마다 사라져 버린 꽃들이 많이 보고 싶고 많이 미안하다. 지금쯤 이 공원 전체가 예쁜 얼굴들로 덮여있을 텐데, 아쉬움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맨땅 위를 폴짝거리며 다니는 한 마리 까치도 내 마음과 같지 않을까 싶다. 나의 산책길은 예전만큼 행복하지 못하다.
이 사소한 일에도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 그들에겐 풍성한 야생화 꽃밭보다 깔끔한(?) 풀 깎인 맨땅이 좋은 것이다. 이러니 세상이 조용할 날이 없다. 서로의 관점이 다르다고 아우성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