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자들에게는 위기 때가 진짜 기회다
1800년대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20여 년 전에 소설로 읽었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자 영화라서 스토리는 대충 알겠지만, 극 중 '레트 버틀러'가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으로 나온다. 소설에서 기억나는 내용인데, 버틀러가 이렇게 말한 것 같다. '전쟁 중에 오히려 돈 벌기가 쉽다.' 실제 버틀러는 미 남부가 북군에 의해 봉쇄되어 있을 때 밀항선 등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처음 이 문구를 읽었을 때는 이해를 못 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게 파괴되고 죽는 사람도 많을 텐데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라고. '전쟁=파괴'라는 것을 책으로 보고 알았으니 10대였던 그때는 이해를 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헌데 세상을 살면서, 나름 역사나 여러 사건을 보면서 '그럴 수도 있구나'를 깨닫게 됐다. 모든 사람들이 실의에 빠지는 가운데 유독 소수의 사람은 돈을 벌고, 그중 일부는 부자가 됐으니 말이다.
전쟁과 같은 격변기는 모든 것을 바꿔 놓는다. 자산에 따른 서열이 대표적이다. '모든 것이 파괴'되다 보니 부자도 망하게 되고 일반 서민들도 망한다. 그 이후 다시 시작을 하면서 부를 빠르게 축적한 사람은 '신흥 부자'가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과거 부자'였다고 해도 가난을 못 면한다.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 격변기를 여럿 꼽을 수 있다. 20세기 만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는 일본이 패망한 한반도 내 권력의 공백기다. SK나 현대, 삼성을 비롯해 삼양 같은 대기업 1세대는 일본인들이 남겨 놓고 간 공장 등 일부 남은 생산시설을 불하받아 부를 일굴 수 있었다. 일본 사장이 떠나고 나자 조선인 관리자가 이를 이어받는 식이다.
두 번째는 한국전쟁 때다. 이때는 남북한 내 거의 모든 산업시설이 파괴됐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부의 재편이 일어났고,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다시 뒤엎었다. 이후 고도성장기에서 부를 선점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의 격차가 벌어지게 된다.
지금 현시대를 살아가는 투자자 입장에서 봤을 때는 어떨까. 1997년 외환위기와 이후 일어났던 초고속 인터넷의 보급,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와 2010년 모바일 혁명이 있었다. 2020년 코로나19 위기 이후에는 생성형 AI가 또 다른 시장을 열어가고 있다. 이런 점을 보면 위기와 기회는 함께 온다라는 게 맞는 말 같다.
◇한국전쟁이 주는 교훈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 정국은 불안했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후 이승만 정부는 농지개혁을 실시했다. 1945년 6월 농지개혁법을 실시하면서 소작인에게 농지를 나눠줬다. 북한처럼 지주들의 땅을 몰수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채권을 발행했다. 농지값을 보상해 주면서 발행한 공채로 '지가증권'이었다. (관련 링크 : https://theme.archives.go.kr/next/acreage/typeArchive.do?type1=2&type2=1&type3=6)
당시 이승만 정부의 계산수는 '대다수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줘 정국 안정을 꾀한다'는 것 외에 '기업 자본을 양성하는 것'도 있었다. 자산 대부분이 농지 등 토지인 상황에서 지주들이 '땅 대신 받은 돈'으로 산업자본을 일으키길 원했다.
지주들, 특히 그 자식대는 벼락부자가 된 셈이다. 그중 '깨인' 일부는 진정한 부는 땅이 아닌 공장과 같은 산업시설에 있다고 보고 투자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계획은 예상치 못한 전쟁으로 틀어지게 된다. 농지개혁 시행 3개월 만인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3년여의 전쟁 동안 전국토가 파괴됐다. 일본이 남겨놓고 간 산업시설도 80% 이상이 망가졌다. 전쟁통에 농사 등 생산활동 등이 멈추다시피 하다 보니 지주와 그 자식들도 생계가 막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갖고 있던 지가증권을 싼값에 내다 팔았다. 지금 개념으로 생각해 보면 사실상 부도가 난 정크본드나 다름없었다. 돈을 갚아줄 한국정부는 사실상 부도 상황이나 다름없었고, 토지도 다시 쓸모 있게 만들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몰랐다.
또 지가증권 매물이 몰리면서 가격은 더더욱 폭락했다. 부산에서 액면가의 10% 미만에 거래되기도 했다고 한다.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던 지가증권은 정부가 액면금액 전액을 불하 대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면서 새 전기를 맞았다. 쉽게 말하면 미군정이 접수하고 있었던 일본인 소유의 귀속공장을 지가증권으로 살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헐값에 지가증권을 매도했던 지주들은 몰락했고, 이 국채를 헐값에 사 기업에 투자한 사람은 부자가 됐다. 역사를 되짚어보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위기 때, 특히 전쟁과 다름없는 상황 때 더 많은 셈이다.
(<돈이 보이는 주식의 역사, 윤재수 지음, 길벗, 2021년. 4장 '당대신 증권으로 받은 신흥 부자 속출> 내용 발췌)
◇경제위기가 가져다주는 기회
1997년 외환위기도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을 줬다. 전쟁처럼 우리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고 해도, 부의 이동이 격변적으로 일어났다.
수많은 예가 있겠지만 농구선수 출신 서장훈 씨를 들 수 있다. 서 씨는 IMF의 구제금융을 받으며 외환위기 상처를 치유해 가던 2000년 서초구 빌딩을 28억 원에 매입했다. 이 건물은 이후 시가 450억 원까지 올랐다. <머니투데이, 2022년 9월 2일, 서장훈, 28억에 산 건물이 450억으로…'700억대' 건물주 등극>
이때 많은 기업들이 부도를 맞았고 수많은 자산이 시장에 나왔다. '대마불사'로 여겨지던 은행들도 수없이 무너지고 망했다. 당시 달러가 부족했던 우리나라는 무엇이든 팔았어야 했고 이때 많은 우량회사들이 매각됐다. 이 중 하나가 외환은행이었다.
'달러가 부족해 맞은' 외환위기 직격탄을 외환은행은 피해 갈 수 없었다 겨우 외자 유치로 위기를 넘겼지만 경영난은 계속됐다. 2003년 사모펀드인 론스타에 매각되기에 이르렀다. '내 코가 석자'였던 터라 론스타가 '돈 앞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모펀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단 넘겼다. 후에 론스타가 거두는 막대한 차익에 배 아픈 나머지 '먹튀'라고 욕을 했지만, 론스타는 사모펀드로서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에 충실했을 뿐이다.
물론 이런 먹튀 논란도 어떻게 보면 한국 경제가 체질 변화(IT산업 진흥 등)와 함께 빠르게 회복한 데 있다. 제 아무리 싸게 샀다고 해도, 이후 회복기에 접어들지 못하고 망해버렸으면 '헛돈' 쓰는 게 아닌가. 론스타 같은 사모펀드는 이 같은 '리스크'를 고려하고 베팅한 것이고, 그 생각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한국 경제가 회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수많은 해외 자본이 한국 자산을 싸게 사갔다.
때마침 한국경제는 초고속인터넷 통신망의 도입과 IT닷컴 기업들이 성장하면서 주식시장도 붐을 일으키게 됐다. 닷컴기업의 성장은 새로운 인터넷 시장을 형성했다. 미국 기업이 주도했고 한국 기업들도 성공적으로 합류하면서 쾌속 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다.
이때 한국인들도 교훈을 얻었다. 위기 뒤에 회복기가 온다는 것과 이때를 잘 공략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점 등이다. 위기로 주가가 떨어지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자산 가치의 하락'을 의미하지만, 잠재 매수자에게는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뜻했다.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는 이 같은 교훈의 시험대였다. 주가가 반토막 나는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패닉에 빠졌고 주택시장도 가라앉았다. 이런 와중에 일부는 또 염가에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을 매입해서 돈을 벌었다.
한 사람의 케이스를 예로 들자면, 이 사람은 한국경제의 흐름과 원·달러 환율에 주목했다. 그는 한국 원화가 강세일 때 달러화를 사놓았다. 적립식으로 사면서 모아 놓았다. 이후 글로벌금융위기가 오고 달러값이 치솟았을 때(원·달러 환율 상승), 달러자산을 팔아 원화로 바꾸고, 염가에 주식 등을 샀다.
이는 IMF 외환위기 때의 교훈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이때도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1달러당 800원이었던 원화 환율은 2000원대까지 치솟았다. 이때 달러 자산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단순 계산으로 1200원의 차익을 얻을 수 있다. 이런 한국경제의 위기 때는 주식시장의 주가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달러를 갖고 있는 외국 투자자 입장이라면 환차익과 함께 높은 수준의 차익거래를 달성할 수 있다.
비단 '우리 위기' 때만 부의 축적 기회가 있는 게 아니다. 남의 위기도 투자자에게는 돈 벌 기회다. 유럽재정위기 때의 그리스를 들 수 있다. 수많은 해외자본이 그리스의 부도 혹은 유로존 탈퇴를 예상하며 그리스 국채를 내다 팔았다. 그리스 정부가 부도를 내면 사실상 휴지조각이 되다 보니 예상손실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이중 일부 헤지펀드는 액면가 대비 20~30%로 떨어진 그리스 국채를 사들였다. 그리스 국채라는 '리스키'한 자산에 베팅을 한 것인데, 그리스 정부가 유로존에 남기로 하면서, 그 국채는 살아남게 됐다. 국채 가격은 높아졌고 덕분에 그 헤지펀드는 꽤 높은 수준의 수익을 기록했다.
(이런 식으로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혹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채를 매수하는 것 어떻겠느냐고 물어보겠지만, 내 생각에는 굉장히 위험하다. 수익대비 리스크를 봐야 하는데, 얻을 수 있는 수익과 비교해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크다. 왜냐, 환율 리스크가 이들 국가가 크기 때문이다. 그리스 국채는, 그리스 정부의 신용도 문제로 가격이 폭락했지만, 표기된 화폐 단위는 유로화였다. 환 리스크는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혹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자산은 환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 나라 정부가 인플레이션 관리에 실패를 하면서 해당 국가의 화폐 가치가 뚝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부자가 될 수 없다면 왜?
2020년 코로나19 위기 때 '동학개미운동'이 발발했던 것은 우리나라 투자자들이 똑똑해졌고, 20여 년간 몇 번의 위기를 겪으면서 얻게 된 학습효과가 크다고 본다. '위기는 투자의 기회'라는 것을 극명하게 깨달은 것이다.
이후 부동산 붐도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 이후 이어졌던 부동산 시장 불황의 교훈이 컸다고 본다. 2014년 이후 집값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갭투자'를 했던 여러 사람들이 수 억 원의 차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의 성공은 결국 자본, 정보, 담력이 있는 사람이나 가능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얻게 되는 수익'보다 '내가 감당해야 할 손실 가능성'을 더 무겁게 여긴다. 금융소비자에 있어 위험회피 성향이 더 높다는 것은 여러 연구와 논문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2024년 2월 나온 <'위험회피도와 금리민감도가 금융소비자의 의사 결정에 미치는 영향', 유경원, 서인주, 정지수> 논문에 따르면 안전과 수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태도를 가진 응답자 비중이 가장 높았다. 위험을 적극 수용하고 이자 변화에도 민감한 태도를 가진 응답자 비중은 소수였다.
평시와 같은 안정기 때는 안전과 수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태도가 맞을 수 있지만, 모두가 망하는 시점에서는 위험을 적극 수용하는 태도가 수익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다. 물론 투자 실패 시 대미지도 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장 참여자 모두가 공포와 불안감으로 패닉에 빠져 있을 때, 돈이 될 기회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과감하게' 베팅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의미다. (이론적일 뿐, 연약한 인간의 심성으로 보자면 공포 분위기에 젖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다. 운도 따라줘야 하고... 부자가 상대적으로 소수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또 하나. 담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갖고 있는 자본이 보잘것없으면 (위기 때) 큰돈을 벌기 힘들다. 작은 자본으로 큰 수익을 얻으려면 레버리지를 활용해야 하는데, 그만큼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리스크도 커진다. 교도소 담장 위를 걸으며 하루하루 버텨야 하는데, 이를 이겨낼 사람 과연 몇이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