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빠른 변침'은 무죄?
정치인에게 있어 여론조사는 절대적인 지표다. 국민 여론이 자신을 평가하는 바로미터이자 자기 홍보 도구이기도 하다. 최근 정세를 숫자로 보여주니 정치인들의 선거 전략도 여론조사를 기반으로 짠다.
때로는 이 숫자가 평범한 누군가를 일약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만들기도 한다. 탄핵 정국을 거치며 ‘보수 꼴통’ 혹은 ‘변절자’로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지탄받던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도 이런 ‘숫자’ 덕분에 보수 진영의 대선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따지고 보면 대선을 앞두고 다크호스들은 여론조사의 숫자를 기반으로 떠올랐다. 2021년 초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이 그랬고 2017년에는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주목받았다. 열화와 같은 성원이 설문조사의 숫자로 나타나고 대선 경쟁력으로까지 연결되는 식이다. 2012년 안철수 당시 안랩 대표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정치인들이 여론조사에 울고 웃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정치 브로커다. 혹은 정치 컨설턴트라고 하는 사람들이 정치인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도 여론조사 자료를 통해서다. 명태균 씨가 그 예다.
참고로 같은 여론조사라고 해도 신뢰도는 각기 다르다. 과거에는 ‘3대장’ 체제였지만, 지금은 ‘투톱’ 구도로 바뀌었다는 평가가 많다. 워낙에 많은 여론조사가 난립하다보니 독보적인 신뢰성의 조사가 주목받고 있다.
이 중 전통의 강자 첫번째를 꼽자면 한국갤럽을 들 수 있다. 신뢰성과 역사성 면에서 명실상부한 국내 여론조사 원톱이다. 오랜 시간 정기적으로 같은 주제 (대통령 지지도 등)를 놓고 조사를 하다보니 기간별 비교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문재인과 윤석열의 첫 달 지지도 비교’ 같은 것이다.
두 번째는 한국리서치를 포함한 5개 설문조사 기관이 참여하는 전국지표조사(NBS)다. 한국갤럽과 마찬가지로 조사원이 직접 전화하는 방식으로 비교적 신뢰도 높은 표본을 확보해 조사를 진행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리얼미터인데 최근 몇 년간 위상이 하락했다고 한다. 한국갤럽과 NBS와 달리 ‘전화자동응답’(ARS) 기반 조사다보니까 상대적인 차별성이 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ARS 방식은 다른 보통의 여론조사 업체들도 한다.
기자들은 이들 조사 결과에 이름이 올라온 후보들에 주목한다. 대선주자로 써주기도 한다. 그렇게 기사로 재생산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들은 홍보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주목할 수 있는 이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였다. 한 권한대행은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에게는 애증의 인물이다. 그는 과거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총리를 맡으며 친노(친 노무현) 정치인들과 유대감을 형성했던 인물이다. 공무원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자리까지 누려봤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초기 여소야대 국면에서 ‘야당도 이 정도 인물은 받아들이지 않겠나’ 하는 계산으로 한 권한대행을 국무총리로 기용했다. 그러나 그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다. 과거는 과거일뿐 한 권한대행은 윤석열의 사람이자 대리인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윤석열 정부 국무위원의 수장인 한 권한대행이 임기 내내 민주당 의원들의 질타를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예전 인연에 대한 서운함 때문인지, 한 권한대행도 민주당 의원들과 거침없는 설전을 벌이곤 했다. “공무원이 국회의원에게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야당과의 충돌을 조장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결자해지’라고 했던가. 마무리가 좋으면 그 전 과정이 섭섭해도 훈훈하게 끝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당과 한 권한대행은 그렇게 끝낼 기회를 갖지 못했다. 결과론적이지만 계엄 전에 그가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났다면 그의 인생 말로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결자해지가 하지만 뜻하지 않은 계엄에 이를 제대로 말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반란 동조자’가 됐다. 민주당과의 관계 개선 여지도 사라졌다.
계엄 이후 한 권한대행은 헌법재판관 3인의 지명을 미뤘다. 민주당은 이런 그를 탄핵했다. 3월 들어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으로 복귀했지만 민주당과의 갈등 상황은 여전했다. 4월 4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선고와 맞물려 한 권한대행과 민주당의 싸움도 끝이 나는 것으로 보였다. 한 권한대행은 대선 관리를 잘하고 퇴장하면 됐다.
그런데 한 권한대행이 굳이 안 해도 될 일을 했다.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그가 지명하면서 정국이 다시 요동쳤다. 정확히는 민주당 의원들이 들고 일어났다. 한 권한대행이 지명한 인물 중에는 윤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던 인물이 있었다. 보수 색채가 강한 이들도 포함됐다. 누가 봐도 ‘싸우자’는 행동이었다.
정치 평론가들은 한 권한대행이 ‘현상유지 공무원’에서 벗어나 자기 정치를 시작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마치 대통령인 듯 권한을 행사하며 야당과의 충돌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다. 민주당의 탄핵을 유도하는 행보로까지 읽혔다.
‘정치인’으로 한덕수가 민주당과 대립각을 세우자 여론조사에서 다시금 그의 이름이 등장했다. 민주당 의원들과 마찰을 빚으며 존재감을 키웠던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나 김문수 전 장관의 사례와 닮은꼴이었다.
정치인 한덕수가 주목받자 여론조사에서도 그의 이름이 등장했다. 4월 11일에 발표된 한국 갤럽 여론조사에서 한덕수라는 이름이 등장했고 그때 그의 지지율은 2%였다. 지지하는 인물을 주관식으로 묻는 조사였음에도 이 정도의 응답률을 얻었다는 것은 꽤 주목할 만한 수준이었다. 국민의힘 잠재 주자 중에서는 홍준표, 한동훈 등이랑 어깨를 나란히 했다.
국민의힘 의원들 사이에서는 그의 등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전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검사도 대선 후보가 됐는데, 한덕수라고 안 될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다. 57명의 의원이 연판장을 돌려 한 권한대행의 출마를 촉구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4월 14일 발표된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한 권한대행이 보수권 주자 중 명실상부한 2위로 올라섰다. 김문수, 홍준표, 한동훈 등의 지지세가 그에게 쏠리는 양상이 뚜렷했다. 이런 수치 앞에서 한 권한대행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80을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설문조사에서 나온 ‘숫자’가 그를 움직이게 만든 셈이다.
하지만 사흘 뒤 나온 NBS 조사에서는 그의 대선 출마를 ‘바람직하지 않다’는 응답이 66%에 달했다. 여권 지지율 2위 주자이기는 했지만, 민주당 지지층은 물론 중도와 무당층까지 그의 등판을 반기지는 않는 분위기였다.
일각에서는 한 권한대행이 설령 대선에 출마하더라도 상처만 안고 물러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어차피 이번 조기대선은 ‘이재명 판’으로 굴러가는 중이고, 결국 큰 표차로 패배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후 남는 것은 패배의 기록과 명예 손상뿐이라는 지적이다. 대통령 선거는 총력전이며, 때로는 정치인 본인이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수 있는 싸움이다. 한덕수 권한대행이 지금까지 쌓아온 명예나 경력도 손상될 수 있다는 우려다.
정말로 한 권한대행이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 출마하려는 걸까? 어쩌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운이 좋으면 대통령이 되고, 아니라면 ‘대선 2위 후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수 대표 주자로 나서 이재명 후보와 접전을 벌이고 패배했다면, 그는 ‘이재명의 라이벌’이라는 정치적 프레임을 갖게 된다. 이후 민주당이 ‘내란 동조’ 등의 혐의로 기소하려 해도, ‘정적에 대한 탄압’으로 비춰질 수 있다. ‘권한대행’ 한덕수보다 ‘대선 2위’ 한덕수가 민주당 입장에서 더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 정치적 계산도 분명 깔려 있을 것이다.
민주당이 한 권한대행을 비판하면서도 탄핵을 추진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일 수 있다. ‘이미 탄핵했던 사람을 또 탄핵하냐’는 비판도 있겠지만, 출마 명분을 만들어주고 싶지 않은 게 더 큰 이유일 것이다. 2차 탄핵으로 권한이 정지된 상황에서 한 권한대행은 대선 출마를 선택할 수 있고, ‘민주당과 싸운 투사’ 이미지를 확보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