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나 그에 대한 탄핵을 미처 예상할 수 없었던 2024년 7월, 언론진흥재단에서 ‘기자는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유튜브 촬영을 진행했다. 프레시안, SBS 등 국회를 출입하는 정치부 기자들과 함께 ‘정치부 기자 입문 가이드’ 같은 영상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그때 내가 맡은 내용은 ‘정당’에 관한 것이었다. 정당의 존재 이유와 정당 체계는 물론, 정당이 왜 갈등할 수밖에 없는지, 정당 내부에 왜 알력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내용은, 정당의 가장 큰 책무 중 하나가 이 나라를 이끌 ‘리더’를 국민에게 소개하는 일이었다. 각 정당이 훌륭한 리더를 선출하여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고, 그렇게 집권하여 여당이 되면 자신들의 다양한 정책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정치부에 오래 몸담았던 한 선배 기자는 한국 정치판을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다. “대선 전까지는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 대선이 끝나면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될 것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치열하게 보도하는 것이 한국 정치 보도의 현실이다.” 이는 한국 정치와 정당에서 대통령 선거가 그만큼 큰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도 정당이 지닌 본질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 리더를 선출하고, 그 리더가 국가를 잘 이끌도록 뒷받침하는 것이 정당의 역할이다. 정당의 출발점이 ‘정치적 결사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정당이 추구하는 가치와 후보 또는 대통령이 지닌 비전이 일치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하지만 이런 점에서 한국 정당들은 원칙을 저버리는 경우가 잦다. 선거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 보니, 자격 미달인 ‘엉뚱한 후보’를 검증 없이 급조해 내세우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국민의힘은 2022년 3월 대선에서 내세워서는 안될 인물을 대선 후보로 우리 국민들에게 내밀었다. 당시 ‘윤석열 후보’는 ‘반 문재인’ 정서에 편승해 높은 지지율을 얻었을 뿐, 보수 정치인으로서 준수해야할 가치나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가치관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민주당 정부에 각을 세운 검찰총장’ 그리고 ‘들이키듯 술을 마시던 주당의 모습’이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얼떨결에 대통령이 되었을 뿐 국가 지도자로서의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다. 홍준표 대구시장도 그를 보고 ‘용병’이라고 표현했다.
더구나 윤 전 대통령은 TK 보수의 상징과도 같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을 수사하여 구속시킨 장본인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발탁하여 키워준 인물이기도 했다. 자신을 발탁한 주군을 겨눴다는 점에서 ‘배신’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보수의 가치와도 어긋났다. 이처럼 여러모로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인물이었음에도 ‘보수 후보’로 급조해 내세운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무조건 이기기 위해서였다.
‘무조건 이기는 것’만이 중요할까? 아니다. 때로는 ‘지는 싸움’에도 당당히 임해 품위 있게 패배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찬사가 나오는 것도 정해진 규칙 안에서 최선을 다해 싸웠을 때 가능한 일이다. 패배가 확실시되던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유시민 작가가 “지더라도 품위 있게 지자”고 했던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과거) 대통령 탄핵을 연이어 겪었던 국민의힘이 (이번) 경선에서 보여준 모습은 한국 정치가 여전히 후진적임을 드러낸다. 이는 한국 기득권층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 편의 블랙 코미디 같기도 했다.
한편의 블랙코미디는 5월 9일 오후,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 연출됐다. 국회의사당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실에서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잔뜩 굳은 얼굴로 단상에 올라섰고 선배인 김문수 후보를 향해 원망의 말을 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있는 김문수 후보를 향해 “긴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지도자라면, 큰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을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라고 일갈했다. 그의 표정에는 ‘김문수는 왜 저리 고집을 부리는가’ 하는 불만이 역력했다. 이 말을 듣던 김문수 후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권성동 원내대표가 그를 붙잡으려 했고 다른 의원들도 만류했지만, 김 후보는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당 지도부와 대선 후보 간 소통이 얼마나 단절되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권영세 비대위원장이 화가 났던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단상에 오른 김문수 후보의 발언이 그의 심기를 자극했다. 김 후보는 국민의힘 의원들이 모인 자리에 서서 “당 지도부는 지금까지도 저 김문수를 끌어내리고 무소속 후보를 우리 당의 후보로 만들려고 온갖 불법·부당한 술수를 동원하고 있습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단일화 합의’라는 아름다운(?) 그림을 기대했던 국민의힘 의원들의 예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때부터 회의장 분위기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검사 출신인 권영세 비대위원장은 1959년생이다. 과거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김문수 후보는 1951년생이다. 김 후보는 나이로나 정치 경력으로나 권 비대위원장보다 확실한 선배였다. 군부 독재에 맞서 싸웠고 목숨을 걸고 민주화 세력을 이끌었던 지도자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김 후보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1990년대에 보수 정당인으로 전향하기 전까지 수 차례 투옥되었고 모진 고문도 견뎌냈다. 운동권 출신 특유의 ‘지도자로서 한몫했다’는 자부심을 고려하면, 김 후보는 권 비대위원장의 ‘큰 지도자론’ 발언에 심한 모멸감을 느꼈을 법하다.
5월 9일 의원총회가 이런 촌극으로 막을 내리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한 중진 의원은 “이런 모습을 왜 공개해서 생중계까지 하느냐”며 혀를 찼다. 그만큼 남들에게 보이기 창피한 장면이었다는 뜻이다.
김 후보는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아무런 답변 없이 차를 타고 국회 본청을 떠났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정회 후, 지난 4월 27일 김 후보의 인터뷰 내용을 거론했다. 그는 “김 후보 본인이 5월 11일 이전에 단일화하겠다고 직접 말했다. 전당대회 직후 단일화한다는 약속도 20여 차례나 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애초에 김문수 후보가 단일화 약속을 파기했다는 주장이다. 소위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었다.
김문수 후보가 대선 후보직을 고수하려는 이유는 분명해 보였다. 그가 요구한 단일화 시한은 국민의힘 지도부와 한덕수 전 국무총리 측이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후보 등록 마감일이 11일인데, 그 이후에 단일화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기호 2번’과 국고보조금 500억원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기호 2번은 차치하더라도, 500억 원의 보조금을 포기하고 대선을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내부적으로는 ‘김문수를 너무 얕잡아 봤다’는 자성론도 나왔을 것이다. 과거 민주화 운동 시절 예측불허의 행보를 보였던 그는 더 큰 리더, 즉 대통령에 대한 야망도 상당한 인물이었다.
그가 소위 ‘아스팔트 우파’를 자처하며 전광훈 목사 등과 긴밀히 교류하고 자유통일당 창당에 깊이 관여한 배경에도 대통령을 향한 그의 큰 꿈이 자리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되었다. 때마침 이날(5월 9일), 서울남부지방법원은 김문수 후보 측이 제기한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김 후보 측은 10일과 11일 양일간 열릴 예정이었던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중지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낸 상태였다. 이 전당대회가 사실상 자신을 낙마시키려는 절차라고 보고 법원에 중지를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법원이 모든 가처분 신청을 기각함에 따라 국민의힘 지도부가 원했던 후보 교체의 길이 열렸다. 미루어 짐작건대, 8~9일 진행한 당 지도부 차원의 단일화 여론조사 결과도 이미 받아보았을 것이다. 그 결과, 중도층 확장성 면에서 ‘강경 우파 이미지’가 덧씌워진 김문수 후보보다는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더 경쟁력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이재명 민주당 후보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하느냐’ 혹은 ‘격차를 줄이며 패배하느냐’의 문제였을 수 있고, 국민의힘 지도부는 후자를 택한 셈이다. 어쩌면 진영 총결집을 통해 요행히 승리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기대감도 작용했을지 모른다. 결국 김문수 후보 측과 한덕수 전 총리 측의 막판 단일화 협상은 최종 결렬되었고, 당 지도부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며 후보 등록 마감일인 11일을 넘길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다음 날인 10일 새벽, 국민의힘이 김문수 후보의 당 대선 후보 선출을 취소하고 한덕수 전 총리의 입당 및 후보 등록 절차를 진행한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새벽 2시경 국민의힘 홈페이지에는 대선 후보자 등록 신청 공고가 게시되었다. 제출 기간은 새벽 3시부터 4시까지, 단 한 시간이었다. 32종에 달하는 서류를 준비해 국회 본관에 직접 제출하라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누가 봐도 당비를 단 한 번도 납부한 적 없는 한덕수 전 총리를 위한 ‘맞춤형’ 절차였다.
오전 3시 20분, 한 전 총리는 국민의힘에 입당했고, 15분 뒤 자신의 SNS에 ‘국민의힘 당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알렸다. 대통령 선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로써 김문수 후보의 자격 박탈은 기정사실화되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과거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정확히 3주년이 되는 날이자, ‘유권자의 날’이기도 했다.
국민의힘이 정당이라면 당연히 거쳐야 하는 ‘경선’ 절차를 무시하고 이런 무리수를 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배경이 있겠지만, 첫 번째는 대선 이후의 상황까지 고려한 정치적 계산에 있다. 예컨대 야구에서 큰 점수 차로 뒤지고 있는 경기라면, 주력 투수를 아끼고 소위 ‘패전 처리 투수’를 등판시키곤 한다. 핵심 전력을 보존하여 다음 경기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의 독주가 예상되는, 사실상 ‘승산 없는 게임’에서는 대선 이후의 당권 향배가 더 중요했을 수 있다. 특히 국민의힘 내 기득권을 가진 의원들에게는 ‘당권 장악’이 최우선 과제였을 것이다. 정권은 내주더라도, 자신들의 공천권과 직결된 당내 권력 기반만큼은 사수하고 싶다는 속셈이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패배 책임론’의 칼날을 피해야 한다. 누군가는 대신 전면에 나서 비난을 감수할 ‘방패막이’가 필요한데, 그런 ‘얼굴마담’ 격으로 한덕수 전 총리가 선택된 것은 아닐까.
한 전 총리로서도 ‘어차피 어려운 싸움’이라면 딱히 손해 볼 것 없는 정치적 도박이었을 수 있다. 만에 하나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그야말로 ‘대박’이고, 설령 패배하더라도 대권 주자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다. 이재명 후보와 맞붙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향후 ‘정치적 경쟁자’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향후 집권 세력이 가령 내란 음모와 같은 정치적 올가미를 씌워 탄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 정권의 탄압을 부르짖었던 이재명 후보가 비슷한 방식으로 한 전 총리를 공격한다면 엄청난 정치적 역풍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 전 총리는 70대 후반의 고령이다. 평생을 관료로 지내왔다. 다음 총선이 치러지는 2028년이면 그의 나이는 여든에 육박한다. 누가 봐도 황혼기에 접어든 나이이다. 국민의힘 기득권층으로서는 자신들의 당권 경쟁 구도에 큰 위협이 되지 않을 인물로 판단했을 것이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어떻게든 견제하려 했던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한 전 비대위원장은 1973년생으로 비교적 젊다. 조기대선 후 유력한 차기 당권 주자로 급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한동훈이라는 잠재적 경쟁자를 견제하려고 김문수 카드를 선택했지만, 이게 더 큰 파국을 초래한 자충수가 되었다. 이럴 것이면 경선은 왜 했을까. 정당의 존재 이유마저 송두리째 흔들리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두 번째는 더 현실적이고 어쩌면 가장 결정적인 이유일 수 있다. 후보 등록 마감일까지 후보를 내지 못하면 국고에서 지원되는 선거 보조금 500억원을 고스란히 반납해야 한다. 이는 형식적으로 ‘선거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된다. 정부로서도 보조금을 지급할 명분이 사라진다. 정당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최악의 시나리오인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돈만은 포기할 수 없다’이다.
정당의 핵심 책무인 ‘국가 리더 발굴’이라는 측면에서, 국민의힘은 또다시 실패의 역사를 반복할 가능성이 커졌다. 홍준표 대구시장의 지적처럼, ‘오직 이기기 위한 용병’으로 윤석열 전 대통령을 영입했다가 한국 민주주의와 국가 경제에 막대한 해악을 끼쳤던 과거가 있다. 이러한 명백한 귀책 사유가 있는 정당이 똑같은 패착을 되풀이하고 있다. 시간은 없는데 무리수만 남발되는 블랙코미디 같은 광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