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통, 공감이 필수

by 팟캐김

소통을 잘하느냐 여부에 따라 대통령의 평가도 극명하게 달라진다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어떤 소통이 되어야 할까. 특히 우리 국민들의 안전과 생활을 책임지는 대통령은 소통에 있어 어떤 부분이 남달라야 할까.


기본적으로 '공감'이 전제되어야 한다. 상대방의 감성과 감정 부분을 건드는 이 공감은 메시지 뿐만 아니라 말투와 행동거지, 때로는 주변 분위기도 크게 좌우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영상까지 공유되는 지금 세상에서 '메시지'외에 비(非) 메시지적인 요소가 중요하다.


소통, 공감.png


21세기 한국을 기준으로 봤을 때 신데렐라처럼 대통령이 된 이들은 '공감'을 국민들로부터 얻었다. 20년 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었고 최근으로는 이재명 대통령이 있다. 이들 모두 전통 매체가 아닌 온라인 등을 통해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줬고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에 또 하나. 그들의 서사다. 그들이 살아온 스토리, 갖고 있는 정치관이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뿌리 깊은 '지역주의' 한계에 도전했다. 낙선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의 지역구를 버리고 도전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가 바위를 밀어 올리면서 독자들의 동정을 샀던 게 연상된다고 할까.


노 전 대통령의 '고졸 출신 법조인' 서사도 대다수 국민들의 공감을 샀다. 누구든 쉽게 포기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1980년대 사법고시까지 합격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런 사람이 기득권에 대항했고 국회의원까지 됐다는 점도 흠모할 만한 스토리가 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기본소득'을 자신의 브랜드 정책으로 가져갔다. 그 또한 자산가 등 '있는 자'들이 아닌 '없는 자'들을 위한다라는 방향성을 분명히 보여줬다. 때로는 '반항심'으로 여겨질 정도로 기득권층, 특히 보수정당에 꼿꼿했다. 이는 그에게 팬덤으로까지 이어졌다.


다만 대통령의 소통은 '공감' 정도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 물론 일상을 보내는 평범한 우리도 다른 이들과의 소통에 '공감'만 줘서는 안된다. 그 안에 유능함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그 소통이 완성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재명 대통령도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또 그 이후로도 '유능함'을 보여줬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수잔 피스크(Susan Fiske)는 공감의 두가지 요건으로 '따뜻함(warmth)'과 '유능함(competence)'를 들었다. 적절하게 두가지 요소가 보여져야 사람들은 비로소 공감을 한다고 했다.


정치인이자 대통령인 '내'가 공감받는 것도 필요하지만, 국민들, 범위를 좀더 좁히면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어떤 심정으로 있을지, 어떤 생각을 할지 이해하는 '공감'도 중요하다. 21세기 이후 보수정당에서 배출한 대통령들은 이 둘의 균형이 맞지 않았다고 본다.


한 예로 이명박 전 대통령을 들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된 그는 '(나름) 유능했다'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일반 평사원에서 대기업 사장까지 됐고 서울시장까지 했다.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수도 서울에 어떤 부분에 개선이 필요한지 잘 진단했다. 그중 하나가 청계천이다.


그러나 그의 공감 능력은 본인 세대의 고루한 남성 정치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가 2008년 광우병 사태에 따른 광화문 시위·집회다. 보수정당에서는 여전히 광우병 사태와 소요 시위가 MBC의 자극적인 선동 방송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21세기 쌍방향문화에 익숙한 당시 20~30대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요구는 간명했다. '왜 우리 얘기를 듣지 않고 너네들 마음대로 결정하느냐'였다.


이런 공감에 대한 정의를 사이먼 배런-코언(Simon Baron-Cohen)공감은 상대방의 감정, 상황 처지를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규정했다. 우리나라 유수의 사회심리학자들도 비슷한 견해를 내놓지 않을까 싶다. 내가 아닌 '타인', 좀더 정확히는 '나를 관심있게 바라보는 이들'의 처지나 생각을 이해하는 마음이다. 정치인들에게 있어 이는 '위선'이라고 비춰져도 꼭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인들의 눈물도 정교한 정치적 수사가 될 수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위선적인 모습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평생을 검찰에서 살아온 그의 세계관에서는 '의심'이 기본전제였을지 모른다. 이태원 참사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사고의 원인과 책임에 대해 관심을 보였을 뿐, '위선적으로라도' 피해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민주당 등 야당의 공세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사건을 철저히 '타인화'했다. 진상 조사를 요구하는 국정조사가 실행되는 데 있어 비협조적으로 일관했다.


앞서 발생했던 동작구 반지하 침수 삼아사고 현장 방문 때도 비슷했다. 2022년 7월 국지성 호우로 동작구 반지하방이 침수됐고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이 사망했을 때도 '아, 주무시다 그랬구나' 등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발언을 했다. 사건과 분리해 사고를 하던 검찰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와 비교될 수 있는 사례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자연재해나 총격 사고 현장에서 피해자 유족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였다. '당신의 아픔을 느낀다'라고 공감을 주려고 애썼다.


공감이 '같은 눈높이에서 세상을 함께 본다'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규정했을 때도 오바마 전 대통령은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줬던 사진 중 하나가 백악관 청소직원과 주먹인사를 하던 모습이다. 우리 정서로 봤을 때 대통령과 대통령실 내 청소직원이 주먹인사를 나누며 다정하게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생경했던 게 사실이다.


공감을 통해 얻어진 신뢰는 정책 실현의 연료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신뢰는 사회적 자본의 핵심이며, 경제적·정치적 성과를 좌우한다"고 말했다. (Francis Fukuyama, Trust: The Social Virtues and the Creation of Prosperity. Princeton University Press.)


해외에서는 국민적 신뢰가 높아 정책의 성공 사례로 이어진 사례를 문재인 정부 때 있었던 코로나19 대책을 들었다. 자말 자키 스탠퍼드대학 심리학과 교수는 자신의 저서 '희망찬 회의론자'에서 한국 정부의 코로나19 팬데믹 대책을 언급했다. 저자는 '코로나19가 번지면서 한국정부는 신속한 대책을 취했는데, 그러면서도 세 가지 원칙, 즉 투명성 민주주의, 개방성 준수했다'고 썼다. 그는 정세균 당시 국무총리의 말도 인용을 했는데 "국민의 신뢰를 얻으면 백신 접종률을 높일 수 있다"고 했다.


이 같은 결과는 문재인 정부가 2017년 탄핵 정국 이후 국민들의 공감을 받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던 결과 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실제 한국은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성공적으로 방역에 성공한 나라로 알려졌다. 우리 국민의 일치단결된 힘이 컸지만 정부의 소통도 한몫했다고 본다.


비슷한 맥락에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IMF 구제금융을 받을 때 한국 정부와 우리 국민이 했던 '금모으기 운동'도 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민들이 나서서 나라를 구한다'라는 숭고한 DNA가 우리 국민에 각인된 것에 김대중 정부가 나서서 국민들과 소통을 하려고 했던 부분도 컸다. 외환위기의 순간에 집권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수 차례 '국민과의 대화'를 열었다. 국민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등 소탈한 모습을 보이면서 국민들의 공감을 받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소통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