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보이는 스태그플레이션 징후
경제학을 개론서만 읽어본 이들도 아는 게 하나 있다. 양날의 검과 같은 ‘세금’의 효과다. 사실상 시장에서 공급되는 제품의 가격을 올리고 이는 수요를 줄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결과적으로 거래 규모가 줄어들어 경제가 위축된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고 도식적으로 그리면 이렇다. 가령 내가 1000원을 갖고 햄버거를 사려 한다고 해보자. 1500원까지 지불할 의사가 있는데, 새로운 부가세 정책이 도입되면서 햄버거 가격이 1600원이 되었다고 가정하자. 아마도 햄버거 사는 것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햄버거집 사장은 손님 한 명을 놓치는 결과가 된다.
이처럼 물가는 소비 심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더 나아가 경기도 물가와 상관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자영업자들이 힘들다’, ‘경기가 어렵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실제 식당들을 가보면 빈자리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비싸진 가격에 ‘식당 가서 밥 먹는 것’ 대신 도시락이나 더 싼 다른 대안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다. 점심 한 끼 가격 1만 원 이상이라는 현실이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고 본다. 최근 한국 내수가 어렵다는 말이 많은데, 여러 복합적 요인이 있겠지만 가파른 물가 상승이 중요한 원인이라 본다. 저렴한 제품을 파는 다이소 같은 곳이 붐비고 몇천 원에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프랜차이즈 햄버거가 그래도 잘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이론적으로든 경험적으로든 가파른 물가 상승은 경기 하강의 주범이 된다. 이런 상황이 임시적인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계속된다면 어떨까. 바로 스태그플레이션이다.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가 ‘스태그플레이션 우려’에 시달했고 일부 국가는 유사한 경험을 했다. 이런 상황을 다시 맞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맥락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정책은 미국 경제를 불확실성에 몰아넣을 수 있다. 2000년대 미국이 낮은 물가와 높은 경제성장을 동시에 누릴 수 있었던 주요 배경 중 하나는, 중국의 WTO 가입 이후 값싼 공산품이 대거 공급된 덕분이었다. 미국은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제조업 대신 첨단 산업이나 인터넷 산업에 집중하며 더 많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냈다.
이런 무역질서를 스스로 구축해 놓고 스스로 무너뜨리는 모양새가 됐다.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등 주요 수출국가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는 경우다. 미국 제조업이 이미 붕괴되어 있고 공산품 상당수를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관세는 곧 물가 상승을 의미한다. 월마트 매대에 깔린 중국산 비중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최근 미국 국채 시장은 독특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단기채와 장기채 간의 엇박자다. 2년물 등 단기물 금리는 연준의 조기 금리 인하 기대에 따라 하락 압력을 받고 있다. 고용지표 둔화와 경기 침체 가능성을 근거로 이번 달 최소 25bp 금리 인하가 있을 것이라는 시장의 예상이 두드러졌다. 단기채 금리가 이를 선반영하며 내려가는 모습이다.
반면 장기금리는 정반대다. 10년물과 30년물 국채 금리는 꾸준히 오르며 4%대 중후반에 머물고 있다. 단순히 경기 둔화 우려만 반영한다면 장기금리 역시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오히려 역방향 움직임이 나타난다. 시장이 관세발 인플레이션, 미국의 재정적자 확대, 정치적 불확실성을 장기적 리스크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단기금리는 내려가고 장기금리는 올라가는 전형적인 ‘스티프닝’ 곡선이 만들어졌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장기금리가 적어도 몇 년 뒤의 경기 전망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물가 상승에 대한 프리미엄도 얹어진다. 다시 말해 지금의 장기금리 상승은 미국 물가에 대한 우려가 상당 부분 반영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관세 부과에 따른 물가 상승 압박이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장기채 투자자들이 장기채에 대한 선호를 낮추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장기채 가격 하락과 금리 상승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현재 경제 상황은 경기 둔화를 이유로 연준이 금리 인하를 시도하려는 모양새다. 경제 여건만 놓고 보면 경기 둔화 속 물가 상승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 분위기이고, 이를 트럼프 행정부가 부추기는 모습도 있다.
트럼프는 동시에 대규모 감세와 인프라 지출을 약속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경기 부양책이지만 재정수지에는 악영향을 미친다. 국채 발행이 늘어나면서 장기 국채 금리는 자연스럽게 상승한다. 시장은 미국 정부의 상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더 많은 국채가 쏟아질 것’이라는 단순한 수급 논리에 반응한다.
결국 관세로 물가는 오르고, 재정적자 우려로 국채 공급이 늘어나면서 장기금리는 추가 상승 압력을 받는다. 이는 단순히 채권시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의 장기 투자 비용과 가계의 주택담보대출 금리에 직결된다. 장기금리 상승은 일반 시민에게 주택담보대출 부담으로 이어진다.
트럼프의 관세 확대, 재정 팽창, 연준 압박은 각각 따로 보면 정책적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함께 작용할 경우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다. 단기적 완화와 장기적 불안을 동시에 만들어내는 전형적인 엇박자 정책이다. 지금의 금리곡선이 보여주듯, 시장은 이미 이러한 리스크를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의 그림자가 본격화되느냐 여부는 결국 정책 조합의 균형에 달려 있다. 연준이 독립성을 지키며 물가 안정을 최우선에 두고, 재정정책이 보다 지속가능하게 운영되지 않는다면, ‘트럼프발 엇박자’는 미국 경제뿐 아니라 세계 경제 전체를 흔드는 불안 요인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