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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팟캐김 Jan 08. 2022

[경제위기란?-11]1970년대 석유파동

외부 변수에 취약한 한국 경제 

한국 경제가 1970년대 막 비상하던 시기, 석유 파동 혹은 중동 오일쇼크라고 불리는 외부 변수와 마주하게 됩니다. 자원이라고 할 게 없었던 자원빈국 한국 경제는 막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되는 등의 충격까지 더해지면서 한국 경제는 1980년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석유 의존도가 높아지던 시기였습니다.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산업 구조가 변화하던 와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석유화학공업이 발달해 플라스틱 제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자동차나 조선, 건설 등 거대한 장치 기반 제조업의 발달에 따라 석유의 수요가 커졌습니다. 이제 막 가난에서 빠져나와 본격적인 공업국가로 가던 때 한국 경제는 ‘오일쇼크’라는 거대한 암초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지난 2005년 3월 6일 발간된 ‘오늘의 세계경제’를 보면 1950년대 이후 2000년까지 4번의 유가 급등 사례가 있었습니다. 1970년대에 1, 2차 오일쇼크, 1990년대 걸프전을 겪으면서 한 차례, 2000년에 한 차례씩이었습니다. 이때마다 한국 경제는 정부 주도 아래 민간과 기업들이 합심을 했습니다. ‘위기’란 것을 강조했던 때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한국의 기술 역량이 발전하면서 석유 의존도를 점차 줄여갔고, 자원 수입처 다변화 전략에 따라 국제 유가 급등에 따른 충격 정도는 덜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국제 원유 가격은 한국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안이 나옵니다. 석유 사용에 대한 효율성을 높이거나 혹은 우리나라 주변에 석유가 있나 탐사를 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중돈 진출도 활발해집니다. 그곳 오일 달러와 자원을 확보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좁은 한국 시장에 머물던 건설 기업들에게는 기회였습니다. 건설사들은 그 시기 ‘주도주’처럼 떠 올랐습니다. 한국 경제 발전의 상징이 됩니다. 


중동 특수에 따란 건설 호황으로 주식 시장은 상승세를 달립니다. 부동산 시장도 강남 개발 특수를 맞게 됩니다. 경기 과열과 인플레이션, 부동산 시장 과열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정부가 정책적으로 금리를 높이면서 일시적인 경기 하락 수순을 밟게 됩니다. 호황 뒤 거품 붕괴 그리고 위기가 공식처럼 되풀이되는 것이지요. 예상치 못했던 ‘석유 파동’이라는 외부 변수까지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면서 한국 경제는 다시금 혼돈에 빠집니다. 


◇1차 석유파동


1차 석유 파동은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발발합니다.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의 무기화를 선언하고 금수 조치를 실시하면서 촉발됩니다. 


중동전쟁은 이스라엘과 아랍세계의 충돌입니다. 1차부터 3차까지는 이스라엘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이스라엘 엘리트들의 단합력이 높았고 미국 등 서구 국가를 후견으로 둔 덕분입니다. 이제 막 독립했던 아랍국가들의 대응력 부족 등이 얽혔습니다.  그러나 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을 패망을 우려할 정도로 위기를 겪습니다. 



기본적으로 중동 지역 내 전쟁 혹은 정정 불안은 국제 유가를 끌어올리는 주요 원인이 됩니다. 국제 사회가 중동 세계 안정을 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합니다. 전쟁에다가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 무기화로 1973~1974년 국제 유가는 널뛰듯 뜁니다. 


실제 당시 국제 유가는 1973년 말 3달러에서 1974년 초 13달러로 상승합니다. 짧은 기간 국제 유가가 4배로 뛴 것입니다. 한국이 겪었던 공급 차질은 하루 430만 배럴에 달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석유 탐사에 박차를 가합니다. 산유국으로서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였죠. 1차 석유 파동이 터지고 마음이 급해진 한국 정부는 1974년 1월 일본과 함께 제7광구 주변을 공동으로 탐사하기로 협정까지 맺었습니다. 


산유국에 대한 꿈이 어찌나 컸는지 1976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포항에서 석유가 발견됐다’고까지 공식 발표를 합니다. 실제 1975년 12월 포항 영일만 근처 시추공에서 시커먼 액체가 솟아 나왔습니다. 원유로 추정되는 액체였습니다. 다 합쳐봐야 드럼통 한 개 정도의 소량이었고, 성분도 대부분 경유 쪽이었던지라 경제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훗날 판명됐습니다. 석유 시추 때 쓰던 연료가 흘러들어 갔다는 설이 나올 유력하게 제기될 정도였죠. 


더불어 우리 정부는 중동 국가들과의 외교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우리 기업들의 중동 진출도 적극 돕습니다. 특히 건설사들이 많이 진출합니다. 당시 중동 국가들은 석유를 팔아 얻게 된 오일 달러를 갖고 도로나 항만 등 인프라 건설에 나섰습니다. 이들 건설 프로젝트를 우리나라 기업들이 수주한다면 외화 획득은 물론 그 나라와 관계를 돈독하게 가져가는 일거양득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경향신문 


이때부터 한국 건설의 중동 신화가 시작됩니다. 자원도 기술도 자본도 부족한 나라에서 남는 것이라면 오직 사람이었던 한국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 것입니다. 1960년대 간호사와 광부, 베트남 파병에 이어 활발해진 우리의 인력 수출이 되는 셈입니다. 


전쟁과 가난을 겪었던 세대였던 터라, 한국 건설 노동자들은 중동에서 엄청난 호평을 받습니다. 다른 나라 노동자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근면과 성실성으로 인정받았습니다.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단골로 실릴 정도가 됐습니다. 


주식시장에서도 한국 건설기업들은 인기주가 됩니다. 2020년 바이오와 모바일주가 높은 상승률로 주목받은 것처럼 1970년대 건설주가 주목을 받습니다. 


예컨대 중동 진출이 한창이던 1977년 증시 거래 대금 중 건설주 관련 거래가 20%를 차지할 정도가 됩니다. 건설주들은 유상증자 등도 활발히 하면서 자금을 조달합니다. 그야말로 건설주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것입니다. 거래소에서 건설주 전체에 대한 투자 주의보를 발령할 정도가 됐습니다. 


시장의 기대에 건설주들은 실적으로 부응했습니다. 1973년 중동 건설 수주액이 1억 7400만 달러 정도였는데 1978년에는 81억 달러로 커집니다. 


건설주 호재를 불렀던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서울 강남의 개발 붐입니다. 1970년대 들어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부동산 투기 붐이 일어납니다. 1973년과 1974년 1차 석유파동을 이겨나가는 과정에서 해법을 찾은 한국 경제가 호황을 맞았고, 부을 이뤘던 것입니다. 1978년 8월 부동산 투기 열풍을 우려한 정부가 투기 억제책과 지가 안정을 위한 대책까지 내놓습니다. 시장 금리도 상향 조정합니다. 


영화 강남1970이 포스터 


여기서 드는 기시감. 위기 직전에 호황이 반드시 있고 부동산 등 자산 거품이 조성된다는 점입니다. 경기 과열을 우려한 정부가 금리 인상에 나서고, 이에 따라 경기가 급속히 식으면서 경기 하강이 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한국 경제가 외부 요소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외부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 그 위기가 언제 어떻게 생길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1979년. 현실화됐고 한국 경제는 침체의 늪에 빠집니다. 건설주는 곤두박질쳤고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합니다. 


◇2차 석유파동


불행은 예기치 않게 옵니다. 1979년 이란 혁명과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입니다. 중동 정세가 급속히 안 좋아지면서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납니다. 



이란 혁명은 1979년 일어났습니다. 입헌 군주제인 팔라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최고 권력을 갖는 신정 체제로 변화되는 결과가 일어난 것이죠. 친미국가였던 이란은 이때부터 미국의 적성국가가 됩니다. 


그즈음 산유국이었던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합니다. 산유국들의 정정 불안으로 석유값은 올라가게 됩니다. 1979년 초 배럴당 15달러였던 국제유가는 39달러로 2.6배 상승합니다. 단 5개월 만입니다. 


한국 경제는 1차 석유 파동을 겨우 이겨내고 안심할 상황이 됐는데, 2차 석유 파동까지 겹치면서 흔들립니다. 여기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10.26 사태로 암살되면서 권력의 공백까지 생깁니다. 분단국가에서 전쟁 불안까지 고조됐습니다. 한국 경제는 그야말로 쇼크 상태에 빠집니다. 주식 시장은 극심한 혼란에 빠집니다. 


국제적으로 일었던 인플레이션도 한국 경제에는 악재였습니다. 2차 석유파동에 따른 유가상승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경기는 안 좋은데 물가가 올랐던 상황인 것입니다. 에너지원인 석유의 가격이 오르면서 물가가 경기와 무관하게 뛰게 됩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급격한 물가 상승을 잡기 위해 금리를 21%까지 인상합니다. 미국 등 외채를 끌어다 쓰고 있던 한국과 같은 비산유 국가들은 ‘울고 싶은 데 뺨까지 맞게 된 격’이 됩니다. 석유값에 달러값까지 오르게 되었고 대통령 공백이라는 초유의 불안 사태에 한국 경제는 매우 불안하면서 위험한 상황을 맞게 됩니다. 


실제 1980년 한국 경제 성장률은 1.7% 역성장을 기록합니다. 직전 해였던 1979년 경제성장률이 8.6%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때 위기가 한국 경제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줬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반면 물가 상승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1979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18%에 이릅니다. 물가가 더 오르기 전에 미리 사다 놓자는 사재기 열풍까지 붑니다. 


중동 불안에 중동 붐도 사그라듭니다. 인플레이션 우려에 따른 금리 상승으로 부동산 투기 붐도 잠잠해집니다. 건설주의 인기가 식게 된 것이죠. 


이후 한국 경제는 새로운 산업군 육성에 나서는데 그게 바로 TV 등 전자업종입니다. 삼성전자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들 기업들은 1980년대 3저 호황, 1988년 올림픽 특수를 누리며 한국 경제를 이끕니다. 


◇교훈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호황 뒤에는 반드시 위기가 오게 되고, 그 위기를 극복하면 또 다른 호황을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잠재성장률은 떨어진다고 해도 호황과 불황의 반복적인 패턴은 계속됩니다. 1970년대 한국 경제는 이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또 하나. 한국 경제는 소규모 개방 경제로 외부 변수에 취약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설령 외부 위기에 우리가 적절히 대응한다고 해도, 또 어떤 위기가 올지 미리 예상하기 힘듭니다. 우리의 노력과 무관하게 우리 경제는 외부 변수에 따라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2022년 현재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추가로 올릴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도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높기 때문입니다. 2020년 코로나19 위기와 함께 풀었던 시중 자금을 회수하지 않으면 우리 경제에 악영향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연착륙 시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1970년대 2차 석유파동처럼 외부 쇼크는 국내에서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설령 포착이 된다고 해도 그게 어떻게 우리 경제에 영향을 미칠지 예측하기 힘듭니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처럼 외부 위기를 안이하게 판단하고 있다가 더 큰 위기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적절한 산업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큰 손해를 보거나 큰돈을 벌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2020년 말부터 불어닥친 메타버스나 NFT 열풍에 기대를 거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일 수 있습니다. 



다만 한 번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 시장 금리가 오르는 추세에 있다는 점입니다. 금리 상승기에 증시는 보통 부진했습니다. 경제 위기가 오는 시점도 금리 상승기에 몰려 있습니다. 여기에 이란 혁명과 같은 예상치 못한 외부 변수가 더해지면 위기는 눈덩이처럼 커지게 됩니다. 


투자와 자산 관리에서도 이 같은 측면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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