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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팟캐김 Jan 23. 2022

[경제위기란?-12] 3저호황

IMF 외환위기 전 화려했던 때 

이번에 나눌 주제는 3저 호황에 대한 얘기입니다. 1980년대 '국제 유가', '국제 통화(달러)', '국제 금리'가 낮게 유지되면서 한국 경제에 호황을 가져다줬던 때를 의미합니다. 이 시간은 짧았지만 너무나 강력했고 달콤했습니다. 10년 뒤 있을 외환 위기가 오게 되는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이 3저호황은 1979년 2차 중동 오일쇼크가 진정되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생겨난 것이기도 합니다. 불황 뒤에 호황, 호황 뒤에 다시 불황이 온다는 경기 순환의 역사를 절실하게 보여주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호황이 있으면 반드시 불황이 옵니다. 경기 순환의 속성상 결코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처절하게 맞게 되는 원인이 바로 이 3저 호황에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3저 호황 당시 한국 


1980년대 중후반. 이때를 기억하시는 분은 그때를 그리워하며 향수에 젖어들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국뽕의 시대가 아닐까요. '세계 최빈국에서 중진국으로 진입했다는 자신감', '아시아 선도국가로 떠올랐다는 성취감', 그리고 '우리 모두 잘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가득했던 때이기도 합니다. 



실제 1986년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고, 중국과 막판까지 1위 다툼을 합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하면서 세계 4위를 합니다. 또 1986년 32년 만에 월드컵에 진출 선전합니다. 


전 1986년 한국의 월드컵 진출을 상징적인 사건으로 꼽고 싶어요. 32년 전 1954년 첫 출전한 한국은 세계 최빈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였습니다. 월드컵에 진출했는데 스위스까지 갈 여비가 없어 국민 모금을 했어야 했습니다. 경기 전날 선수들이 직접 자신의 등번호를 유니폼에 경기 전날 꿰매야 했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 헝가리와의 축구 대결에서 한국이 9 대 0으로 졌지만 해설자는 오히려 한국을 격려합니다. 이제 막 전쟁을 끝내고 나온 나라라면서 '박수를 쳐주라'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랬던 한국이 32년 만에 월드컵에 진출해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불가리아를 만나 선전합니다. 이탈리아는 한국에 3대 2로 따라 잡히면서 고전하기도 했습니다. 과거 9대 0, 7대 0으로 지던 것과 비교해보면 너무나 많이 성장하고 자랑스러운 나라가 됐던 것이죠. 



석유파동 후 안정을 찾게 된 국제 유가 


1979~1980년 한국은 산업화 이후 최악의 시기를 보냅니다. 1979년 2차 석유 파동으로 국제 유가는 배럴 당 40달러까지 치솟습니다. 유가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물가는 전반적으로 크게 오릅니다. 1980년 한국의 물가 상승률은 28.7%를 기록했고 성장률은 -1.7%로 집계됐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되고 신군부 세력의 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에 따라 전국이 불안하던 시기였습니다.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기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립니다. 은행 시중 금리는 이보다 더 높게 형성됩니다. 해외 차관이 많은 순채무국인 한국에게는 또 다른 악재였습니다. 이자 부담이 덩달아 커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연준의 기준금리가 20%라는 얘기는 달러에 붙는 기본 금리가 20%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신흥국보다는 미국 달러 자산에 대한 투자가 늘게 됩니다. 남미를 비롯한 신흥국은 외화 유출에 따른 경기 악화에 비명을 지릅니다. 


그러나 위기는 또 다른 기회를 낳습니다. 불황은 앞으로 올 호황의 예고편과 같죠. 그 실마리는 국제 유가에서부터 풀립니다. 유가가 안정세를 찾게 된 것입니다. 


그즈음 국제 유가는 세계 각국은 원유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한국의 산업 구조도 전자산업 위주로 재편됩니다. 원유를 덜 쓰는 방향으로 간 것입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원유 의존도를 줄여가는 한편 새로운 유전 확보에도 나섭니다. 중동의 석유 무기화는 무력화됩니다. 결국 중동 국가들은 원유 증산을 해서 국제 유가를 낮춥니다. 1980년 배럴당 40달러였던 유가는 1980년대 중반 들어 배럴당 20달러로 떨어집니다. 


국제 유가의 하락으로 한국 경제는 호재를 맞습니다. 치솟던 물가는 안정을 찾게 됩니다. 유가 하락으로 수입 원가도 낮아집니다. 가공무역 국가인 한국이 성장의 기회를 찾게 된 것입니다. 긍정적인 기저효과였던 셈입니다. 


고금리에서 저금리로, 강달러에서 약달러로 


유가 하락의 혜택은 미국도 받게 됩니다. 유가가 떨어지면서 인플레이션 압력도 그만큼 낮아지게 된 것이지요. 조였던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의견도 개진되면서 금리가 낮아지게 됩니다. 20%였던 금리는 10%대로 떨어집니다. 


여기서 금리 하락에 따른 경기 상승효과가 나타납니다. 시장에 유통되는 돈의 양이 많아지고 이는 투자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산 시장 가격이 상승하면서 경기 회복 순환 곡선을 타게 됩니다. 소비가 늘게 되고 한국 등 개발도상국의 수출길도 더 넓어집니다. 


강달러에서 약달러로 전환이 되면서 국제 투자자들은 다시금 신흥국에 관심을 보입니다. 한국과 같은 나라들이 투자 유치가 쉬워지고 보다 싼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게 됩니다. 이 돈은 기업들의 투자로 이어지게 되고 더 많은 생산을 하게 됩니다. 



게다가 달러 약세는 수입물가 하락의 이점도 가져다줍니다. 원유 등 원자재를 싸게 조달해서 팔 수 있게 됩니다. 한국과 같은 가공무역 국가에게는 호재였습니다. 


결정적 변수는 1985년 플라자 합의입니다.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이 합의에서 일본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엔고를 용인합니다. 달러 가치를 낮추는 대신 자신들의 엔화 가치를 높인 것입니다. TV와 자동차 등 일본 제품과 경쟁해야 했던 한국 제품들은 가격 경쟁력 면에서 일본 제품보다 더 우위에 오르게 됩니다. 


실제 1985년 1달러에 260엔이었던 엔·달러 환율이 1988년 1달러에 123엔으로까지 떨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일본 제품을 수입하는 미국 무역상 입장에서는 더 많은 달러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이에 한국산 제품에 대한 수출길이 열립니다. 비싸진 일본 제품보다 저렴한 한국산 TV와 자동차 등을 수입해 오는 것이죠.  


수출 중심국가인 나라에서 수출이 늘면 경제는 성장합니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 3년 연속 경제성장률 10% 이상을 기록합니다. 지금으로 봤을 때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경제성장률인 것이죠. 


가난에서 벗어난 한국인들의 의식 구조도 변합니다.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매지 말고 우리도 쓰고 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말이죠. 그 정점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 됩니다. 



달콤했지만 짧았던 3저 호황 


영원한 호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불황이 없는 것처럼요. 이 3저호황 덕에 가파르게 성장한 한국 경제는 이후 가파르게 하락합니다. 바로 IMF 외환위기입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사회와 산업 구조도 바뀌어야 하는데, 한국은 그 시기를 놓쳤습니다. 고도 압축 성장에 취해 이를 돌아보지 못했던 것이죠.  "빚을 늘려 투자를 하고 성장을 하자"라는 전략이 언제까지 계속 통할 줄 알았습니다. 

 

국제 경제도 바뀌기 시작합니다. 1987년 블랙먼데이를 통해 1985년 플라자합의의 부작용이 직접적으로 일어납니다. 일본 경제도 1980년대 후반 자산 거품으로 성장하다 1990년 결국 터지고야 맙니다. 


그런데 한국은 바뀌지 않고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바깥 변화에 눈을 뜨지 못합니다. 기업은 계속해서 외채를 끌어다 투자를 하고 정부는 경상수지 적자를 용인합니다. 


결국 수출이 잘되지 않으면서 기업의 빚 부담은 커지고, 정부의 빚 부담은 위험 수준으로 치닫습니다. 너무나 일찍 터트렸던 샴페인이 재앙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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