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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팟캐김 Jan 23. 2022

[경제위기란?-13]IMF외환위기

한국경제 부도의 날 

영광의 서울올림픽(1988년)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지 10년. 1998년 한국인들은 절망의 수렁에서 새 희망을 찾고 있었습니다. 1997년 12월 시베리아 추위처럼 다가온 외환 위기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가혹한 금융 처방을 불러왔습니다. 빚으로 버티던 기업들은 도산하고 방만하게 운영되던 은행들은 통폐합됐습니다. 그 시대 많은 가장들은 일자리를 잃어야 했습니다. 


올림픽을 기점으로 세계 무대에 섰던 한국이 다시금 세계의 벽에 부딪힌 것입니다. 그즈음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이 네덜란드에 5대0으로 졌을 때 우리 국민들이 목놓아 울었던 것도 ‘무너진 지난 10년의 자존심’에 있었을 것입니다. 


선진국을 향해 항진하던 중진국 한국은 왜 위기를 맞아야 했던 것일까요? 그 위기는 한국 사회를 또 어떻게 바꿨을까요? 



한국 경제에 있어 일본이란 존재 


1950년 한국전쟁 후 폐허 속에서 시작한 한국. 시작부터 일본 경제에 의존하며 성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은 1960년대 이미 세계 2위 산업대국으로 성장했고, 한국이 필요로하는 자본과 기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젠 장수기업이 된 농심, 롯데 등 식품기업들도 그 시작은 일본 기술과 장비의 도입이었습니다. 산업화 방식 예컨대 정부와 기업이 유착해 성장하는 것도 일본의 방식에서 그대로 따왔습니다.  


자동차 산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예로 1995년 삼성그룹이 자동차 사업을 시작할 때도 파트너사는 일본 기업이었습니다. 


"일본을 배워야 한다"라는 게 20세기 한국인들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20세기 초 식민지 수탈의 아픔을 줬던 일본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 일본을 따라했고 많은 노력을 했던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여기에 전후 미국의 원조와 일본의 자본과 기술, 우리 한국인들의 근면함과 교육열이 초기 한국의 산업화 기반을 다지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외환위기를 겪고 국제통화기금(IMF) 주도 아래 산업 구조조정을 단행했던 그 이후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다릅니다. 대부분의 한국 젊은이들이 일본 문화에 대해 좋아할지 몰라도 아버지 세대처럼 ‘배워야한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한국은 성장하고 국제적으로도 당당해졌습니다. 



1980년대 3저 호황을 누리며 커진 한국 

가난했던 한국. 1980년대 들어 일본과 국제 시장에서 경쟁하게 됐습니다. 일본 제품을 제치고 미국 시장에서 팔리는 일까지 생겼죠. 


1985년 플라자합의로 엔화 가치가 높아지게 되면서 일본 기업들의 제품이 상대적으로 비싸지게 됩니다. 일본과 유사한 경제 구조와 유사한 제품군을 생산해 일본 제품보다 저가로 팔고 있던 한국 기업들에게 기회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자동차를 비롯해 TV 등 전자제품의 수출이 줄을 이었고, 섬유를 비롯한 노동집약적 제조업 수출도 성과를 냅니다. 경쟁국 일본기업의 제품이 가격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 나무위키 


1980년대 초중반 저유가, 저금리 등에 따라 한국 경제는 호황을 맞게 됩니다. 앞서 언급한 3저 호황입니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이후 국민적 자신감이 높아졌고, 우리 국민들의 의식 수준 또 한 높아집니다. 


의식 수준이 높아지게 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우리 국민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한국전쟁 후 우리를 짓눌렀던 가난에서 ‘어느정도 벗어났다’라는 뜻도 됩니다. ‘무조건 아끼자’에서 ‘이젠 좀 쓰고 즐기자’로 바뀐 것이죠. 수출에 이어 소비까지 늘어나니 한국 경제는 고성장 호황을 맞습니다. 



엔고에 빠진 일본 경제 거품 키우다 추락 


일본은 어땠을까요. 플라자합의로 수출 가격 경쟁력이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1980년대 후반까지는 버틸 여력이 있었습니다. 일본 제품에 대한 선호도도 여전했고요. 엔화 가치가 올라감에 따라 일본 기업과 일본 국민들은 국내외 자산 투자에 나섭니다. 일본 부동산은 물론 미국이나 유럽 부동산까지 쇼핑을 합니다. 


일본 정부도 일시적인 경기 둔화를 막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가져갑니다. 이에 따른 자산 시장 가격은 더 오릅니다. 이른바 일본 부동산 거품이 커지게된 것입니다. 


자산 가격 상승은 일본 기업들의 실적 개선으로 이어집니다. 물건은 팔리지 않는데 보유한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서 실적이 좋아지는 ‘일종의 착시효과’였습니다.  


부동산 시장이 지나치게 과열되자 일본은행은 금리를 올리며 속도 조절에 나섭니다. 금리가 오르고 자산시장 거품이 빠지자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리스크가 튀어나옵니다. 긴 불황의 시작이었습니다. 세계정상급 부동산 가격을 경험했던 일본 경제는 디플레이션의 시대를 맞게 됩니다. 

출처 : 나무위키 


견디다 못한 일본이 1995년 엔화의 평가절하를 합니다. 미국도 이에 동조합니다. 바로 역플라자합의로 불리는 사건입니다. 일본 엔화 가치를 높여 일본 제품의 가격을 비싸게 만들면 대일 무역수지 적자가 개선될 알았는데, 일본 제품의 빈 자리를 한국 제품 등이 파고들었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무역적자는 더 커지는 역효과가 나타났습니다.  달러 약세가 되면 바뀔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신 미국은 자본수지 흑자를 통해서 경상수지 적자를 보충하는 정책으로 돌아섭니다. 디플레이션에 빠진 일본 경제의 사정을 봐주기로 한 것도 있습니다. 


여러분. 달러가 강세를 나타내면 신흥국 경제는 '아작'이 납니다. 미국으로 달러가 회귀하는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태국을 시작으로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 외환 위기가 일어나게 됩니다. 돌아돌아 그 여파가 한국으로까지 오게 됩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상황이 녹록지 못했습니다. 무역수지는 물론 경상수지까지 적자를 나타내면서 계속해서 외채를 빌려와야 했던 상황입니다. 그나마 1980년대 수출이 늘고 약달러에 금리까지 낮아서 버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호황의 그늘에 가려졌던 약점이 노출되기 시작합니다. 일본이 10년 앞서 겪었던 ‘호황의 그늘에 가려졌던 약점’을 노출시켰던 것처럼. 



1990년대 중반 즈음 한국 경제 


당시 한국경제 상황은 어땠을까요? 


우선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생활 수준이 개선되면서 국민들의 인건비가 높아집니다. 한국의 전통 수출상품이었던 섬유와 신발과 같은 노동 집약적 상품부터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일본 제품의 가격이 떨어지면서 전자, 자동차 업종의 수출 경쟁력도 낮아집니다. 한국 기업, 특히 수출기업들에게는 실적 부진이 본격화된 것이죠. 


기업들은 물건이 팔리지 않는 상황인데도 계속해서 대출을 받아 투자를 합니다. 1990년대초 금융 자유화로 해외 외채 도입이 쉬워진 것도 이를 부채질합니다. 단기자금 회사들이 금리가 낮은 단기 외채를 들여와서 기업들에게 장기 대출을 내줍니다. 


여기서 단기채와 장기채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기채는 금리가 장기채보다 쌉니다. 빚을 내준 시간이 짧다보니 떼일 가능성이 낮기 때문입니다. 


단기채를 갖고 와 장기대출을 해주는 것은 금융사가 돈을 버는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1년 정기예금을 모아서 10년짜리 대출을 내준다고 생각해보세요. 요새 정기예금은 이율이 높아봐야 1.5%인데, 10년짜리 대출은 3%를  훌쩍 넘죠. 은행들은 그 사이 금리 차로 이익을 올리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에 뱅크런이 일어난다, 1년짜리 정기예금을 찾으러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하면 은행은 망하게 됩니다. 돈을 돌려줄 수가 없으니까요. 당장 대출을 회수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런 구조적 약점은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는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경상수지 적자가 고질적으로 계속됩니다. 무역수지에서 적자를 기록하고, 자본수지에서도 적자를 기록합니다. 달러는 계속 유출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달러는 빌려와야합니다. 외채 부담은 커지게 됩니다. 

한국은행 (ECOS 경제통계시스템)

위기의 발발..트리거는 단기외채 


여기에 1980년대와 1990년대 고도성장을 겪으면서 부동산 가격 거품도 높게 형성됩니다. 대기업들의 문어발식 차입 경영으로 기업과 금융사마다 빚이 늘어나 있게 됩니다. 


외부적으로 핫머니라고 불리는 환투기 세력들이 또 아시아와 남미를 공격했습니다. 이들 현지 통화에 공매도를 건 것이죠. 고도성장을 하면서 자산시장 거품이 커졌고 고정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입니다. 이들 통화 가치는 경기 하강에 따라 떨어질 수 밖에 없었는데, 각 나라 정부는 억지로 환율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무역수지와 경상수지 모두 적자를 기록하면서 달러는 계속 나가고, 그 달러는 빚으로 돌아오고, 기업들의 수출은 줄면서 실적이 악화됩니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한국 정부가 예상 못한 게 있었습니다. 바로 '뱅크런'입니다. 


뱅크런은 한꺼번에 돈을 찾으려고 채권자들이 몰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씩 온다면야 별일이 없겠지만, 한꺼번에 몰리면 감당하기 힘들어집니다. 예를 들면 '야 A은행 망한다'고 하면 A은행 예금자들이 당장 창구로 몰려들겠죠. 그 사태가 일어납니다. 


1997년 11월 5일 블룸버그통신은 '한국가용 외환 보유고 20억달러'라고 보도합니다. 세계 주요 언론이 한국 경제 위기를 대대적으로 전합니다. 


참고로 블룸버그는 투자자들이 유료로 보는 뉴스입니다. 투자 업계에 바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죠. 한국 시장에 자산이 있는 해외 자본들은 당장 이를 빼서 밖으로 나갑니다. 


한국정부는 끝까지 IMF 구제금융이라는 굴욕을 피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다 거의 뒷덜미를 잡히다시피 해서 오게 됩니다. 


사실 이때까지 한국 정부는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일본과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전통적인 우방이었고, 일본은 언제든 우리가 급할 때 돈을 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의 거부, 결국 IMF행 


그런데 일본은 (우리 입장에서) 얄밉게 그 도움의 손을 거절합니다. 일본도 상황이 녹록지 않았지만, 한국의 위기에 빨려들어가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영삼 정부에서 경제수석을 지냈던 김인호 씨의 회고록을 보면 IMF 구제금융을 피하기 위한 대안으로 일본 중앙은행과의 통화스와프를 요구하고, 일본 금융사들이 한국에서 자금을 회수하지 않도록 요청하자는 안이 나옵니다.


한국은행은 일본은행(일본의 중앙은행) 총재에게 직접 긴급자금지원 협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합니다. 결국 당시 한국은행 실무진에서는 IMF 구제금융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국제 신용사회에서 '사실상의 부도'가 선언되고 우리 국민들은 뼈를 깎는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런 고통의 시간, 사실상 국제적으로 한국이 망한 거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았을 때 우리 국민들이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코흘리개까지 집안의 달러를 들고 나오는 등 전국적인 달러 확보에 나섰고요. 



위기의 극복 


한국 경제가 사실상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환율이 급등합니다. 달러와 원화의 관계에서 원화의 가치가 많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해외 투자자 누구도 자신이 갖고 있는 달러를 원화로 바꾸기를 주저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 투자자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원화를 줘야하고 이자도 더 많이 줘야 합니다. 바로 고환율과 고금리입니다.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원화는 예전보다 더 싸지고 수익률은 좋아졌으니 우리나라 원화 자산을 사러 들어오게 되죠. 그래서 '바이 코리아'라는 말이 유행을 했고요. 


해외 투자자들은 우리 국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위기 극복을 해낼 것이라고 믿고 들어옵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의 금싸라기 같은 귀중한 자산들이 싸게 팔려나가는 꼴이 됐지만, 당시 그게 우리에게는 최선이었습니다. 


정부는 금융회사와 기업을 대상으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합니다. 부실기업들이 상당수 정리가 됩니다. 정부는 나서서 부실화된 은행을 정리하고 합병하고, 중요한 은행에 대해서는 세금을 투입해 살리는 등의 노력을 합니다. 조그마한 군소 은행이 사라지고 큰 은행을 통합됐고, 은행이 망할 염려가 없어 보이면서 금융 시장은 안정을 찾아갑니다. 결과적으로 산업 구조조정이 외환위기라는 고통을 겪으면서 진행됩니다. 


뼈를 깎는 고통 속에 한국은 위기를 이겨냅니다. 10년뒤 글로벌금융위기를 큰 어려움없이 이겨냅니다. 그뒤로 10년뒤 코로나19를 비교적 잘 대처하면서 선진국 한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입니다. 


하지만 이후로 우리는 7% 이상의 고도성장을 더이상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저성장 저물가의 선진국 경제에 진입한 것이죠. 


일본처럼 되느냐, 다른 길을 가느냐 


1997년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혹독한 외환위기와 후유증을 겪었지만 한국은 꾸준히 성장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일본은 침체를 겪어왔습니다.


50년은 날 것 같았던 격차는 점점 줄었습니다. 국민 소득은 물론 구매력 부분에서도 한국은 일본에 뒤처지지 않습니다. 그 나라의 부도 가능성을 계량화한 크레딧디폴트스왑(CDS)프리미엄도 한국과 일본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해외 유명 신용평가사들은 한국의 상황을 더 높게 치기도 합니다.


구매력을 기준으로 한 평가에서도 한국이 일본을 앞섰다는 것은 이미 구문(舊文)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7년 구매력평가지수(PPP) 기준 한국은 일본을 앞섰고 2020년까지 이 추세가 이어져 왔습니다.


아직 1인당 GDP는 일본이 앞서 있고 전체 GDP도 일본이 월등히 한국을 앞서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 인구와 경제 규모면으로 봤을 때 한국이 일본을 앞설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1인당 GDP와 삶의 질, 국격 면에서는 한국이 일본을 앞설 날도 머지 않은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사태에서 드러난 양국 간 사회 시스템만 놓고 봤을 때 한국이 더 나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활로를 찾기 어려운 일본, 그래도 꾸준히 성장한 한국.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듯이, 일본내 혐한은 이 같은 자신감의 상실일 것이라는 얘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덧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한국과 거기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들은 예전 부모나 할아버지 세대처럼 일본에 주눅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일본도 이제는 한국의 성과에 대해서 인정을 해야겠지요.


물론 일본보다도 더 심각한 저출산 상황, 남북 간 대치 상황 등은 한국 경제 성장의 걸림돌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일본 역전의 순간에서 주저 앉을 수도 있습니다. 한반도 내부의 쌓인 문제 때문이지요.


(물론 이런 게 극복된다면 한국은 더 큰 성장을 할 것입니다. 북한과의 긴장관계가 풀어지면 우리의 경제영토가 더 넓어지는 효과가 있을 것이고. 진짜 일본역전의 계기가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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