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편은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 당시 한국 경제 상황에 대한 얘기입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한국은 위기를 잘 넘긴 국가에 속합니다. 우리는 그 때 이야기를 하면서 '미국발 금융위기로 우리 경제가 어려워졌다'고 얘기합니다. 미국발 금융 위기가 '트리거' 역할을 했지만, 전세계적으로 부동산 거품은 물론 신용 거품 또한 컸습니다. 규모의 차이가 컸을 뿐 위기가 생길 수 밖에 없는 맥락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다를 게 없었다는 뜻입니다.
다만 위기는 또다른 기회를 만듭니다. 본 실력이 드러나 경쟁자 간 격차가 드러나는 기회입니다. 한국은 선진국 경제로 올라갈 수 있는 계기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해 맞았다고도 봅니다.
물론 지나서야 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그때도 지금도 우리는 힘겨운 시기를 고통스럽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2008년 10월 리먼브라더스사의 파산 직전 한국 경제는 어땠을까요? 우선 1990년대 초중반 발발했던 외환위기의 상흔을 치유해가던 중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호경기를 맞았고 부동산가격이 크게 올랐습니다. 코스닥이 붐을 일었고, 해외 투자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중하위 신용자들을 대상으로 지나치게 많이 발행됐던 신용카드가 문제를 일으키며 2000년도 초중반을 크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 가려졌을 뿐 그때도 우리는 충분히 힘들게 살았습니다.
표 출처 : https://flatworldbusiness.wordpress.com/
◇닷컴버블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중반 외환위기를 이겨내면서 한국 경제도 세계 기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 즈음 한국은 선진국 경제를 빠르게 쫓아가면서 격차를 줄여가던 '패스트팔로워'로 입지를 다집니다. 이젠 산업의 변화 시점이 일본 등 선진국과 큰 차이가 없어질 정도가 됩니다.
이런 대표적인 예 하나가 정보혁명입니다.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서비스산업 발달에 이르기까지 선진국과 수 백년, 수십년의 격차를 보였지만, 정보혁명만큼은 선진국과 큰 차이를 안 보입니다. 오히려 선도적인 투자로 선진국보다 빠르게 앞서나갑니다.
실제 김대중 정부는 새로운 한국의 먹거리를 찾기 위해 초고속인터넷 통신망 구축을 국가 전략적으로 펼칩니다. 이와 관련된 비사가 하나 있는데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을 직접 김 전 대통령이 초청해 그의 조언을 구한 것입니다. 손 회장이 강조했던 것이 정보화고속도로 구축입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
결과적으로 이 전략은 통했습니다. 이는 1960년대 경부고속도로를 만들고 서울과 부산을 중심으로 한 물류망을 중심으로 공단을 만들었던 박정희 정권 때랑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가 기반을 깔아주고 기업들이 이를 키울 수 있게 해준 것이죠.
지금은 대기업에 속하는 네이버, 일본 증시에 상장된 넥슨, 게임주 대장주가 된 엔씨소프트도 초고속인터넷통신망을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른바 한국도 닷컴기업의 시대를 맞게 된 것입니다.
세계 최대 경제대국 미국도 닷컴기업들이 주목받았습니다. 인터넷이 새로운 산업의 출현을 유도할 것이라는 예상에 따라 많은 기업들이 나온 것이죠. 이중 하나가 아마존과 구글이 되겠습니다.
문제는 그때까지 닷컴기업들이 돈을 벌줄 몰랐다는 데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은 몰리는데, 이들을 모아서 어떻게 돈을 벌지 고민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인터넷 사용자들 대부분도 '인터넷은 공짜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투자만 때려 박아 사람을 모으는 비즈니스는 한계에 이릅니다. 닷컴 기업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무조건' 투자를 받던 시대가 끝나게 된 것입니다. 투자금이 빠져나가면서 많은 기업들은 문을 닫게 됩니다. 나스닥은 폭락하고 코스닥은 위축됩니다.
닷컴버블 붕괴에 따른 증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미국에서 점진적으로 금리를 낮춥니다. 한국도 약간 금리를 낮춥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사태와 직접 비교하기는 힘드나, 한국에도 신용사태가 일어납니다. 바로 카드사태입니다.
◇카드사태
김대중 정부는 초고속인터넷망 구축과 함께 유통망과 결제망의 전자화도 추진합니다. 이중 하나가 신용카드 사용의 활성화입니다. 가맹점주 입장에서도, 신용카드를 쓰는 사람 입장에서도 불편했던 신용카드 사용이, 전자화로 편리해지면서 더욱 대중화됩니다.
그전 가맹점주들은 신용카드 받기가 불편했습니다. 카드 전표를 모아서 카드 회사 혹은 중개사에 가져다주고 그 이후에 돈을 받는 식이었습니다. 바로 현금을 받는 것보다 불편했습니다.
사용자들도 자신이 갖고 있는 신용카드 결제가 되는 가맹점이 있고 안되는 가맹점이 있는 식의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온라인 쇼핑에서 물건을 사고 결제하기에도 불편했습니다.
초고속 네트워크의 발달, 카드 결제를 대행해주는 기업들이 생겨나면서 누구나 카드를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가맹점주가 전표를 모아놓을 필요도 없게 됐죠.
정부도 신용카드 사용 활성화에 힘을 쏟습니다. 신용카드 사용이 전자적으로 기록이 남으니까, 명확한 세수 확보에 편리했던 것입니다. 투명한 결제 거래 문화 확산을 위해 신용카드와 체크카드 등 카드 사용을 장려합니다.
문제는 '카드 사용 문화'가 당시로서는 없다시피했다는 점입니다. 기업들은 카드 가입자 유치를 위해 무분별하게 경쟁했습니다. 카드사들은 가입자 유치를 위해 대학가에까지 좌판을 만들고 가입자를 유치했습니다. 대학생들이 실제 돈을 쓰고 갚을 수 있을지, 빌린 돈을 상환할 능력이 있는지 상관안했던 것입니다.
사회 초년생이나 중저신용자들은 은행보다 편리하게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이들이 쓴 대출과 할부, 결제 외상은 커다란 신용위기를 초래하게 됩니다.
결국 2003년부터 이들의 신용 위기는 카드 사태로 비화됐습니다. 제2금융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게 됩니다. 경기에 찬물이 끼얹는 상황이 됩니다. 정부는 경기 부양책을 내놓고 한국은행은 다소 완화적인 금융 정책을 펼칩니다.
◇투자 붐, 해외 투자와 부동산
2000년대 이후 한국인들은 '잉여 자금'이란 것을 경험해보게 됩니다. 정확히는 저축 외에 투자해 돈을 불리는 '투자'란 것을 알게된 것입니다. 코스닥이 닷컴 벤처기업 붐에 따라 크게 올랐고, 경기가 회복되면서 코스피가 올라가면서 투자 수익을 올린 이들이 생겨납니다. 신문으로 '수익률 몇 %'를 보는 것보다 옆집 철수 아빠가 '얼마 벌었다'가 더 솔깃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은행 금리가 본격적으로 낮아지기 시작했던 시점이 이 시기였다는 것과도 관련있습니다. 성장률이 낮아졌고, 한국은행 등이 완화적인 금융정책을 펼치면서 시중 금리가 낮아집니다. 예적금에 의존해서는 자산을 불릴 수 없다라는 생각을 사람들이 하게됩니다.
이 즈음 투자 붐은 해외 자산으로까지 넓어지게 됩니다. 때 마침 브라질, 중국, 러시아, 인도 등 영토가 넓고 인구까지 많은 신흥국 경제가 고속 성장을 합니다. 이들 자산에 투자를 했던 펀드들이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다는 소식이 알려집니다. 바야흐로 투자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미국 경제도 이들 신흥국 경제의 성장을 돕습니다. 미국이 2000년대 초중반 금리를 낮게 유지했고 전세계적으로 달러는 약세가 됩니다. 달러화 자산에 돈을 넣어서는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국제 투자자들이 하게 됩니다. 고속 성장을 하는 신흥국에 투자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 됩니다.
덕분에 한국 증시와 부동산 등에 대한 투자 열기도 커집니다. 남유럽 관광 국가들도 이 때 호경기를 누리게 됩니다.
투자 금융으로 돈을 쉽게 버는 것에는 우리 정부도 주목합니다. 제조업 경쟁력이 한계에 부딪힌 한국의 새 먹거리로 금융을 지목한 것입니다. 동북아 금융 허브를 만들겠다는 포부 아래 여의도에 큰 건물을 만들기도 합니다.
2000년대 초중반은 골디락스의 시대라고 합니다. 보통 호경기라고 하면, 물가도 따라 올라가는 게 당연지사인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계 공장으로 올라선 중국이 저가로 싸게 팔았고, 달러마저 약세를 보이면서 물가 상승률이 높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이 시대는 2008년 리먼브라더스사의 파산과 함께 온 '연쇄적이면서도 글로벌적인 금융위기'로 끝납니다. 영원한 호황은 없다라는 격언이 맞아떨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호황의 꼭대가기 높을 수록 떨어지는 골의 깊이도 깊을 수 밖에 없다는 것도 함께 보여줍니다.
◇부동산 가격 거품
경기 호황과 투자 붐, 여기에 완화적인(돈을 푸는) 금융 기조. 부동산 가격이 상승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됩니다.
왜 호경기 때 부동산 가격이 올라갈까요. 부동산은 전통적인 인류의 투자 자산입니다.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투자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동시에 주거의 안정도 높일 수 있습니다. 시장에 돈이 넘치고, 경기가 좋아지면 부동산을 사려는 수요가 그래서 많아집니다.
여기에 부동산 불패 신화가 뿌리 깊게 있었던더라 한국은 고도 성장기에 어김없이 부동산 가격이 올랐습니다.
출처 : 한국부동산원「전국주택가격동향조사」 주석 : 월별 주택 매매가격 증감률
실제 카드 사태에 따른 금융 불안정이 진정되던 2006년 전국 부동산 가격 상승률은 11.6%를 기록합니다. 서울 강남의 상승률은 22.7%가 됩니다. 2020년 못지 않은, 아니 더 컸던 부동산 광풍의 시기였습니다.
(2002년 집값 상승률은 2006년보다 더 높았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경기 회복 과정에서 부동산 가격이 높아진 것입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금융위기 전까지는 부동산 광풍의 시대라고 해도 틀린말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1990년대말 외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 정보통신산업이라는 새로운 산업의 성장, 불경기 이후 호경기, 투자 붐의 확대 등으로 부동산 가격은 폭등합니다. 곧 있던 대선에서 여야가 교체되기에 이릅니다.
◇글로벌금융위기 그리고 한국
세계 최대 금융시장 미국이 위기로 소용돌이치자 한국 금융사들도 불안한 눈빛으로 이를 바라봅니다. 대출과 투자에 신중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서민들 입장에서 돈 빌리기 어려운 환경이 펼쳐집니다.
금융 불안은 대출 감소로 이어집니다. 기업들은 투자를 줄이고 서민들은 부동산 매입 계획을 중단합니다. 경기는 축소되고 부동산 가격응ㄴ 하락하게 됩니다.
실제 부동산 가격 추이는 2009년 들어 상승률이 꺾였고 2010년 마이너스로 돌아섭니다. 2011년 잠깐 반등했다가 2013년까지 부동산 경기 하강이 이어집니다. 이때는 서울 시내에서도 미분양 아파트가 속출하던 때였습니다.
'하우스푸어'가 경제신문에서 주요 사회 문제로 다뤄집니다. 부동산 붐이 한창일 때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다 집을 샀던 가장들이 비명을 질렀던 때입니다. 시중 금리까지 높아 각 가계마다 이자 부담이 컸습니다.
한번 꺾인 부동산 경기는 살아날줄 몰랐습니다. 2014년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가 취임 일성으로 '빚을 쉽게 내 집을 살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겠다'라고까지 합니다.
한국 증시는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2007년 10월 월 종가 기준 2064.85를 기록한 후 2009년 2월 1063.03을 기록합니다. 이후 내내 증시는 불안한 모습을 보입니다. 부동산 시장보다 악재와 호재에 민감했던 것입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화끈한 금리 인하와 자산매입 정책 덕에 유동성이 늘어났고 이 돈의 일부가 증시로 흘러들어갑니다. 그러다 여전히 제2 제3의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우려로 주가 하락이 반복되곤 합니다.
비록 증시는 일시적인 회복을 보였다고 하지만 실물 경제는 심각할 정도로 부침을 겪었습니다. 투자가 일시에 중단됐고, 직전 경기 과열에 따른 경기 하강으로 일반 시민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금융 위기가 실물 경기 위축으로 이어진 전형적인 예가 됩니다.
더욱이 한국 경제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 저성장 국면을 본격적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잠재 성장률의 하락이 나타나는 시점이 되는 것이죠. 2% 경제성장률도 겨우 건사할 수 있게 되면서 한국은 새로운 성장 발판을 찾아야하는 시점이 된 것이죠. 달리 말하면 과거처럼 급성장할 수 있는 개도국 경제가 아니라 디플레이션 우려를 해야하는 선진국의 경제와 닮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나마 한국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의 교훈으로 기업들의 줄줄이 도산은 적었습니다. 부채로 연명하던 좀비기업들이 줄었고, 각 기업들도 부채에 대한 경각심을 가졌던 것이죠.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를 겪고 나오면서 한국 경제가 선방하면서 선진국 경제로 평가받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든 위기는 다시 올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로 각 기업들은 고용은 줄이고 현금 보유량은 늘리고, 투자는 소극적으로 가게 됩니다. 잠재 성장률 하락에 시달리는 한국 경제에 더 큰 부담이 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