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팟캐김 Jan 04. 2022

[경제위기란?-10]1970년대 한국의 경제위기

경공업에서 중화학 공업으로

체감적으로 우리는 '늘 경기가 안 좋았다'면서 '고도 성장을 하던 70~80년대에는 일자리가 많지 않았냐'라고 합니다. 그 시대 우리나라가 고도 성장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분명 맞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서도 경기는 순환적으로 위기와 호황을 반복했습니다. 특히 수출 경공업 위주에서 중화학 공업 위주로 한국 산업이 체질 변화하던 때에 성장통 처럼 경기 하강과 위기를 겪었습니다. 


불황에 시달리는 가운데 기업간 담합까지 나타나자 이를 걱정하는 내용의 조선일보 사설. 1972년 2월 26일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고도성장을 하던 그 때도 주요 신문사들은 헤드라인에 '경제 위기'라는 말을 자주 썼다라는 점입니다. '경기가 어렵다'라는 얘기는 달리 보면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어'라는 말처럼 대대손손 쓰여 왔을지도 모릅니다. 


이번 시간은 한국사학보에 실린 이정은 박사님의 논문을 인용해서 내용을 구성했습니다. 제가 전문 연구가가 아니다보니까 이 부분 잘 이해해주시고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산업 구조조정 중 겪게된 70년대 위기 


논문은 '1970년대 초중반 두차례 경제 위기와 박정희 정부의 대응'이라는 제목이고 한국사학보에 실려 있습니다. 


논문의 주요 내용을 보면 한국은 1965년부터 1980년대까지 약 15년 동안 세 번의 급속한 경기 하락 국면을 겪었습니다. 그 때마다 언론은 '한국 경제가 위기'라면서 그 원인을 분석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석이 오늘 날에도 통할 정도로 비슷합니다. 


1960년대 중후반 이후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었던 경공업이 1970년대 들어 한계에 부딪힙니다. 싼 가격으로 가발 등을 팔던 '박리다매' 전략이 들어맞지 않기 시작한 것입니다. 새로운 성장의 모멘텀, 그러니까 한국 경제가 지속적인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산업의 구조조정을 했어야 했습니다. 


1965년 금속 공장 기공식 장면. 대한뉴스 캡처 


첫 경제 위기는 1971~1972년에 옵니다. 1960년대 한국의 산업화 이후 마주하게 된 첫 위기입니다. 이후 1974년부터 1975년까지 또다른 경제 위기를 맞게 됩니다. 두 위기 모두 본격적인 중화학 공업화가 이뤄지기 전 시기로 경공업 위주의 수출이 한계점에 부딪히게 된 시점입니다. 


실제 1971년 1분기부터 1972년 2분기까지 성장률 정체를 기록합니다. 우리가 박정희 정권을 연상하면 생각나는 '수직적 고도 성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정은 박사는 주요 원인으로 '농업과 공업,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 불균형에 따른 이중 구조의 심화', '산업 부문 관련 연계 결여와 자본 시설재나 원자재의 지나친 해외 의존', '금융 비용 및 원리금 상환 부담의 가중' 등으로 봤습니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불균형과 취약성 때문에 발생한 '구조적 불황'이라는 진단입니다. 


이들 분석은 지금도 통하는 분석입니다. '농업과 공업,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 불균형 심화'는 이른바 양극화를 들 수 있습니다. 정부의 지원 정책이 뒤 따르는 산업과 그렇지 않은 산업 간의 격차를 들 수도 있습니다. 


두번째 '원자재의 지나친 해외 의존'은 지금도 풀지 못하는 고민입니다. 소부장이라고 하죠, 소재, 부품, 장비 등의 산업의 국산화는 한국 경제의 풀지 못한 숙제와 같습니다. 2019년 일본이 한국에 대해 나름의 경제 제재를 가한 것도 이런 한국 경제의 약점을 봤던 것이고요. 


또 한국 경제가 이른바 '가공무역', 해외에서 원자재를 수입하고, 일본 등에서 구입한 기계 장비로 조립해 해외에 수출하는 형태였습니다. 한국의 값싼 노동력을 집중 투입해서 성과를 내기 위한 전략이었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해외 원자재와 소재 산업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한계성을 낳기도 했습니다. 


금융 비용 및 원리금 상환 부담의 가중은 기업 부채와 관련돼 있습니다. 이때 민간 자본이 부족하다보니 결국 정부가 들여온 해외 차관을 나눠서 투입하는 식이었고, 민간 입장에서 보면 결국 갚아야할 빚이었습니다. 한국전쟁 후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 밖에 없었던 나라에서, 소재와 부품, 기계, 이것들을 살 수 있는 비용까지 전부 해외에서 조달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 경제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정부 주도의 투자와 자본 축적 과정에서 수출 대기업에는 과잉 투자가, 그렇지 않은 기업은 자금난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빠른 성장에 취해 쏟아 부었던 투자가 그만큼의 비율로 늘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과다하게 의지했던 각종 부채에 짓눌리기 시작합니다. 


이때 정부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해 1972년 1월 추가 금리 인하를 하고 기업들에 특별 자금을 지원합니다. 이른바 저리자금의 공급을 확대한 것입니다. 


사채를 동결하고 2000억원의 특별대환을 실시합니다. 각종 세율 인하까지 어떻게서든 기업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일방적인 지원을 합니다. 


한국 경제의 위기는 역시 세계 경기가 살립니다. 1972년 하반기부터 1973년을 거치면서 상승세를 되찾습니다. 세계 경제의 '미니붐'에 힘입어 수출이 급증한 덕분입니다. 1973년은 호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1974년 6월말까지 한국 경제는 수출에 힘입어 15.3%의 높은 성장률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잠깐의 붐도 곧 벽에 부딪힙니다. 이때도 역시나 해외 경제 위기였습니다. 바로 1973년 10월 일어났던 '석유파동'입니다. 해외 수요의 급속한 감소가 예상되던 시기에 해외 의존 성장에 대한 의구심이 고개를 듭니다. 국내 시장 개발과 산업의 질적 향상을 도모해야한다는 주장이 대두됩니다. 지금 해도 전혀 틀린 얘기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주장에도 정부는 계속 수출 강화정책을 이어갑니다. 1975년 종합상사 아이디어가 전경련에 건의가 됐고 그해 4월 정부의 허가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1973년 석유 파동은 석유와 수입 원자재 시설 가격의 급등을 야기합니다. 세계 경제 공황으로까지 파급되면 어쩌나 우려까지 나옵니다. 석유를 비롯한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은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에 타격이 됩니다. 



소규모 개방경제 '한국'에 충격을 줬던 오일쇼크 


여기서 잠깐, 중동 오일쇼크에 대한 얘기를 해볼게요. 이 부분은 박봉영 박사가 쓴 '최근 고유가와 1970년대 오일쇼크 비교'(2005년)에서 발췌해왔습니다. 


제1차 석유 파동은 1973년 10월 제 4차 중동 전쟁을 계기로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의 무기화를 선언하고 금수 조치를 실시하면서 촉발됐습니다. 국제 유가는 1973년 말 배럴 당 3달러에서 한달 만에 13달러로 치솟을 정도가 됐습니다. 한국처럼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수출 가공무역 중심 국가에게 직접적인 타격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때는 한국 경제가 막 중화학 공업화를 진행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여기서 화학은 바로 석유와 관련된 경제를 뜻하는 것이겠죠. 큰 타격이 됩니다. 


1970년대 석유 파동 이후 에너지절약적인 기술이 발전했고 석유 소비 효율성이 높아지긴 했습니다. 산업 구조도 서비스 산업과 IT산업의 비중이 증가했습니다. 석유에 덜 의존적인 구조로 변화가 됐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줍니다. 얼마전 있었던 요소수 사태를 보면 또 알 수가 있죠. 


또 이때의 경험으로 한국 건설사 등에서 중동에 직접 진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1970년대 초중반의 불경기를 이겨낼 타개책으로 중동 진출이 해결책이 된 것이죠. 본격적인 우리 건설 기업들의 해외 진출이 있었고 이중 중동 건설주가 높아집니다. "오일달러를 우리가 가지러 가자"였던 것입니다. 


1976년부터 본격화된 중동 특수는 1980년대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면서 한국 경제는 최악의 불경기가 될 수 있었던 악몽에서 벗어나 성장하게 됩니다. 


해외에서 돈을 벌어오는 기업들이 커지게 되면서 이들 기업의 주가도 크게 오릅니다. 이른바 중동 건설주가 대장주가 되었던 시기였던 것입니다. 1980년 중반까지 건설주들은 특수를 누립니다. 



교훈 


해외 의존적인 성장은 자본과 기술, 자원이 부족했던 한국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전략입니다. 그리고 이 전략은 통했습니다. 1960~80년대 이르기까지 세계 경제가 성장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이때는 2차대전 이후 주요 국가들이 고도 성장을 하던 때이기도 합니다.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이나, 일본 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S커브' 이론입니다. 모든 기술 혹은 방식은 처음 나왔을 때는 급속한 성장세를 보이지만, 이후 시간이 갈 수록 그 효과성이 적어진다는 점입니다. 


한국이 농업국가에서 경공업 국가로 탈피하면서, 한국 경제는 '수출 경공업'이라는 방식으로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 유명한 가발 같은 것이죠. 농촌에서 젊은 인구들이 올라오는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던터라 값싼 노동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공업 수출에 따른 성장도 둔화되기 시작합니다. 성장률의 정체가 일어나는 것이죠. 이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해 팔지 않는 한 더 큰 성장은 어렵습니다. 산업 구조의 고도화를 거치지 않고서는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없는 것이죠. 


1970년대 초반의 경제 위기는 경공업 위주 수출 산업의 성장 한계가 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른바 산업의 구조조정을 적절한 때 하지 않으면 성장률이 떨어지고 경기 하락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1970년대 중반 있었던 제4차 중동전쟁에 따른 오일쇼크는 한국의 중화학 공업화를 빠르게 당기는 촉진제 역할을 합니다.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회복을 가져왔던 것이지요. 


현재 우리 경제가 성장률 정체를 겪고 있습니다. 제4차산업혁명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새로운 시장이 개발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만한 기회 요소가 생겨야 하는 것입니다. 


2000년대에는 인터넷을 위시한 정보산업이 2010년대 이후에는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한 모바일 산업이 커졌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새롭게 성장할 모멘텀을 찾는 게 중요합니다. 이왕이면 그 중심이 제조업이 되면 더 좋겠지요. 


이전 09화 [경제위기란?-9]남유럽재정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