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8. 10. 주일 대예배 설교
본문: 사도행전 15:1-12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이번 주에 목사님께서 휴가 중이십니다. 저희처럼 크지 않은 교회에서는 따로 부교역자를 둘 수가 없으니 담임목사님 혼자서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하셔야 합니다. 물론 당회원이나 교인들과 의논하시기는 하지만, 많은 책임을 혼자 감당하셔야 하기 때문에 단독 목회는 힘들고 외로운 일입니다. 휴가 기간만이라도 잘 쉬시고 충전하셔서 오실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 들어가기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5장 말씀은 흔히 제1차 예루살렘 회의 혹은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이루는 유대계 그리스도인과 이방지역 교회, 특히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간에 있었던 할례를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을 통하여 구원은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중요한 이야기이지요.
1) 사도행전의 개요
오늘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전체를 간략히라도 알아두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대부분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시겠지만 잘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테니까요.
사도행전은 누가라는 사람이 쓴 책으로 같은 저자가 쓴 누가복음과 바로 이어지는 책입니다.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생애를 소개하고 그분이 구세주임을 알린다면,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 사건 이후, 제자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설립되고 그 교회가 예루살렘과 유다를 넘어 소아시아와 그리스, 로마까지 확장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전반부가 베드로 사도와 다른 사도들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져 나가는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바울 사도를 중심으로 더 넓은 지역에서 교회가 세워지는 이야기, 그러니까 이방인들의 교회가 세워져 나가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2) 예루살렘 회의
그중에서도 오늘 이야기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루살렘 교회와 최초의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겪은 갈등을 논쟁과 대화를 통하여 해결하면서 더 넓은 교회로 발전되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라는 율법 논쟁을 통해, 율법이 아니라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본질을 명확히 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서 몇 가지 제가 묵상한 내용들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 묵상하기
1) 1절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교회에 있던 정통 유대인 신자들이 안디옥 교회로 왔다는 말씀이지요.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령의 임재로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통하여 구원을 얻음을 깨닫고 교회를 이루어가고 있는 안디옥 교회 신자들에게 이들은 이전부터 신봉하고 있던 율법을 강요합니다. 뭐라고 하나요.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라고요.
여러분은 교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놀랍게도 많은 이들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교회를 윤리적인 규칙(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과 교리를 지킴으로써 장차 내세의 천국을 약속받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교회의 본질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고 해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의무나 율법, 혹은 윤리적인 지침이 아닙니다. 교회의 유일한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윤리적 규범을 지키는 일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목적이거나 필수적인 의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믿음의 관점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논쟁의 결론이 무엇이라구요?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구요.
5절에 보면 할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가 좀 더 자세히 나옵니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현실에서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규칙들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강조점에 따라 교단이 나뉘기도 하고, 교회마다 서로 다른 예배의 형식이나 규칙들을 지키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만 도구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유일한 규칙은 무엇일까요.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이고, 그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입니다. 저는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오직 이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믿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은 우리가 어떤 규칙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를 뛰어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 진리를 이렇게 아름답게 말씀하시지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5-39)”
초대 교회의 신자들도 이러한 사랑을 깨달으셔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중의 일부, 구체적으로는 바리새인이었다가 제자가 된 사람들은 다시 이전의 습관과 율법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율법을 강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사랑만이 전부인 줄 알면서도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멍에를 자신과 남들에게 강요하면서, 그리고 “이것이 옳아 저것은 틀려”라고 끊임없이 판단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오랫동안 우리가 살아온 관성, 우리가 쌓아 온 습관, 우리가 내려온 판단, 우리가 받은 상처, 우리 안의 두려움과 욕망 같은 것들이 그 사랑의 메시지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 안에서는 대번 ‘에이 그럴 리가 있나. 내가 교회도 열심히 나오고 헌금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니까 사랑을 받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갈 거야’라는 생각이 떠오르지는 않으시나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야만 우리가 믿음의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떠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참된 믿음의 사람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편견이나 상처, 두려움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판단과 장애들이 우리를 참된 믿음의 자리에 이르도록, 하나님과의 일치, 하나님과의 사랑 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인 이상 우리는 우리의 편견과 판단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으나,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보다 크거나 높을 수 없다는 사실, 우리의 어떤 조건과도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온 마음과 존재로 깨닫고 받아들일 때 참된 믿음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바리새인들의 할례처럼 고집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도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는 우리의 선입견과 판단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의무를 지우는 것,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 교회의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교회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다고 하여도 그것은 사람의 일, 세상의 일일 뿐입니다.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의 일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윤리적인 실천이나 규칙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것들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러한 실천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드러나야지, 구원의 조건처럼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 은혜가 먼저이고 실천은 그 사랑에 따라오는 열매입니다.
2) 들으라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살 수 있을까요? 4절을 보시면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한 사람들이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누가 말을 하고 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앞서 읽은 대로 5절의 이야기는 좀 다르지요. 그들은 안디옥 교인들의 말과는 아무 상관 없이 자기들의 주장을 고집합니다.
그리고 많은 변론 후에 베드로가 마침내 11절의 말씀을 무리에게 결론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그리고 그 다음 절이 저는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읽어보실까요.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이제 무리가 듣습니다. 그래서 듣는 일이 정말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기도할 때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들어야 하나요?
마태복음 3장 16절과 1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태 3:17)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라구요.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들으셨습니다. 무엇이라고 들으셨나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기뻐하는 자다”라고 들으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각자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고 딸이요,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다.’
이때의 들음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 존재로 듣는 것이지요. 그래서 들음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깨달음으로, 깨달음에서 실천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 속으로 한 번 되새겨 보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내 주위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 또한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사랑하는 사람임을, 나와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소중한 사람임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들음, 이런 깨달음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주, 매일 듣고 돌이키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매일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고, 매일 말씀 앞에 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여정입니다. 우리는 약하고 어리석은지라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는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율법을 강요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주여 말씀하시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2절을 제가 새번역으로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자 온 회중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통하여 이방 사람들 가운데 행하신 온갖 놀라운 표징과 놀라운 일을 보고하는 것을 들었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조용히 있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따로 시간과 장소를 떼어서 하나님 앞에 가만히, 조용히 있는 것이지요. 오늘의 이 예배도 그러한 시간입니다.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떼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분 앞에 가만히 있어서 들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도 당연히 해야 하지만, 듣는 것이 먼저입니다.
3. 나가면서
말씀을 마치면서, 듣는 연습을 위해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립니다. 이번 주에 성경 말씀을 읽을 때, 마음 속으로 먼저 “주여 말씀하소서 내가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해 보십시오. 그리고 한 1-2분 정도 침묵 가운데 가만히 있어 보십시오. 말씀을 통하여, 혹은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기도해 보십시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날마다 들으면서 믿음의 여정을 걸어갈 때,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점점 더 자라게 되리라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