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1일 수요예배 설교(본문: 요한복음 1:39-51)
목사님 출타로 수요예배 설교를 했습니다.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짧아서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만, 교인들은 좋아하셨을 듯^^
착한 사람, 나다나엘
1. 들어가면서
목사님께서 대만 타이루거 노회 방문차 출타하셔서 오늘 설교를 제가 대신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릴까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다가 얼마 전에 개인적으로 묵상한 본문인 요한복음 1장 43-51에 나오는 나다나엘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 속으로 좀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나다나엘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먼저 빌립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만나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부르십니다. 빌립은 그 말씀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단순히 좋은 선생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자기 민족이 오래도록 기다려 온 분, 구세주로 메시아로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빌립은 곧바로 나다나엘을 찾아가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네. 그분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네.”
이 말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그렇게 기다리던 구세주, 구약에 반복해서 예언되었던 메시아를 내가 만났는데, 그분이 바로 나사렛 출신의 목수, 예수라는 분이시다. 나는 그분이 메시아임을 믿는다.”
빌립은 이 고백을 자기 혼자 간직하지 않고, 나다나엘에게 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본격적으로 나다나엘의 이야기가 시작되지요.
2. 나다나엘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다나엘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본문에는 그의 배경이나 이력이 자세하게 나오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면 나다나엘은 믿음이 깊고 경건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열심히 찾았고, 성경 말씀을 그냥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깊이 생각하고 고민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빌립의 이야기를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한 것도, 빌립을 무시하거나 비난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메시아가 나사렛에서 나온다는 말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다나엘의 말은 “성경에 따르면 그런 이야기는 없지 않느냐”라는 반문에 더 가깝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라는 말씀은 그가 성실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무화과나무 아래는 진지한 성경읽기나 토의가 이루어지던 장소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는 말씀은, 성경을 열심히 읽고 깊게 생각하는 사람임을 내가 안다라는 의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긍정적인 부름에 응답해서 나다나엘은 빌립처럼 아주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49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
이 말은 이렇게 풀어서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선생님은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시고,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다스릴 분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그러니까 나다나엘도 빌립처럼, 예수님을 단순히 좋은 선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 전체를 걸고 구세주로 고백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다나엘이 보여 준 믿음이었습니다.
3.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그런데 성경을 조금 더 넓게 보면, 나다나엘 같은 사람만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 좋음을 나다나엘처럼 성실하고 경건한 성품, 뭔가 반듯하고 신앙적으로 열심인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고, 또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나서 모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 특히 복음서는 예수님을 만나서 인생이 변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들은 참으로 다양한 배경과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 마태처럼 세상일에 익숙한 사람, 그러니까 세속적이고 약삭빨라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삭개오처럼 돈은 많이 벌었지만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손가락질받던 사람도 있었고, 막달라 마리아처럼 상처 많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나다나엘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삶의 모습도, 살아온 길도 달랐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분을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 메시아이신 구세주로 고백한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말로만 끝나지 않아서, 그들의 삶이 달라졌지요. 돈을 좇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아보게 되었고, 자기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품게 되었고, 절망 속에 있던 사람은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삶은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4. 또 다른 공통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
그렇다면 나다나엘을 비롯해서,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들은 어떤 이유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학식이 높아서였을까요, 신앙 경력이 오래된 사람이라서일까요, 아니면 특별히 선하고 좋은 성품을 지녀서였을까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그분을 간절히 찾고 기다리던 사람들이라는 점, 그래서 그분을 만났을 때 그분께 마음을 열고 내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먼저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과 초청을 알아보는 간절함이 이들에게는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 7절과 8절에서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시나요. 그렇지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얻는 조건은 그렇게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찾는 것뿐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이유로 하나님 나라를 찾게 되었는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온 마음으로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찾고 있느냐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는 모두 어렴풋이나마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고백과 경험이 우리의 삶을 조금씩 바꾸어 가게 되지요. 그렇게 하나님 나라 경험은 우리를 더 깊은 하나님 나라 경험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러니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간절함,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도 주님의 사랑을 받기 원하오니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마음에서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고, 오늘 나다나엘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5. 나가면서
나다나엘은 자기가 알고 있던 지식이나 선입견을 고집하지 않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지 않고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 저는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고 싶고 따르고 싶습니다”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귀하게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그분과 동행하다 보면, 51절의 말씀처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지만,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다 보면 일상에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면서, 성령님께서 인도하고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점점 확장되어서 이 땅에서든 혹은 장차 천국에서든 하나님과 온전히 함께하는 완전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바울 사도는 비록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때에는 주님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의 우리는 부족하고 불완전하여서 다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부족하고 불완전한 우리를 완전히 알고 계시며, 언젠가는 우리도 그런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허물이 많은 사람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과의 완전한 동행의 자리에 이르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 하나씩은 품고 사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