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균형

[옆집언니]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by Bamnoon

스무살이 지날 무렵부터 깊은 새벽, 잠을 자다가 눈을 뜰 때가 가끔 있다. 눈을 뜨면 불현듯 혼란과 공허가 몰려오고, '이렇게 살아도 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곧, 내가 믿는 신에게 내게 맞는 삶의 방법을 묻고 도움을 청하다가는 다시 잠에 빠지곤 하는 순간들이다. 나는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다. 삶의 이유가 명확하고, 가치로 충만한 삶.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고상한 것(여기엔 신앙도 포함된다)들이 삶에 젖어들어 직업과 일치되는 인생. 커리어가 쌓이고 고상함을 나눌 수 있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세계변혁에 이바지하는...거창하고 멋진 어른. 그런 삶이라면 결혼도, 부모가 되는 것도 중요치 않다고 여겼다. 한번 뿐인 인생,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을 찾고 실현하는 것이 지금까지 내 삶이 추동되어 온 이유였고, 그 바람은 여전하다.


동시에, 나에게는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남자친구가 없던 기억이 몇 달 되지 않는다. 여성인 나에게 날 지지하고 돌봐주는 남자친구라는 존재는 내게 정말이지 ‘반쪽' 같았다. 가보지 않았던 곳을 함께 가보고, 생각을 나누고, 감정을 내보이고, 시간을 보내며 날 보호하고 기다려주는 그 존재들이 나를 나 되게 만들었다. 만남이 길어지고 서로에게 젖어들수록 그들은 내 신체의 일부가 되었다. 이 땅에 '나'라는 인간을 지탱하도록 만드는 두 발 중 하나가 그들의 것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내 삶의 얼마만큼은 그들의 것이었다. 내게 주어진 100의 삶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깊은 새벽 불현듯 스치던 상념들의 결론은 '그'가 되곤 했다. '그가 내 삶에 너무 많아, 그로 인해 내 인생이 균형을 잃었어. 나랑 맞지 않는 사람일까' 급작스럽게 찾아오는 공허함의 주인공이 된 그들에게 난 무언가 불만이었고, 왜인지 충분치 않았고, 언제나 퉁명스러웠고, 결혼 이야기가 등장하면 헤어짐을 선고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주인공 리즈가 침실에서 빠져나와 신에게 드리는 그 기도의 내용과 흐느낌은 나의 경험이었다. 공감했고 함께 울었다. 그녀는 그녀가 쓴 희극의 제목과 대사처럼 사랑으로 인해 그가 나이고, 내가 그이게 되는 흡수된 존재로 살아왔다. 온전히 흡수되고 나서 느끼는 공허함을 달래려 또 다른 남성을 찾는 그 도피적 선택이 그녀를 더욱 잃게 만들었다. 친구 남편의 말도 안되는 조크는 리즈의 흡수성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을 무례하게 드러낸다. “리즈! 네 옷 스타일이, 전에는 남편 지금은 데이빗을 닮았어. 개 키우는 사람은 그 개를 닮는대.” 보통 개가 주인을 닮는다는 말을 하지 않나. 아니, 어찌보면 주인이 개를 닮는다는 말이나 개가 주인을 닮는다는 말이나 그 말이 그말이다. 개의 주인은 개를 기르고, 개는 주인에게 충성한다. 리즈와 남성들과의 관계를 주인과 개의 관계로 등치시킨 친구 남편의 시선은 동등한 위치에서 사랑을 나누지 못한 리즈의 모습을 아프게 꼬집는다. 말도 안되는 이 이야기에 리즈가 쓴 웃음만 지을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녀는 자신을 잃었다. 그녀는 무엇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을까. 왜, 괜찮은 직업도 없이 꿈을 좇아, 대학원에 진학하려 하는 남자와 결혼했을까. 왜 신을 찾아 명상에 도취된 남자와 함께 지냈을까. 아이가 생길 것을 바라며 아기 물건을 모았다는 친구를 보며 줄곳 여행 잡지만 모아온 자신을 돌아보던 그녀가 찾고 싶었던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나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리즈는 상황을 정리해 나간다. 이혼을 하고, 관계를 정리하고, 그동안 가고 싶었던 이탈리아로 떠난다. 홀로 로마의 거리를 누비고, 젤라또를 먹으며, 이탈리아어를 배운다. 그녀의 귀에 아름다운 소리로 들려온 이탈리아어 ‘아트라베시아모’.


함께 건너자, 함께 흔들리자라는 뜻을 가진 ‘아트라베시아모’를 읊으며 그녀는 자신을 위해 ‘달콤한 게으름’의 시간을 갖는다. 그녀의 직업이 아니라, 누군가의 여자친구, 부인, 딸이 아니라, 그녀 자신을 위한 란제리, 음식, 글을 마주한다. 무엇보다 오래 전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아우구스테움에서 깨우침을 얻는 리즈의 모습은 내게도 의미가 있었다. 한때 찬란했던 역사의 한 공간이, 투우장으로, 노숙자들의 쉼터로 변하는 것을 보며 모든 건 변화한다는 사실. 하지만 변하면서 발전한다는 사실은 그녀의 말처럼, '현상 유지한답시고 변화가 두려워서 고통에 안주하는' 나에게 내 인생이 혼란스러운 게 아니라, 그야말로 ‘집착'이 문제인 것을 보게 해주었다. 영원한 건 없다고. 무너지는 것도 괜찮다고, 무너지면 다시 세울 수 있다는 철딱서니 없는 깨달음에 나도 희망의 끈을 보태어 걸어보게 되는 것이다.


관계의 정리는 내게도 두려움이었다. 이내 내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과 이별을 한다는 것은 내 삶이 단번에 깨질 것 같은 공포를 가져다주었고, 이 공포는 만나는 관계마다 6년, 7년씩을 이어가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던 이들과 (이기적이게도) 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내 혼란과 공허 때문이었다. 관계 안에 꽁꽁 매여서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서로에게 바라던 사이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열정과 공허의 반복 끝에서 나는 결혼을 했다. 아우구스테움과 같이, 우리가 혼돈과 번영의 세월을 견뎌낼 때 변화와 성장이 있을거라고.. 불행과 행복의 문들을 활짝 열어젖힌 채 신혼생활을 해내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새벽에 문득 문득 눈을 뜨고, 진짜 나의 삶을 찾는다. 리즈가 성공한 작가인 반면에 나는 스스로의 직업적 성취에 만족스럽지 않은 사람이어서일까. 아직도 나는 현상 유지한답시고 고통에 안주하고 있는걸까. 무엇이 나의 공허와 혼란의 근원일까. 여전히 집착이 문제이다.


인도 아쉬람에서 리즈가 만난 리차드는 대체로 스윗한 등장인물들 가운데 가장 비관적이고 날카롭게 리즈를 진단해주는 사람이다. ‘당신은 쉽게 살고 싶은 게 아니라, 힘든 게 싫은거야. 정리하고 여유가 생기면 새로운 세계가 열려. 명상실은 당신 안에 있어. 그거나 정리 잘해, 삶을 정리하고 싶으면 마음부터 다스려.’ 결혼을 하고 나니 그동안 나 조차 발견하지 못했던 내 모습과 당황스럽게도 자주 맞닥뜨린다. 그동안 하루하루 쌓이는 내 감정과 생각을 얼마나 뭉뚱그려 뒤섞어 놓았는지 발견한다. 사실 그건 이제서야 발견하는 건 아닌 듯 싶다. 내 외장하드, 내 공책, 내가 쓴 글들의 조각조각들은 박스에 쳐박혀 있듯이 뒤죽박죽이다. 언제 시간내서 정리하면 되지, 하고 쌓아둔 게 3년, 5년, 10년이 지나도록 그대로인 걸 보면 나는 작게는 작성한 파일들로부터 크게는 내 삶 전체를 정리해오지 않았던 사람인거다. 얼마간의 시간을 들여 정리하는 ‘힘듦’에서 도망쳐버렸다. 버리지도 못하고, 정리되지도 않은 채로 남아있는 박스들이 늘어날수록 찝찝하고 복잡하고 개운치 않은 기분들도 쌓여갔다. 물먹은 듯한 먹먹한 기분들이 마음을 좀먹고, 결국 나는 내 기분에 맞춰 사는 사람이 되어갔다. 켜켜이 쌓인 복잡한 마음에 기분이 다운될 땐 나 아닌 다른 누구를 생각하지 못했다. 마음을 시시때때로 정리하며 살지 못한 나의 몫이다. 뒤섞여 있는 내 생각과 감정 가운데 집착하고 있는 것은 뭘까. 좀 버려볼까. 그냥 포기해 버릴까. 좀 버리고 정리해서 여유가 생기고 용량이 커지면 아쉬람의 리차드 말처럼 내 마음이 필요한 사람, 내 기도가 필요한 사람, 내 손길이 필요한 사람에게 열려질 수 있을까.


영화는 마음과 삶을 정리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안내하지 않는다. 대신에, 좀 쌩뚱맞지만 '내 안에 신이 있다'는 종교적 진리를 말해준다. 신은 완벽하지 않은 나의 안에 계시다고. 성서에도 비슷한 구절이 여러번 등장한다. 우리가 신이 계시는 성전이라든가, 신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든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든가 하는 표현들인데, 다양한 해석이 있겠으나, 지금은 거룩한 신이 거하는 ‘공간으로서의 내 안’을 들여다본다.


모든 것을 내 맘대로 하지 않기 위해 이제라도 정리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외장하드와 노트북, 쌓여있는 박스들을 정리하고 내 감정과 생각은 ‘글쓰기’를 통해 군소리 없이 정리할 셈이다. 내 안에서 나온 글을 통해 내 삶이, 내 감정이 정리된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러면 고집스럽게 나만을 향하던 집착적 자기 사랑이 타인을 향해 열리겠지. 그러면 내 마음이, 내게 심겨진 신성들이 발휘되는 안전한 공간이 될 수 있겠지.


이제, 리즈는 다시 발리로 향한다. 영화 초반 발리를 여행한 리즈가 영혼치유자 케투로부터 들은 예언을 기억하고, 다시 케투를 찾았다. 케투는 그 때도 지금도 균형을 말한다. "신도, 자신도 너무 믿지 말고. 네 발로 걷듯 안정감있게, 중심을 잘 잡고,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마” 아침엔 명상하고, 낮엔 신나게 놀고, 오후엔 상담하고 하루의 끝엔 다시 명상하며 조용히 웃는 하루들을 반복하며 삶에 균형을 찾던 리즈는 새롭게 가슴 뛰는 사랑을 만난다. 새로운 사랑, 펠리페와의 관계 안에서 따듯함과 아름다움을 경험하지만, 반복하던 균형있는 삶이 하루하루 삐걱거리는 것이 두려워 이내 사랑을 놓으려 한다. 그 때, 치유자 케투의 조언은 리즈를 다시 사랑의 자리에 초대한다. “때론 사랑하다가 균형을 잃지만 그래야 더 큰 균형을 찾아가는거야.” 어쩌면 리즈에게 ‘균형’은 또다른 집착, 억압의 기제가 되었다.


살다보면 내 영혼이 안정되는 라이프스타일과 습관이 만들어진다. 균형을 찾기 위해 애쓴 결과일수도 있고, 익숙한 패턴의 반복이 습관처럼 굳어진 것일수도 있겠다. 심리적 균형은 궁극의 상태로 나와 타자를 이끈다.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하고, 앎을 실천하고, 내면을 닦아내는.. 확장된 시간을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불균형의 상태는 패턴을 깬다. 몰두하게 하고, 침잠하게 하고, 삐걱대게 한다. 사랑이 그렇다. 사람, 일, 예술, 공부.. 그 무엇에 대한 사랑, 마음씀은 전부 불균형의 상태를 자처하게 한다. 만약 누군가 내면의 불균형이 두려워 그 어떤 것도 충만히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기껏해야 나를 잃지 않을 정도의 균형감을 가진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충만한 불균형의 균형(뭔가 말장난 같지만)은 더 큰 세계를 품는다. 불균형으로부터 침잠된 깊이에 따라 더 다양한 타자와 사건을 균형감있게 바라보게 된다.


영혼치유사, 케투의 말대로 세상을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가슴으로 느낄 때 신의 이치, 진짜 자아와 진짜 사랑, 진짜 자유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무엇엔가 몰두해있는 친구들을 보면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만화책과 판타지소설에 푹 빠져 공부도, 밥도 먹지 않는 친구, 메이크업을 하느라 수업 내내 거울만 보고 있던 친구, 종일 놀이터에서 흙으로 탑을 쌓던 친구. 이들에 비해 나는 매사에 균형잡힌 아이였다. 시간과 정도를 잘 지키고 무얼하든지 어긋남 없이 알맞은만큼만 했다. 내게 불균형은 이상하고 나쁜 것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런 성향은 바뀌지 않았고 나는 하루를 살아갈 때도 취미와 자기계발, 대인관계까지 무의식적으로 균형과 정도를 맞춰내는 사람이 되었다. 균형있는 삶을 꿈꾸다가, 안정된 심신을 쫓다가 도리어 고통에 안주해버리게 되었다. 도대체 나는 얼마만큼의 균형을 가진 사람일까.


영화<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현상유지와 타인의 시선이 가져다주는 가상의 현실, 갑갑한 자아에 균열을 내라고 끊임없이 외친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언어로 읽자면, 남들의 세계에 피투된 삶에서 내 세계를 만드는 기투된 인생으로의 변화하라고, 너 자신의 '본래적 삶'을 살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균열도 괜찮고, 무너져도 괜찮다. 권태로운 시간을 멈추고 ‘다시’ 흔들리는 처음을 맞으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흔들림의 시작에 ‘타자’가 있다는 것이 좋았다. 오로지 자기 사랑, 자기 권태, 자기 열정만 보였던 리즈가 결혼을 앞둔 인도소녀를 위해 기도하고 위로를 전하고, 케투할아버지의 치료법 책을 복사하고, 민간치료사 와얀을 위해 친구들과 건축자금을 모으는 일이 그녀에게 기쁨이 된 것은 내가 느끼는 리즈의 가장 큰 변화다. 내 안의 한정된 에너지를 타인을 향한 관심과 기원으로, 내 한정된 시간의 일부를 타인의 소원을 위해, 나와 타인의 한정된 자본을 또 다른 타인에게 기꺼이 내 놓을 수 있게 된 리즈가 하게 된 새로운 사랑의 모양이 궁금하다. 더 많은 타자와 아트라베시아모 하게 된 그녀의 삶의 모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