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언니] 미안해요, 리키
영화 <미안해요 리키>(2019)는 평범한 가정의 일상을 다루고 있는 '평범한 영화'다. 자기 집을 갖고 싶다는 마음에 건설노동 일을 그만두고 택배기사를 자원한 가장 리키, 돌봄서비스 간병인으로 아침 7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일하는 아내 애비, 그리고 그들의 두 아이 세바스챤(오빠)과 라이자(여동생)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평범하지만 치열한 일상은 나의 이야기이고, 내 친구의 이야기이고, 내 가족의 이야기이지만, 너무도 현실적인 이 이야기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흘러나올 때 영화는 도리어 현실의 허구성을 파고든다.
극의 초반부터 반복된 리키와 세바스챤의 갈등이 극에 달할 무렵, 아들 세바스찬이 집을 나간다. 불면으로 잠에 들지 못하던 딸 라이자는 밤중에 누군가의 인기척을 듣고 방에서 나온다. 오빠 세바스챤이 계단을 따라 걸려있는 가족사진에 온통 라커로 x자를 그려놓은 상황. 현관 문밖으로 이미 가버린 오빠를 바라보던 라이자가 문을 닫고, 락커칠된 액자들을 응시하며 페이드 아웃된다. 이후, 극 초반의 연출과 동일하게 화면이 암전된 채 리키의 음성이 들려온다. 페이드인 된 화면엔 리키의 황망한 표정이 잡힌다. 분노와 당황스러움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리키, 열쇠들이 담긴 접시엔 밴 열쇠가 보이지 않고 그의 밴에는 라커로 쓴 Prick(얼간이)이라는 글자가 낙서되어 있다. 액자와 밴의 낙서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자연히 지목하는 가운데, 리키와 애비 뿐 아니라 관객들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리키와 함께 세바스챤을 찾아나선다. 세바스챤이 어렸을 때 타던 자전거를 타고 말이다. 아침 시간이 지나도 찾을 수 없는 세바스찬 때문에 출근하지 못한 리키와 애비의 심각한 분위기 사이로 낮시간이 되자, 세바스찬이 쿵쿵거리며 계단을 올라온다. 기다렸던 리키는 다짜고짜 밴 열쇠를 가져오라고 소리치고, 세바스챤은 난 모르는 일이라며 핸드폰이나 내놓으라고 반항하고 결국 분노한 리키가 아들의 얼굴에 손을 댄다. 그 순간을 방문 사이로 지켜보고 있는 라이자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시선이다. 시간이 흘러 다시 저녁이다. 홀로 바람부는 공원에 앉아있던 리키가 딸 라이자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아빠, 집에 오면 안 돼?” “아빠가 시간이 좀 필요해”, “부탁이야, 지금 와” 식탁에 둘러앉은 리키, 애비, 라이자. 세바스챤을 때린 리키가 부인과 딸에게 사과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라이자가 할 말이 있다며 울먹인다. 드디어 라이자가 자신이 본 오빠의 범행을 자세히 설명할 거라는 긴장감으로 라이자의 증언을 기다리던 관객에게 영화는 갑작스러움을 안긴다. 울먹이는 라이자가 갑자기 고백을 하는 것이다. '옛날로 돌아가고 싶었고 오빠도 돌아왔으면 했어. 아빠 열쇠를 숨기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어.'
열쇠를 숨긴 사람이 자신임을 밝히고 코끼리 인형 안에 숨겨두었던 아빠의 밴 열쇠를 꺼낸다. 이 갑작스러운 고백과 아이의 불안한 흐느낌이 반전의 당황스러움을 넘어서서 황망한 슬픔을 갖게 한다.
리키의 밴 열쇠가 없어지는 사건은 영화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 변곡점이다. 그 전환은 화면 암전의 반복(영화의 첫 장면도 암전된 화면에 리키의 목소리만 외화된다)이라는 효과를 통해 영화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 다만 의아한 점은 그 변곡점의 순간, 어쩌면 가장 중요한 '키를 숨기는 장면’을 영화는 왜 생략했는가 하는 것이다. 극적인 반전을 주고자 했다 하더라도 변곡점이 되는 부분인만큼 플래시백을 통해서라도 라이자가 키를 숨기는 장면을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영화가 택배 물품을 싣고, 배달하고, 음식을 만들어 노인들에게 제공하고, 대화하는 시시콜콜하고 반복되는 일상의 장면들을 세밀하게 응시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키가 숨겨지는 장면’의 부재 혹은 단순진술로서의 드러냄은 관객에게 당혹스러움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다. 왜 이 영화에서 극적인 사건의 장면은 내러티브 내에서 생략되고, 그 정보가 인물의 고백에 의지하여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인가.
먼저, 라이자의 고백이 관객에게 당혹스러움을 주는 이유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 당혹스러움이 단지 리키의 키를 가져간 사람이 세바스찬이 아니라 라이자라는.. 예상과 다른 전개에서 오는 반전에의 당혹감인지, 그 밖에 다른 이유가 존재하는지 말이다. 라이자는 시종일관 긴장과 갈등의 분위기 가운데 홀로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다. 그녀는 늘 가족을 기다리고, 관찰하고, 중재하고, 응시한다. 저녁을 먹다가 피곤함으로 소파에서 잠든 부모의 자리를 정리해주고, 바쁜 엄마가 메시지에 남긴대로 혼자 시리얼을 찾아 먹고, 친구에게 새침하게 셀카를 찍어보내고, 오빠를 깨우고 학교에 보내는 일까지 해낸다. 주말이면 바쁜 아빠의 택배일을 돕고, 집 밖에 있는 시간이 많은 세 명의 가족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쉬어갈 수 있는 존재, 대화할 수 있는 존재로서, 가족을 가족으로 기능하도록 유지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아니, 어쩌면 이 대견한 아이만큼은 지치고 고통스러운 삶을 걸어가고 있는 가족과 동떨어진 존재로 보인다. 고통과는 상이한 존재로서, 어른스러운 의연함과 사려깊음으로 가정을 유지시키는 인물이었던 라이자. 그 소녀가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서' 열쇠를 숨겼다고 고백하며 흐느끼는 순간, 라이자는 예외의 가능성을 깨고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떨고 있는 작은 새가 된다. 그 지점에서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그 가련한 인물을 마주하는 관객인 나는 일종의 자포자기의 심정을 느끼는 것이다. 지쳐있는 가족 안에 있던 의연한 존재의 그 ‘의연함’은 너무나도 ‘영화적인' 허구였음을, 그것이 사실 세계와는 관계 없는 것이었음을, 한밤 중 떨리는 소녀의 고백을 통해서 알게 된다. 아빠의 택배일을 돕던 라이자가, 시스템 기계의 정보들을 보며 '누군가는 해야 하잖아' 라며 정보 기록자에 대해 묻는 물음은 일종의 쓸쓸한 다짐으로, 그리고 열쇠 사건을 서러운 울음으로 드러낸 소녀의 고백은 다짐의 결말(허상)로 보여지는 것이다. 고통의 상황에 내던져진 이들 가운데 예외적 존재란 없다.
그리고 영화는 관객이 그 반전의 사건이 벌어진 시간을 관객으로 하여금 옅보지 못하도록 한다. 라이자가 벌인 그 일이 관객과 공유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라이자의 복잡하고 뒤엉킨 감정을 그녀의 행위와 표정, 혹은 밤이라는 어두운 상황과 또는 음악을 통해서도 보여주지 않는데 이를 통해 영화는 한 인물의 내면에 깊이 천착하지 않고 영화의 진행이 앞을 향해 나아가도록 한다. 이러한 형식은 영화의 법칙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데, 영화는 라이자가 키를 숨긴 사건 외에도 한 가족에게 닥쳐와 그들과 상존하는 고통에 대처하는 가족 구성원들의 시도를 서스펜스로 만들지 않는다. 극적 긴장감은 말 그대로 '극적'일 뿐이지 그것을 행위하는 개인에게 삶은 지극히 진지하고 처절할 정도로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일까. 영화가 세상을 다 담아낼 수 없다는 영화 스스로의 겸손함 때문인가. 이제 리키의 가족은 '모두'가 외로운 개인으로 남아 이전보다 더 가혹해진 상황들을 맞이한다.
인간 개인의 삶은 평범하고, 그 평범함 속에 침잠되어 있는 여러 갈래와 깊이들이 이야기의 세계 안으로 그저 밀어넣어진다. 그것이 글로, 영화로, 그림으로, 사진으로, 음악으로 확대되어 2차적 표현도구로 옮겨질 때 서스펜스가 될 뿐인데, 이 영화는 그 행복과 고통이 뒤섞여있는 가족의 삶을 미화하지도, 끔찍하게 고통스럽게 그리지도 않는다. 주목할 만한 음악효과의 삽입도, 특이한 촬영기법도 없다. 리키의 가족은 빚더미 속에서 어느날은 행복하게, 어느날은 고달프게 반복된 삶을 살아낸다.
그렇다면, 라이자는 왜 리키의 밴 키를 숨긴 것인가. 그녀는 키를 숨긴 다음날 저녁, 리키와 에비를 불러 자신이 한 일을 고백한다. "나 할 얘기가 있어. 오빠가 와서 사진에 스프레이 뿌린 날 자다가 깨서 소리를 들었어. 내려갔더니 오빤 이미 가 버렸어.’ 옛날'로 돌아가고 싶었고 오빠도 돌아왔으면 했어. 아빠 열쇠를 숨기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어.” 라이자가 돌아가고 싶은 ‘옛날’과 ‘예전’은 어느 시점을 말하는 것인가. 그 시점이 도대체 어느 때인지 영화는 도무지 설명하려들지 않는다. 불특정한 시점의 과거를 지칭하는 ‘옛날’, ‘예전’은 라이자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린치 당한 몸을 이끌고 다시 일터로 향하려는 리키를 붙잡은 세바스챤도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예전의 아빠로 돌아와. 모든 게 돌아가면 좋겠어. 더 바라는 거 없어”
수많은 영화가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을 이야기의 흐름과 영화적 테크닉을 통해 전개해왔다. 그리고 회귀 시점은 인물들의 회상 장면을 이끄는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의 영상이나 사진을 바라보는 장면을 통해, 과거의 시점을 극 초반에 포함시키는 구성 등을 통해 특정 과거로써 제시되었다. 그러나, <미안해요, 리키>의 라이자가 언급한 회귀 시점인 ‘예전’은 설명할 장면을 찾기 어렵다. 인간이란 무의식적으로 불특정한 ‘과거’자체를 그리워하는 노스탤지어의 존재라는 루즈한 접근은 영화의 흐름을 만드는 라이자와 세바스챤이란 중요한 인물들의 절박함을 무시하는 태도다.
물론 영화에 과거를 연상하게 하는 장면이 아예 없지는 않다. 에비의 간병대상자 중 한명인 몰리와 애비가 그녀들의 과거 사진을 들여다 보며 대화를 나눈다. 세바스챤이 5살, 뱃속에 라이자가 있은지 6개월 째 되던 해에 큰 집 앞에서 찍은 사진은 노던록 은행이 망하고, 주택융자까지 받은 남편이 회사에서 잘리면서 이 직업, 저 직업 전전하며 여전히 세를 살게 된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 사진 말고, 행복한 사진이라고 애비가 지칭한 사진 속에는 사랑에 빠진 리키와 애비의 젊은 모습이 담겨있다. 낡은 밴을 타고 왔지만 뜨겁게 사랑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애비의 목소리가 아련하다. 그녀에게 돌아가고 싶은 과거는 노던록 은행이 망하기 이전, 자신의 집을 가지게 될 것을 기대하던 그 시절인가. 그럴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장면을 세바스찬이나 라이자와 연결해서 생각해보자면, 그들에게 ‘예전’이란 애비가 열망하는 ‘예전’과 같을 수 없다. 라이자는 아직 태어나기 전이고, 세바스챤은 고작 다섯 살이었던 시절 전, 그러니까 경제적 어려움이 없던 시절을 과거로 말하기엔 모순이 따른다. 즉, 라이자의 생애를 두고 보면 그녀의 가족은 언제나 가난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세바스챤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들이 부모에게 애원하는 그 과거는 언제란 말인가. 영화는 그것을 과거의 어떤 장면이나, 정확한 사진으로 보여주지 않고 이것 역시 일상의 반복을 통해 드러낸다. 리키와 애비에게 가장 큰 고통은 깃털만큼의 무게라도 나아지지 않고 이들을 더 무겁게 짓누르는 반복적인 일상이다. 그들에게 이 일상으로부터, 가혹한 노동으로부터 탈출한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주목할 것은 리키와 애비의 답답한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이다. 감독은 불안하고 답답한 리키의 삶에 안식의 가능성을 주는데, 그 가능성으로 인해서인지 내게 리키의 삶은 완전한 절망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가능성은 구태의연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나도 다른 게 있었으면 하고 엄청나게 찾았지만) ‘가족'이다.
영화가 담담히 응시하는 리키의 가족이 가장 행복해 보이는 장면을 두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다. 라이자가 아빠 리키의 택배 일을 돕는 장면, 그리고 그 날 저녁 네 가족이 정사각형의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간병 간 애비를 기다리며 리키의 밴에서 세 사람이 함께 춤추는 장면이다. 물론 회사의 규율로 라이자가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네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는 일 마저도 이후엔 등장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은 잠자리에 들기 전 애비가 ‘원래의 자기 모습’이었다며 리키에게 행복감을 표현하게 하는 데에 충분히 행복한 시간이다. 애비 그녀를 울게 한 로지 할머니의 노랫말도 같은 맥락으로 읽히는 것은 과도한 해석인가. <지난 토요일 밤에 나는 결혼했죠/ 나와 아내는 정착하고 살았어요/ 지금 나와 아내는 떨어져 있답니다/ 동네 한 바퀴 더 돌고 오려고요/ 아이린, 잘자요/ 아이린. 내 꿈에서 만나요>
그러니까, 불안정한 리키와 애비가 얻을 수 있는 안식의 가능성은 모순적이게도 가족이란 이유로 고통을 분담하는 구성원들과 ‘함께’ 할 때 얻게 된다는 말이다. 미성년자인 아이들이 시간의 공유가 없이도 부모의 고통(재정적, 관계적)을 공유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인데, 이것과 더불어 함께하는 시간의 공유가 제거된다면 ‘가족’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가족이 함께하는 그 시간의 공유에 대한 구성원들의 바램마저 사라진다면 가족은 그저 계층 재생산의 핵심으로서 단절된 혈연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라이자와 세바스챤이 그토록 바라던 ‘예전’ 또한 ‘함께’의 시간이 아닐까. 자동차 열쇠가 없으면 아빠가 일하러 나가지 않을거라는 한 아이의 무모하고도 단순한 '상황 중단에의 시도'를 통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은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가져다준 한 소녀의 복잡하고 힘겨운 내면’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의 가능성을 담지한 가족’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열쇠가 없어지자, 그동안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던 리키의 집의 아침풍경이 보여진다. 카메라는 라이자와 애비, 세바스찬이 오르내리던 집 내부의 계단을 드디어 오르내리는 리키의 모습을 잡아내고, 세바스찬의 자전거를 타고 그를 찾으러 가는 리키의 모습 뒤로 동네의 풍경이 펼쳐진다. 일상의 단절이 가져다주는 또 다른 일상의 회복이다. 내 아들을 내가 너무 모른다며 세바스챤의 그림을 보는 리키와 애비의 모습은 공유하지 못한 시간에 대한 회한이다. 그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과거는 함께하는 시간이다. 서로가 서로를 돌봐주고 마음의 상태를 묻는 그 시간, 그 시간이 이들에게 너무도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