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에 대한 단상

모든 순간의 너와 나

by Bamnoon

한 티비 프로그램에서 방송인 김원희씨가 떠나보낸 반려견 곱단이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우연히 만났다. 그리움과 슬픔을 꾹꾹 참아내며 그 아이를 어떻게 보내주었는지를 설명하는 김원희씨를 보며 눈물 콧물을 훔치며 주책맞게 꺼이꺼이 울었다. 반려견을 둔 가족에게 반려견의 상실이 가져다주는 심정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에, 2019년 서울시에서 실시한 반려동물 관련 통계에서는 서울시 5가구 중 1가구가 반려동물과 살고 반려견이 85%로 대부분이라는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얼마나 많은 가정이 동물친구들을 가족으로 맞이해 살아가는지 체감되는 결과다. 실제로 집 밖 마실을 나가보면 반려견 없이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자신의 SNS공간에 반려동물 사진이 없는 지인들도 드물다. 뭐, 내가 속한 가정만해도 한 마리의 고양이(친정)와 또 한 마리의 고양이(시댁), 한 마리의 개(마이홈)가 함께 살고 있으니, 굳이 통계를 보지 않아도 함께 사는 가족 구성원의 변화를 쉽게 실감할 수 있다.


내가 어릴 적만해도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정은 특별한 몇몇 가정 외에는 없었다. 특히 우리집이 아이엠에프 이후 시골로 이사오면서, 문화적 요인에 의해서인지 개는집 안에서 함께 사는 ‘가족’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강아지 적을 벗어난 개는 도둑으로부터 집 지키는 ‘용’으로, 잔반을 처리하는 ‘용’으로, 마지막엔 ‘식용’으로만 여겨졌다. 물론 나도 목줄에 붙잡혀 사람의 작은 소리에도 반가워 목을 켁켁거리며 꼬리를 흔드는 해피를 보며 불쌍해서 풀어주자고도 했다. 복날이 되어 외갓집 식구들의 보양식이 되려고 전봇대에 매달려있는 초롱이를 보며 그 결정을 한 엄마에게 화도 내보았다. 하지만 짐승은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는 신념을 가진 우리집 대장 엄마의 결정에 힘없는 나는 다른 제안을 할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은 다시는 집에 짐승을 들이지 말자는 결정으로 초롱이 이후에 10년 넘게 동물을 키우지 않았다. 중간에 내가 자취방에서 혼자 몰래 키우던 골든리트리버 에린도 일년만에 들통이 나는 바람에 엄마에게 잡혀와 시골집 마당에서 키워지다가 결국 내가 회사에 간 사이에 다른 집에 넘겨졌으니, 15년간 우리집에 동물가족은 없었다. 고양이 루가 오기 전까지 말이다.


세상에 나온지 며칠 되지 않아 회사 뒷편에 버려진 아기 고양이를 동생이 데려왔다. 하도 삐약삐약 울어대서 회사 사람들이 데려다가 어디 풀숲에 던지라고 했는데 도저히 가여운 마음에 그 일은 할 수 없어 집으로 데려왔단다. 엄마는 함께 지내는 건 절대 안된다며 별채로 된 2층에 두라고 했지만, 눈도 못 뜨고 걷지도 못하는 고양이가 금새 죽을까 싶어 우기고 우겨 마루에서 키우게 되었다. 갓 난 아기 고양이는 동생과 내가 회사에 가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엄마 손에서 자랐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양이 우유를 주사기를 이용해 먹이고, 똥을 치워주고, 걷도록 엉덩이를 톡톡 쳐주는 돌봄을 ‘난 쟤 걷기만 하면 내보낼 것’이라는 말을 매일같이 내뱉는 엄마가 하게 되었다. 고양이가 걷게 되자 전쟁의 연속이었다. 온 벽지와 방바닥을 손톱으로 뜯어대는 루와 루를 내보내려는 엄마의 싸움. (사나운 짐승이 물어간다고) 밤에 잠만 재워서 엄마의 새벽예배 출근길에 그물망을 쳐 놓은 마당 우리에 넣어놓으면, 아가 고양이는 그물을 타고 탈출해서 새벽예배 후 집에 돌아오는 엄마를 현관문 앞에 앉아 맞이했다. 그러길 반복하던 어느날, 비가 억수로 오는데 새벽예배 후 집에 돌아오니 비를 홀딱 맞은 고양이 루가 다리를 절뚝이며 엄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루는 다시 우리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도저히 데리고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며 루를 쓰다듬던 엄마의 말간 눈시울을 잊지 못한다. 다리가 불편한 엄마가 루의 절뚝이는 모습에 더 애잔함을 느껴서였을까. 좋든 싫든 고양이 우유부터 먹여 키운 그 미운 정이 그 순간 발휘된 것이였을까. 아무튼 그렇게 루는 우리 식구가 되었다. 사람을 잘 따르는 그야말로 개냥이로 자란 루는 누구보다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다. 출장이 잦은 아빠와 직장생활을 하는 동생, 출가를 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루가 해준다. 엄마가 일어날 시간을 알아 미리 일어나고, 함께 침대에서 잠이 들고,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오면 밖에서 누굴 만났냐는 듯이 삐약삐약 거리며 엄마 뒤를 졸졸 쫓는다. 엉덩이를 엄마 무릎에 붙이고 누워 애교를 피우는 루는 이제 엄마의 ‘내 새끼’가 되었다. 루가 걱정되서 여행도 못가겠고, 루의 마지막을 그려보며 벌써부터 눈물짓는 루바라기가 우리 엄마다.


엄마의 새끼가 나와 동생이 아닌 ‘루’라면, 내 새끼는 크림색 라브라도 리트리버 ‘달’이다. 달이는 이제 일 년하고 10개월을 함께 한 내 친구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데려오게 된 달이는 데려온 지 이틀만에 코로나바이러스(인간의 것과 다른)에 감염되었다. 병원에서 치료와 약처방을 받아 괜찮다 싶었는데 일주일 후에는 파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치사율이 90% 이상이라는 무시무시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달이는 하얀 색 장돌기를 쏟으며 픽픽 쓰러졌고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선생님께 들어보니, 오로지 번식을 위한 견사에서 분양된 아이들이 쉽게 감염되는 병이라고 한다. 청결하지 못한 환경에서 태어나, 엄마의 젖도 충분히 먹지 못하고, 바로 개 분양장으로 실려가서 온갖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는 개들과 섞여 있다가 주인을 만난 달이 같은 아이들이 파보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많이 죽는다고. 선택들이 내 앞에 놓였다. 살릴 건지, 그냥 둘 건지. 살린다면 얼마정도를 내고 살릴건지. 물론 의사선생님의 선택지가 매우 현실적이었지만, 경험이 적은 초보 견주에게 아이의 생명을 두고 선택을 요청하는 것이 슬프고 분했다.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아니, 선생님도 죽을지 살지 확신하지 못한다고 하시는데. 비싼 약품들을 쭉 보여주고 선택하라고 하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냐’고 따져 물었다. 스러져가는 생명을 보며, 그래도 나같이 안타까움으로 치료하려는 주인을 만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인간의 욕심으로 그저 세상에 나오고 팔려 이내 죽어버리는 생명들에 대한 미안함에 고통스러웠다.


내 손바닥 두 짝을 합친 것보다 조그맣던 달이는 안간 힘을 써서 파보바이러스를 이겨냈다. 내가 쓸 수 있는 최대의 자본으로 입원을 하고 치료받아 다행히 살아났다. 기껏해야 일주일정도 함께 있었는데도, 자기 이름 ‘달'을 부르면 링거를 꽂고 넥카라를 한 인형같은 아이가 깡깡 짖던 그 모습이 내 가슴에 폭 들어왔다. 저 가련한 생명이 의지할 데가 처량한 나인 것이 도리어 내가 달이를 의지하게 되는 변곡점이 되었다. 다리가 불편한 엄마가 절뚝이며 다가오는 루를 ‘새끼’로 받아들인 것처럼. 달이는 정말 사랑스럽다. 아무래도 나를 엄마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와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늘 나를 바라보고 있다. 잠이 올 땐 잠투정도 하고, 잔디밭에서 놀아주고 밥을 줄 땐 한없이 기쁜 표정을 짓고, 내가 자신을 봐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무릎에 얼굴을 대고 내 눈을 계속 바라본다. 나를 향한 달이의 그 묻지마 사랑이, 밖에서 자존감이 바닥이 되었을 때 달이를 생각나게 하고 일과 사람으로 스트레스 받았을 땐 달이를 보고싶게 한다. 말을 할 것 같이 사람같은데, 말을 하지 않아 가끔 답답할 때가 있지만 '말 없이’ 그저 나를 받아주는 그 눈과 체온이 내게 위안을 준다. 아닌 게 아니라 돌아보면, 사람도 내게 많은 말 하는 사람보다 내 말을 그저 들어주고 날 내 모습 그대로 편견없이 바라봐주는 사람에게서 위안을 얻었던 것 같다. 감정이라는 것이, 공감이라는 것이 말로 내뱉어질 때 가벼워지는 경험을 자주 했다. 그래서 말이 어렵고, 그래서 말 하지 않고 듣는 것이 어렵고, 그래서 누군가를 ‘그대로’ 보는 것이 어렵다.


아무튼, 고귀한 생명과 함께 한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아프고 처량하고 고달픈 나를, 나보다 더욱 연약한 생명체가 의지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경험할 때 그게 무엇이든, 그게 누구든 가족이 된다. 자유롭게 자신을 내어주는 루와 달의 예쁜 사랑을 기억하면 이 아이들의 똥을 치우고 밥을 주고 산책시키는 노동이 기쁨이 된다. 그래서 서울의 다섯 가구 중 무려 한 가구가 반려동물과 산다는 통계가 반갑다. 뭐, 누군가는 여전히 사람이 사람이랑 사랑해야지 동물을 사람처럼 사랑해서야 되겠냐고, 신은 사람을 그렇게 창조하지 않았다고 혼을 내겠지만. 경험해보지 않으면 초롱이를 잡아 먹던 이십년 전 우리 엄마처럼 모르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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