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함'이 욕망이 될 때

[옆집언니] 영화 <승리호> 리뷰

by Bamnoon

영화 <승리호>는 착한 영화다. 우선 극의 배경과 시점이 환경오염으로 시작된 우주 개발 시대로, 시의적절한 주제를 가진다. 감독과 배우들이 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듯이 가족애가 인류애로 확장되는 지점에 이 영화가 있고, 멋진 히어로 한 명이 아니라, 사연을 지닌 밑바닥 인생들이 모여 지구를 구출하는 연대에 영화의 핵심이 담겨 있다. 극의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사람’, ‘좋은 세상’을 향한 견지는 대안가족의 성공적인 구성을 통해 완성될 뿐 아니라, 선악의 대립구조에서 분리되어 있는 아동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연약한 존재가 세계를 구원한다’는 믿음와 도덕적 균형이라는 두 가지 토끼를 잡아냈다. 거기에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영화의 십 분의 일인 240억으로 만든 한국 최초의 스페이스 오페라(우주 활극)이니 이 얼마나 착하고 기특한 영화인가.


그러나, <승리호>는 착하지만 ‘맛이 없는’ 영화다. 한 남자의 과거사로부터 온 고독과 방황을 담은 신파물로 읽을 때, 이 영화는 지루해진다. 스타워즈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처럼 히어로물로 읽을 때, 영화는 캐릭터의 지위도, 서사도 부실하다. 그래비티나 인터스텔라처럼 실감과 비실감을 넘나드는 스페이스 오페라로 읽기엔 (영화관에서 3D로 관람했을 땐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만화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디스토피아 이미지를 통해서 현실에 대한 비판과 경고의 메시지를 발견하기에 이 영화는 진부하다.


그러니 이 글에서는 이 영화의 서사나 이미지나 현실비판의 지점이 아니라, 내게 흥미로움(혹은 당혹스러움)을 안겨준 다른 어떤 것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이 영화를 즐기지 못한 이들의 거의 공통적인 비판지점은 캐릭터 탐구의 부족이다. 업동이(유해진)의 나레이션을 통해 소개되는 태호나 극의 핵심인물로 꼽을 수 있는 꽃님이의 개인사 제시를 제외하고는 장선장(김태리), 타이거박(장선규)을 비롯해 업동이, 제임스설리반(리처드 아미티지) 모두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단편적이다. 그리고 이들 중, 관객으로서 가장 납득할 수 없는 인물은 영화의 유일한 빌런인 제임스 설리반이다.


그에 대해 영화가 알려주는 단서는 그가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에 태어나서 전쟁 중에 가족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것. 그 때, 반드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는 것. 그리고 화성에 새로운 유토피아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 뿐이다. 그의 행동을 추동하는 것은 그가 경멸하는 인간의 욕망, 야만성과 모순성 그리고 이것들로 점철된 희망 없는 지구다. 그러나 정작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가장 야만적이고 ‘좋은 세상’이라는 욕망을 향해 치달아 있는데 영화는 이러한 비논리성을 설명하지 않은 채 설리반 자체를 평면적인 악으로 묘사한다.


어떻게 그가 150년을 살 수 있었는지, 왜 화성을 유토피아로 설정했는지, UTS회원 자격인 ‘욕망과 야만성을 가지지 않은 인간’이 어떻게 선별되는지 우리는 알 바가 없다. 6살 설리반의 다짐만이 이 영화의 ‘악’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된다. 그러니까, 내 생각에 우리 중 그 누구도 빌런인 설리반과 선한 승리호의 갈등과 대결과 같은 일말의 서사적 가능성 때문에 영화를 끝까지 보는 게 아니라, 도대체 설리반이 ‘무엇 때문에’ 지구를 멸망시키고, 선택된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하는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보는 것 같은 것이다. 설리반의 허무한 죽음 앞에서 우리가 터뜨리는 한숨은 그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도대체 왜 그가 악인이 되었어야 했는지 설명하지 않고 지워내버리는 영화를 향한 것일테다. 승리호의 악인은 누구여도 상관없다는 영화의 태도를 향한 한숨 말이다.


이로써, 승리호가 싸워야 할 대상은 제임스설리반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가 된다. 승리호 인물들의 욕망은 무엇인가. 내가 볼 때, 태호의 욕망은 그의 시계다. 순이를 찾아 좋은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집착이다. 장선장, 타이거박, 업동이의 욕망은 돈이다. 무엇이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대에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욕망이다. 다행히 승리호 식구들은 자신의 욕망과 맞서 싸워 결국 연약한 존재를 향한 ‘희생’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한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영화 자신이다. 욕망은 극중 인물 뿐 아니라, 영화 자체에서도 비춰진다. <승리호>는 극의 ‘착함’을 위한 명목상의 비약을 자주 저지르는데, 그 중 손에 꼽을 수 있는 장면은 꽃님이의 아빠(김무열)를 허무하게 ‘희생시키는’ 씬이다. 꽃님이의 아빠는 영화상에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아, UTS기동대로 하여금 무참히 죽게 되고 이 맥락 없는 죽음으로써 영화는 ‘대안가족탄생’이라는 착함을 달성한다. K신파 중 하나인 ‘부성애’와 시대적 트렌드인 ‘대안가족탄생’이라는 소재를 동시에 엮어냈지만 영화는 관객들에게 당혹스러운 경험을 선사한다. 사랑스러운 꽃님이가 갑작스러운 아빠의 죽음에도 크게 슬퍼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말이다. 끝내 영화는 승리호를 통해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갑작스럽게 이동된다.


그래서 나에게는 우주 속에서 긴머리를 흩날리며 『릴케의 시집』을 읽고 있는 업동이의 모습이 모순적이다. 릴케의 삶과 메타포들을 통해 ‘릴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특징은 ‘이승에 모든 것을 두고 저편을 그리워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존재를 쉽게 형이상학적 초월세계로 이송하지 않는 것 말이다. 업동이가 정확하게 릴케의 어떤 시를 읽고 있었는지는 알 바 없지만, 저편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인간존재를 초월세계로 쉬이 이송하는 것을 ‘욕망’이라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결국 영화의 목적이 욕망으로부터의 초월이었다면 나는 이 부분에서 영화가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착함’이라는 영화의 욕망을 관객에게 호소하는 방식으로 쉼 없이 드러냈고, 인간존재는 너무 납작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착한 혹은 좋은 영화’로 평가되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맛있지가 않다. 착함이 욕망이 된 영화가 진정으로 착한 영화의 기본 요소인 서사를 소홀히 할 때 영화의 ‘맛’은 휘발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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