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미의 비밀상자

by 또다시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 깊이 아로새기리

기쁨은 늘 고통 뒤에 온다는 것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中)


우리 가족은 함께 모이는 시간도, 대화도 많지 않았다. 마음이 아픈 엄마와 병약한 아빠는 자신들의 몸을 건사하느라 바빴다. 나이 차가 많은 큰오빠, 작은오빠, 언니는 제각각 그들만의 세계에서 살았다. 3살 터울의 남동생과 나는 어린 나이에 홀로서야 했다. 동생은 동생대로 친구에 빠져 살았고, 난 나대로 혼자서 내면의 세계를 단단히 다졌다.


1984년, 언니는 대도시로 대학교 진학을 했고 난 처음으로 내 방을 가졌다. 사춘기 소녀가 혼자만의 세상을 살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내 방엔 ‘비밀 상자’가 있었다. 상자 속 물건을 남이 볼 수 없도록 열쇠로 잠갔고, 상자를 방 한쪽 모퉁이에 숨겼다. 상자 안은 미라보 다리 일기장과 편지와 명언, 시구 등으로 채워졌다.

내 방이 생겼던 해, 성당 주일학교에서 전남 영광군 모래미 해변으로 캠프를 갔다. 캠프 둘째 날 저녁, 캠프파이어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해변에 모여 앉았다. 잠시 후, 내 눈을 사로잡은 한 사람이 등장했다. 180 센티미터가 넘는 큰 키에 깎은 듯 잘생긴 이목구비를 지닌 세련된 스타일의 남자였다. 그는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불렀다. 목소리는 성악가처럼 웅장했고 모래미 해변의 모래처럼 부드러웠다. 포크댄스 시간이 되었다. 그가 춤 시범을 보였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기다란 팔다리의 움직임은 학처럼 우아했고, 음악에 몸을 실어 춤을 추는 모습은 파트너를 홀리고도 남았다. 난 첫눈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살레시오 수도회 수사님이었다.

캠프 일정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모래미 해변에 남아 있었다. 수사님과 사귀고 싶거나 결혼하고 싶은 것도 아닌데 내 마음을 무조건 전하고 싶었다. 수사님께 편지를 썼다. 수녀가 되고 싶지도 않으면서, 나는 수녀가 되고 싶은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며 수사님의 조언을 구한다고 했다. 수사님은 답장을 해주셨다. “지금은 비가 옵니다. 빗물이 유리창을 타고 내리며 또 하나의 하늘색 커튼을 만듭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수사님의 첫 편지 첫 구절이다. 파란 표지의 미라보 다리 일기장과 ‘모래미의 비밀 상자’는 이렇게 생겨났다.


수사님의 편지로 내 사랑의 마음은 더욱 깊어졌다. 한지처럼 얇은 편지지에 만년필로 쓴 글자는 교과서의 그것들처럼 잘생겨서 읽는 이의 입에서 감탄이 절로 나게 했다. 사춘기 소녀의 부질없는 사랑이라 눈치챘을 텐데도 수사님의 진심 어린 편지는, 마치 신앙 에세이처럼 내 영혼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

펜팔이 된 지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수사님의 편지가 여느 때처럼 한 통 배달되었다. 광주 수도원에 계시는 수사님께서 내가 사는 목포에 다녀갈 일이 있는데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 수사님께서는 목포에 오셔서 내게 전화를 했지만, 난 핑계를 대고 만나러 나가지 않았다. 까만 피부에 짧게 깎은 커트 머리, 촌스러운 나를 수사님께 보여드리기 싫었다. 이 일을 마지막으로 ‘모래미의 비밀 상자’에도 더는 편지가 들어가지 않았다.


가족과 소통이 단절된 사춘기 시절, 내 유일한 비상구는 수사님께 편지를 쓰고 답장을 받는 일이었다. 당시 수사님의 만남 요청에 응했더라면 내 삶은 지금과 달라졌을까?


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볼 때면 바오로 수사님이 생각난다. 중학교 2학년 소녀의 마음엔 센강도 흐르고 빗물도 흐르고 사랑도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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